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여로보암의 법칙(14:23-29)

은바리라이프 2009. 11. 12. 23:36

여로보암의 법칙(14:23-29)

2006/02/20



   본문 관찰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 회복하되
   이는 여호와께서 …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로보암Ⅱ

   예후왕조(10:30, 15:12)
     예 후(9:1-10:36, 28년)
     여호아하스(13:1-9, 17년)
     요아스(13:10-25, 16년) : 엘리사 죽음(13:20)
     여로보암Ⅱ(14:23-29, 41년)
     스가랴(15:8-12, 6개월)

예후왕조가 요아스에서 그의 아들 여로보암Ⅱ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지경을 거의 회복하는 국가적 번영을 누린다(25, 왕상8:65 참조).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버린 자가 아닌가(23-24).  그런 그에게 선지자 요나에 의해 승리가 선포되고 있다(25-26).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에 대한 흔들 수 없는 증거다.  지금껏 24절처럼이었던 자는 심판(진노)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이것은 여로보암을 읽는 일을 매우 고민스럽게 한다.



예후왕가

   여로보암의 죄(10:29,31, 13:2,11, 14:24, 15:9) vs. 은혜
   예 후(9:1-10:36, 28년) : 엘리사, 4대(代)에 이르는 왕가(10:30)
   여호아하스(13:1-9, 17년) : 구원자(5)
   요아스(13:10-25, 16년) : 엘리사, 언약/은혜(23)
   여로보암Ⅱ(14:23-29, 41년) : 선지자 요나, 회복/구원(25,27,28)
   스가랴(15:8-12, 6개월)

예후왕조는 스가랴까지 102년 6개월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다(10:36, 13:1,10, 14:23, 15:8).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후를 포함한 5대(代)에 걸친 왕가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가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10:29,31, 13:2,11, 14:24, 15:9).  하지만 더 놀랍고, 그래서 신비하기까지 한 역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심이다(9:1,6,25-26,36-37, 10:30, 13:5,15-19,23, 14:25,27,28).  이 기막힌 역설(쌍곡선) 안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지금 여로보암에게까지 흘려왔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만에 정변에 의해 암살되고 예후왕조는 문을 닫는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40년이 지난 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다.  역사는 이렇듯 급박하게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전동차인 줄도 모르고 기세가 등등하기만 하다.   



여로보암Ⅱ

한 사람의 왕으로서 평가를 받는다면 여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를 구가한 왕이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가장 가깝게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25b, 왕상8:65) 영토를 넓혔다.  뒤에 더 생각하겠지만 이 일은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25a)이 성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28b)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지금 열왕기의 저자도 혼돈스러워하듯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24)던 이 패역하고 불의한 여로보암 2세가 41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다스렸음에도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릴 만 한 어떤 실증적인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24절 정도면 25-27절이 이어져 나오면 안 된다.  그럼 무엇인가?  

이 대목이 열왕기 기자의 코멘트다(26-27).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가 잘나서, 예뻐서, 의롭다거나 바른 왕이어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기준, 말하자면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같은 인과론을 뿌리째 뒤흔들도록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나님은 누구 하나 도울 자도 없이 고난의 처참한 소용돌이를 통과해 가는 이스라엘을 보셨다(26).  동시에 하나님은 비록 여로보암의 죄로 뒤범벅이 된 이스라엘일지라도 저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이쯤 되면 내가 여로보암 2세라 해도 오해할 만하다.  북왕국에서 40년 넘게 왕위에 있었던 왕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넘어지고 마는데, 그래서 이 정도면 분수를 모르고 날뛸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시각을 놓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시각은 다르다.  여로보암 2세 때 나라가 융성한 것은 요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의 성취로서(25), 하나님의 긍휼과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26-27).  여로보암 2세를 보면 숨 막히듯 답답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의 해답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호세아]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1b)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9:19-10:2)

   [아모스]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2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2:6-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5:4-5)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5:27a)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7:17b)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으니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8:2b)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8:14)

여로보암 2세가 보여주는 인생법칙은 두 얼굴이다.
하나는 열왕기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들(아모스 & 호세아)이 보여주는 이면적인 모습이다.  열왕기를 보면 24절처럼 살아도 25-28절처럼 되는 것 같아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혼돈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오해를 진실인양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읽으면 여로보암의 법칙의 실체(identity)를 알게 된다.  

여로보암 2세 이후로 40년 동안에 스가랴(15:8-12, 6개월/예후왕조 끝) → 살룸(15:13-16, 1개월) → 므나헴(15:17-22, 10년) → 브가히야(15:23-26, 2년) → 베가(15:27-27, 20년) → 호세아(17:1-6, 9년/이스라엘 멸망, BC 722년)에 이르도록 무려 6왕이 바뀐다.  브가히야만이 므나헴의 아들이고 나머지는 다 정변에 의해 왕위에 올랐을 정도로 말이다.  

선지자들이 고발하는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보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24)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가를 알고도 남을 정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나라는 가장 번영과 부강을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도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신다(25-27).  이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 때문에 여로보암에게서 나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더 걱정이다.  잘난 것도 없고, 주님을 위해 바르고 정직하지도 않고, ‘작은 일’에 충성하며 산다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부끄러움과 황송함이 더 큰 여로보암 같은 내게도 평안과 형통을 베푸신다.  

태풍이 몰아치려면 잠시 고요한 시간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지 겁난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활동한 아모스와 호세아의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는 아침이다.  여로보암의 법칙은 자칫 오해하면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여로보암처럼 살아도 역대기 기자의 평가처럼 긍정적일 수 있다는 씻을 수 없는 오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이다.  그 이면에는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의 피맺힌 절규처럼 이스라엘의 마지막이 임박하고 있는 중이다.  나 역시 여로보암의 법칙에 예외일 수 없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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