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팥죽에 대한 야곱과 에서의 태도” (창 25:19~34)

은바리라이프 2009. 12. 24. 18:01

“팥죽에 대한 야곱과 에서의 태도” (창 25:19~34)

 

 

오늘 저희가 같이 읽은 본문의 말씀은 두 형제인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성경의 말씀은 두 쌍둥이 형제의 태생의 비밀과 미래에 있을 그들의 삶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설의 고향에서 한 노승이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그의 부모에게 아기의 미래를 점지하여 주는 이야기처럼 두 아이가 같이 태어나게 되나, 안타깝게도 한 아이는 다른 민족의 지배자 가 되고 다른 아이는 섬기는 자가 될 것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 한가지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쌍둥이 중에서 형의 이름은 에서였고, 동생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두 아이 모두는 한 민족의 우두머리가 될 터인데,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30절 말씀에 나오는 붉은 죽(red stew)이었습니다. 누가 강한 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판별은 다름 아닌, 팥죽을 대하는 태도가 기준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들의 삶의 전체를 송두리째 바꿀지 당시에 알 수는 없었겠지만, 팥죽에 대한 두 형제의 판이한 태도는 결국 그들의 생물학적인 운명과 권리(맏아들의 장자권)마저 바꾸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본문말씀 가운데 특별히 붉은 죽(팥죽)이 갖는 의미와 이를 대하는 두 형제의 태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이었습니다. 28절의 말씀대로 그는 익숙한 사냥꾼(a skillful hunter)인 들사람이 되었고, 반면에 둘째 아들인 야곱은 장막에 주로 거하는 종용한 사람(a quiet man)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해줍니다. 어느 날,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는데,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와서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30절에서 큰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야곱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마도 이 장면을 드라마로 만들면 비장한 각오를 전해주는 효과음악이라도 깔려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그런데 에서는 이런 당돌하면서 도발적인 동생 야곱의 질문에 대한 에서의 반응은 너무도 단순하여서 우리를 당혹스럽게까지 합니다. 3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우리는 이 몇 가지의 시퀀스에서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장자권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유난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있어서 장자권을 갖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권은 부친의 사후에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제사권 그리고 유산권 그리고 축복권에 대해서 주도적인 권리를 행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7 29절은 아버지 이삭이 맏아들인줄 착각하고 야곱에게 전하는 맏아들에 대한 축복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에서는 맏아들이면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이 맏아들이라는 위치는 매사에 심각하게 이해하고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의 사냥과 그로 인한 생리적 욕구는 가까이 느껴지지만, 맏아들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 당장 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의 가치가 쉽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장자권이란 저 멀리 있는 인생의 끝에나 있을지 모를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무시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리한 야곱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본문은 야곱에 어떤 것에 재주가 있고, 유능한지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형보다 열등한 조건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은 기술이 능한 사냥꾼이었지만, 그는 그저 조용한 사람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과 미래를 바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꿰뚫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팥죽을 장자권과 바꾸려고 하는 그의 요구는 형에게 거는 가벼운 농담이라기 보다는 비장하고 또는 비열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삶의 야망을 느끼게 합니다. 적어도 야곱은 그것이 부당한 방법이든, 반 혈육적인 방법의 윤리 도덕적인 논쟁을 떠나서 미래에 있을 삶의 역전 그리고 그 자손의 복을 꿈꾸는 자였습니다. 삶의 레이스를 길게 보고, 당장의 열등과 고난을 인내하려는 치밀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 에서가 장자이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동생을 섬겨야만 했는가를 팥죽을 두고서 거래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째로 에서는 그에게 삶의 위기가 왔을 때, 당장의 필요한 욕망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치관/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의 혼선입니다. 그는 아까도 살펴본 것처럼 지금 내가 죽지 않는 것이 것이 장자의 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장자의 권리라고 하는 것이 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유산의 권리보다 자손의 번영과 복이 더 큰 장자권의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이익보다 나의 자식이, 혹은 후대가 더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은 그런 사람은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강한 민족의 우두머리도 될 수 없고, 다른 이들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가 되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습니다. 지금 내가 당장에 힘들어도 더 멀리를 내다 볼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하고, 후대를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그 당대에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주어지지만 그 시기는 지금 당장 이곳(right now here)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검증의 시간이 끝나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검증 받지 않는 자에게 무조건 귀한 선물을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에서는 인내의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능숙한 들사람이 설마 한 끼를 안 먹는다고 죽기야 했겠습니까? 설령 몇 끼를 굶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단팥죽을 먹고서 지불해야 할 비용에 대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인내를 더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 있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실 때 가장 필요한 성품이 인내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이 이삭을 얻기까지 백 년을 기다려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될 때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넘게 인내해야 했습니다. 역사 가운데 실패하여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 속에서도 그들은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복은 당장에 주어지는 금과 은이 아니라 세월을 거쳐서 인내의 상급을 통해 형성된 그들의 삶의 정신과 태도였고 이를 통해서 물질적인 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서는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의 욕망 때문에 미래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삶을 급급하며 미래를 포기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소망을 가지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려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크리스찬들은 미래를 현재로 품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와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현재를 살지만 미래를 끌어 당겨서 현재 속에서 함께 미래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지금 그를 지탱하고, 움직이고 그리고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꿈꾸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영악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미래를 바꾸기 위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축복의 통로로 쓰시는 것입니다. 현실이 축복의 채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축복의 파이프라인(pipeline)입니다. 그런 이에게 이 단팥죽은 도약을 위한 절묘한 기회가 되고, 승부처가 됩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자라야 이런 무모한 도전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의 부도덕한 방법을 탓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의 미래의 소망이 없는 것에 편을 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미래의 소망을 잃지 않는 자가 복의 통로가 됩니다.

 

다시 한 번 팥죽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34절의 말씀대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는 결국 미래를 팥죽 한 그릇에 넘기게 되고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단 한 그릇의 붉은 죽이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질문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팥죽 한 그릇은 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이 팥죽이 우리 삶에 적용된다면 뭘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사실 그들에게 팥죽은 그냥 일상의 한 음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에서에게는 이것이 그의 중요한 것을 내놓게 하는 상품이 되었고, 야곱에게는 인생역전의 행운을 가져다 준 로토 복권 같은 되었을 뿐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여름에 별미가 되는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평범한 한 일상의 사건이 혹은 만남이 우리들 삶에 삶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창한 기적의 방식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일하시기 보다는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안목과 선택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안목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런 도전을 주십니다. 너는 네 일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비범한 하나님의 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느냐?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생업의 일 가운데서, 매 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수요일마다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이런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네 목숨의 연명을 위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너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비범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가를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에서처럼 현실의 욕구와 욕망에 사로잡혀서 인내를 갖지 못하는 자에게는 일상이 오히려 자신을 더 축소하게 하고 왜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비전을 갖고 소망을 품고서 현실을 이겨내며 전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평범함도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안목과 태도를 갖게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있을 때 일주일의 반복되는 예배도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내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안목을 가지려는 자를 찾으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그런 삶의 안목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면에서 일상은 변화없는 지루함일 수 있고, 반복은 무료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라는 것은 때로는 냉대를 참는 것이기도 하고, 무료함과 번거로움을 참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이 평범한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비범한 뜻을 기대하고, 그것을 견딜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찾아와 주시고, 그 분의 특별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장자권을 얻고서도 20년을 넘게 형의 분노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에 숨어서 지내며 결혼도 못하고 냉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복을 상속받은 자였고,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평범한 것에서 비범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찾을 수 있는 저와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