성극/요나

요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가득한 人間

은바리라이프 2009. 12. 26. 23:32

요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가득한 人間 

 

조정현                

 

 

 

 

 

1. 요나의 불순종(1,2장)

 

 

1)다시스로 가는 요나

하나님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깨우치라고 요나에게 명하셨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선지자 요나는 강퍅하고 악한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100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니느웨가 망해야 이스라엘이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나는 깊은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족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한 착각이었다.

요나는 동북쪽으로 가야 했지만 서쪽으로 향했다. 욥바항으로 간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주의 낯을 피하’려 했으니 여자들이 쓰는 히잡이나 차도르를 뒤집어썼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나가 어떤 노력을 했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었다. 요나가 배를 탄 직후부터 하나님은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바다에 폭풍과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후 곧 큰 물고기에 삼켜졌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냈다.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요나는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와 함께 이미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렸다. 요나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은 여호와께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2)시대상황

당시의 시대상황과 국제정세를 살펴보는 것이 요나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요나가 사역하던 주전 8C는 이스라엘이 남의 유다와 북의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던 시대다. 요나가 소명을 받은 때는 여로보암2세 치세 30년경으로 이스라엘의 국세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강적인 아람을 공략하여 수도인 다메섹을 정벌하고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국경을 넓혔다.

고대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은 니느웨를 니노스, 니누스라고 부르며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읍으로 인정했다. 아투리아스 벌판에 위치한 니느웨는 바벨론보다 더 컸다. 그 둘레가 약 19km로 성을 돌아보는데 3일이 걸렸다. 도시 주변 강에 인위적으로 댐을 만들었고, 50km가 넘는 지하 수로를 통해 성안으로 물을 공급했다. 니느웨는 사르곤 2세 때 제국의 수도가 됐고, 산헤립과 에살할든, 아술바니팔의 대를 거치며 더욱 웅대한 성읍으로 발전했다.

니느웨에는 각국에서 끌려온 전쟁 포로들과 조공들이 줄을 이었고, 2만2천장의 토판 문서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도 있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때는 앗수르단 3세(B.C. 771-754)의 치세로 추정된다. 강대국인 앗수르는 여러 가지 내부 상황과 북쪽의 신생 우라라트 왕국과의 분쟁이 겹쳐 이스라엘의 확장을 저지할 여력이 없었다.

 

3) 요나가 불순종한 이유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잔인하고 흉악무도한 침략자였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처음 침공한 때는 요나 때보다 약 100년 전인 주전850년대였다. 살만에셀3세의 침입에 오론테스의 카르카르에서 이스라엘은 아람, 하맛, 에굽 등 연합군들과 공동전선을 이루어 대항했다. 그때 아합 왕은 연합군으로 참여해 살만에셀을 격퇴했는데, 이것이 앗수르와의 첫 싸움이었다. 그후 주전842년 살만에셀의 재침공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요나는 고뇌하고 불순종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간 것이 주전763년경인데, 20년도 지나지 않은 주전745년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점령당했다. 또, 요나가 니느웨에서 말씀을 선포한지 40년 후인 주전722년, 살만에셀 4세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당했다.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극도로 싫어한 것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2. 요나의 선포와 불평(욘3, 4장)

 

1) 니느웨로 간 요나(욘3장)

요나는 큰 성읍 거리를 돌아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요나가 전하는 말에는 자비나 긍휼의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사흘 길을 하루 만에 걸어치운 것으로 보아 매우 형식적으로 미션을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운동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왕과 대신들도 베옷을 입었고, 가축들도 금식에 동참했다.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외에 이방인이자 원수인 앗수르 민족이게도 관심을 지니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인식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 사랑하시고, 이방민족들은 미워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창조와 구원의 은혜 안에 포함시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에 요나는 경악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 이방민족 배타사상은 요나 시대로부터 800여년이 흐른 주후 1세기경 사도 베드로에게까지도 면면히 이어졌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유도 거듭 거절할 정도였다.

 

2)니느웨의 회개

히브리인 요나의 회개 선포에 대해 왕과 온 국민들이 회개했다. 베옷을 입고 온 나라 사람들과 왕까지, 심지어 가축들까지 금식하며 회개했는데, 이러한 풍습은 앗수르,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서 보인다. 멀리 동아시아의 한국에도 이런 풍습이 있다. 또 그들은 특이한 신적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나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해 담대하게 앗수르의 운명을 선포하는 요나에게 강한 인상과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와 그의 선포에 두려움을 느낀 이유에는 주전765년경에 발생한 전염병 등 재해 탓도 있다. 또 주전763년 6월15일 앗수르 지역에 발생한 개기일식 현상은 요나의 심판 선언을 범상치 않은 것으로 부각시켜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 더 추측한다면 요나의 외모변화다. 물고기의 위산으로 인해 피부색이 탈색되거나 기형적으로 변모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그 또한 예언의 권위를 높이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또 앗수르의 역사를 보면, 주전763년 이후 5년동안 내전이 일어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 위정자가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동서 역사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이는 위정자의 기원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는 일도 되지만, 백성들을 위로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고 정적들에게 반란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미도 있다. 앗수르 왕의 처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팽창주의를 지향하던 앗수르가 내란에 휩싸인 것은 북방의 우라라트 왕국과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에 더해 전염병과 일식 등 천재지변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예비해놓은 상태에서 요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사명자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내가 뭔가 했다’는 착각이다. 사명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이 사명자의 역할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룸’은 사명자들끼리의 동역 같지만 실은 사명자와 하나님의 동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나는 극도로 터무니없이 분개했다. 이는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섭씨 45도가 넘는 언덕 탓도 있었겠지만 ‘하나님 뜻대로 다 하실 거면서 왜 날?’하는 허탈함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3)박넝쿨의 교훈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받아들여 재앙을 내리시지 않음을 보고 불평을 했다. 니느웨의 회개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심판 철회는 세계만민의 구원을 보장한다. 이 때문에 편협한 선민사상을 가진 요나는 ‘심히’ 불만스러워 했다. 요나는 성읍 동편 언덕 박넝쿨 그늘에 앉아 니느웨가 혹 심판받지 않을까 기대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박넝쿨은 하나님은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가르치는 교구였다. 식물 하나가 소중하다면, 니느웨에 있는 수많은 사람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신다.

 

4)요나서의 교훈

요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요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그의 부활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 요나를 니느웨로 가는 것을 방해한 것은 그의 자존심과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었다. 물고기 뱃속은 이스라엘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기독교인만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시며 모두를 사랑하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 모든 ‘종’-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고, 이해를 위해 노력할 용의가 있는 긍휼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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