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BC 8세기 중엽에서 히스기야 죽음까지

은바리라이프 2009. 10. 25. 14:54

12 BC 8세기 중엽에서 히스기야 죽음까지

 

  BC 8세기 후반 초기에 이스라엘은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지금까지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리된 두 왕국을 추적해 왔다. 두 나라는 이웃 나라와 끊임없이 싸웠고 가끔씩 굴욕과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정치적 자결권을 상실한 적이 결코 없었다. 세계적 사건의 영향을 받아 왔지만 간접적이었지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없는 가운데 명맥을 유지해온 역사라는 게 사실이다. 이스라엘을 심각하게 괴롭히고 복속시키려는 제국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어떤 형태로든 생존을 못하여 멸절된 무능한 나라는 아니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는 사건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BC 8세기의 역사는 달리 돌아 갔다. 앗시리아가 본격적인 제국건설로 나섬으로 주변국들은 이 제국의 태풍권에 휩쓸리게 되었다. 앗수루의 태풍에 각국의 운명은 부러지고 꺾이어 뿌리까지 뽑혔다. 이스라엘이 여기 포함된다. 유다도 이 시기에 혹독한 곤욕을 치른다. 그럼에도 유다는 140년 더 존속한다. 하지만 유다는 요시아 시대를 제외하고는 다시 정치적 독립을 회복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를 관통하려 한다.
  우리의 주된 사료는 열왕기이고, 역대기는 그 보충 자료이다. 앗시리아 왕실의 자료는 아주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 또한 이 시대를 조명해줄 것이다. 물론, 이사야서, 미가서, 호세아서—등이 아주 고귀한 보도를 해 준다.

 

제 1 장 앗시리아의 진출

12-1 이스라엘 몰락의 시작

  여로보함의 죽음(BC 746)을 기점으로 북 왕국의 역사는 재난의 이야기로 바뀐다. 안으로 곪은 병이 밖으로 터져나오면서 앗수루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무정부 상태를 맞는다. 그 25년 후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1 앗수루의 제기 // 디글랏빌렛셀 3세

  앗수루가 유프라테스강 너머의 땅을 탐낸 것은 한편으로는 이 땅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확보하려는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땅이 이집트, 소아시아 서남부, 지중해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앗수루 군대가 한 세기 이상 서부로 정기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앗수루의 세력 기반은 흔들려 왔고 주변 경쟁국들의 위협이 상존해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정복을 하더라도 그 지역을 고정관리하거나 영토로 편입할 수 없었다. 앗수루의 역사는 그래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숨통이 끊어질 것 같던 이스라엘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던 기간이란 곧 앗수루의 후퇴시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은혜의 시기는 끝났다.

  앗수루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은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디글랏빌레셀 3세(Tiglaht-Pileser 3세, BC 745-727)이었다. 왕권을 장악하자 그는 남쪽 바벨론의 아람계(갈데아 사람들) 여러 민족들과 북쪽 우라라트(Urartu) 왕국에 대하여 앗수루의 힘을 재천명하고 서부로도 앗수루의 힘을 실현하는 과업에 직면한다. 여기서 그 경위를 소상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이 목표를 성취한다. 바벨론은 평정되었다. 통치말기(BC729)에 이 지역의 소요가 있자 이를 제압하면서 이 지역의 왕위를 차지하여 풀루(Pulu)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우라라트 왕국의 사르둑(Sarduk) 2세는 주변 동맹국들을 규합하여 유프라테스강 서쪽에서 앗수루와 맞섰으나 대패했다. 여세를 몰아 앗수루는 우라라트 왕국의 수도를 포위했다. 이후 우라라트는 많은 영토를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밖에도 앗수루는 북부 이란(iran)의 메데사람들에 대하여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데마벤드(Demavend) 산악 지방까지 진격한다.
 

이 과업 달성 훨씬 이전에 디글랏빌레셀은 서부 지역의 정복사업에 눈을 돌려 BC743년과 그 후 수 차례에 걸쳐 수리아를 공략한다. 처음에는 야우디(Yaudi) 동맹의 저항에 직면한다. 하지만 추풍낙엽이었다. 적어도 BC 738년까지 디글랏빌렛셀은 하맛(Hamath), 두로, 비불로스, 수리아와 다메섹을 비롯한 가나안의 여러 나라들에게서 조공을 받았고, 이 중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글랏빌레셀의 군사작전은 공물을 긁어 모으기 위한 원정이 아니었다. 영속적인 정복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선왕(先王)들과는 달랐다. 이 목표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전에 없었던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갔다. 그것은 반란의 무자비한 진압이나 그 나라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란이 일어난 국가를 응징하는 차원을 넘어서 반란 국가 자체를 본국에 통폐합시켰다. 물론 반란자들을 잔인하게 처리했다. 이리하여 그 민족 자체를 뿌리 뽑아 저항심이 서식할 수 있는 민족 감정 자체를 말살했다. 이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갔다. 이스라엘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정책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할 차례가 되었다.

 

2 이스라엘의 무정부 상태(왕하15:8-28)

  아무리 좋은 지도자를 가진 나라라도 강대국들이 겹겹이 둘러 싼 틈바귀에서는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지도자가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경우일까. 위기가 닥쳐오자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 실질적인 국가의 기능은 마비가 되었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10년 동안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며 그 가운데 셋은 폭력으로 왕위를 빼앗았다. 이 중 어느 누구도 왕권을 찬탈할 합법성이나 타당성을 갖지 못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 동안 왕위를 유지했다(BC746-745). 그리고는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했다. 왕위를 빼앗은지 한 달 만에 살룸은 가디의 아들 므나헴에게 살해된다. 그는 이스라엘의 옛 도읍지 디르사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잇따른 정변이 일어난 동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혹 개인적인 야망이나 정책에 대한 반감, 또는 지역간의 감정이었을까.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정변은 나라를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내란상태로 몰아 넣었다(왕하15:16).

  디글랏빌레셀이 서부지역으로 진출하였을 때 그에게 공물을 바친 자는 므나헴(BC745-737)이었다(왕하15:19와 디글랏빌레셀의 비문 참조. 성경에서는 그를 불(Pul)이라 부른다. 이는 그가 바벨론을 통치했을 때의 이름이다. L.D.Levin 참조). 공물은 과중한 것이었기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주에게 인두세라는 방법으로 부과되었다. 므나헴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융통성을 가질 수 없었다. 아마 그는 앗수루가 자신의 왕위를 보전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자진해서 나라의 독립을 앗수루에 바치고 그 대가로 그러나 무거운 조공의 짐을 받아 왔다. 이것은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감을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BC737-736) 르말리아의 아들 베가가 그를 암살했다. 베가는 군 장성이었다. 브가히야가 반 앗수루 동맹에 가담하지 않자 수리아와 불렛셋 군주들이 반감을 품고 베가의 반란을 지원했을 것으로 보인다(사9:8-12). 어쨌던 베가는 므나헴-브가히야의 정책을 폐기하고 반 앗수루 동맹에 가담한다. 므나헴이 왕위의 보전을 위해 팔아버린 이스라엘의 독립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 후 반 앗수루 동맹은 이집트의 도움을 기대했는지 모른다(왕하17:4).

  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호7:11,12:1). 베가는 반 앗수루의 동맹편에서 유다를 끌어 들이려 한다. 그러나 유다가 앗수루를 두려워하여 가입을 거부하자 이스라엘은 유다와 전쟁을 치른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3 이스라엘의 내부 붕괴

이 혼란은 이스라엘 내부의 붕괴를 재촉했다. 이스라엘은 암초에 부딪친 선박처럼 침몰해 가고 있었다. 유능한 선장도, 우수한 조타수도 없었다. 선원들은 사기가 떨어져 어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호세아의 설교는 이스라엘 곤경의 심각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는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 이스라엘을 갈갈이 찢어 놓는 갖가지 음모와 이에 대항하는 역(逆)음모(호7:1-7, 8:4, 10:3이하),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국가의 정책을 미친 듯이 이리 저리 꿰어 맞추는 모습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호5:13,7:11,12:1). 또한 거기에는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생명도 재산도 안전하지 못했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다(호4:1-3, 7:1).

 

아모스가 공공연히 비난했던 당시의 사회적 범죄로 인하여 사회는 분열되어 형제간에, 계층간에, 파벌간에 다툼이 빈번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국가로 뭉칠 수 없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강력한 통치가 붕괴되고 그 보다 더 강한 앗수루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그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힘을 내부적으로 소진하게 했던 사회적 분열현상이 외부의 충격을 받아 붕괴로 치닫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이교신앙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 이교신앙이 이 당시 이스라엘에서 술주정, 방탕, 종교적 비호 아래서 자행되는 음행으로 사회를 타락시켜 갔고, 민족성을 썩게 했다(호4:11-14,17,이하 참조). 여호와 신앙의 엄격한 도덕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성실성도 없었고, 원칙도 없었으며, 사심없이 나라를 위하는 행동을 가져줄 토대가 되었던 신앙도 없었다.

이러한 내부적인 부패는 정치적 위기를 만나 표면화되고 약화되었다. 이스라엘을 응집시킨 것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었다. 이스라엘의 행동을 규모있게 만든 것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잊혀졌고, 언약이 있었던 그 자리에 이기주의가 횡행했다. 식인종들처럼 이스라엘 사람이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었고(이사야9:19이하), 이교도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야만성을 들어냈다(왕하15:6, 암1:13).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는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북부 이스라엘은 남부 유다처럼 확고한 왕조가 없어서 언제나 혁명에 쉬 말려들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지명하고 백성이 환호로서 화답하여 왕을 세우는 그 전통은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잘 것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지명도, 백성의 환호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명분이나 합법성도 없이 잇따라 정변을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이제는 왕을 세우는 전통적 절차와 미덕 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호세아는 이를 여호와에 대한 범죄이자 또한 이스라엘 왕정 자체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로 받아 들였다(호8:4, 10:3이하, 13:11). 내부적 단결력도 신학적 기조도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이미 명석하거나 단합된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선장이 바뀌어 배를 이리 저리로 돌릴 때 마다 배는 암초를 향해 더욱 더 가까이 돌진하는 꼴이 되었다.

 

호세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이스라엘의 파멸을 선언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호9:11-17).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할 운명이었다. 호세아가 이 파멸의 파고를 넘어서 이스라엘의 새 시대,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예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호2:14 이하, 12:9). 하나님이 그들의 불신앙을 고쳐주고 다시 한번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에 근거한 유대관계를 회복시켜 주리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예언이었다(호2:16-23, 14:1-7). 이것이 후기 선지자들의 사상과 신약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새 언약 사상의 진원지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