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제3장 BC9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은바리라이프 2009. 10. 25. 14:55

제3장 BC9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11-8 약세(弱勢)의 반세기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두로의 바알을 제거했고 또 그후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북부 왕조를 다스린 왕조의 시조(始祖)였다(이스라엘에서 가장 수명이 긴 왕조이다). 그러나 예후의 통치기간(BC843/2-815)은 이스라엘에게도 예후에게도 행복한 시절은 아니었다. 재난이 잇따른 취약의 시대였고,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상실한 시대였다. 국제정세의 영향은 이 무능력한 이스라엘을 거친 들판으로 내몰았다.

1 예후의 숙청의 여파

  이스라엘왕과 유다의 왕을 같이 죽임/왕하9:19-24, 27, 왕하9:30-35
  이스라엘의 요인 학살/왕하10:11
  여호아하스의 개혁과 그에 대한 평가/왕하13:1-6

  숙청의 결과는 깨끗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차라리 상처투성이의 쓰라림이었다. 이교적 환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구원이란 곧 국가의 마비를 의미했다. 이교국가와의 동맹, 이교의 자유보장으로 대변되는 오므리 왕조의 정책은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국가 이스라엘을 강성하게는 했다. 숙청은 이를 파괴한 것이다. 숙청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세벨과 그녀의 시종들의 학살, 그에 따른 바알 멜카르트에 대한 모욕은 뵈니게와 맺은 관계를 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한편 유다와 맺은 동맹도 예후가 아하시야 왕과 그 수행자 전원을 죽이는 바람에 영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후가 이스르엘로 쳐들어가 부상당한 오므리 왕조의 여호람을 죽였을 때에 남방 유다 왕 아하시야가 마침 그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부를 가져다 준 주요 원천을 상실했고 이스라엘이 위기 때 거기 의존해왔던 군사동맹을 상실했다.
  이는 그러나 외부적으로 겪는 수난이다. 하지만 내부적인 문제는 더더욱 심각했다. 조정의 대신들과 행정관료들을 전부 몰살시키는 바람에(왕하10:11) 국가의 행정 및 통치조직이 거덜난 것이다. 더욱이 무차별하게 자행된 유혈극은 불가피하게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라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한 세기 지나서도 사람들은 예후 가문을 살인의 집단으로 기억하고 있다(호세아1:4).
  예후의 불행은 이런 파괴를 그가 저질렀다는 것에 있지 않다. 이런 파괴의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과 또한 이 파괴 후 통치 및 행정체제를 복원하는 능력이 그에게 없었다는 데 있다. 아마 사회적인 악폐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한 세기가 지나서도 이때의 악한 폐습이 이스라엘의 사회풍습으로 만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아모스 전체). 그는 바알을 끝장냈지만 열열한 여호와 신앙인은 아니었다. 토착화된 갖가지 이교신앙이 아무런 억제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왕하13:36). 또한 이교적 습관들이 아무런 정리 없이 여호와 예배에서 행해지고 있었다(호세아 전서 참조).

2 다메섹의 세기(世記)

  하사엘의 침입과 그 여파/왕하10:32-33, 아모스1:3, 왕하12:17-18
  불렛셋의 행동/아모스1:6-8,
두로가 했던 일/암1:9,
에돔이 했던 일/암1:10-11,
암몬이 했던 일/암1:13

  예후는 이스라엘의 국경조차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이 약세와 혼란에 처해 있었던 바로 그 시기가 다메섹에게는 더 없는 공격의 절호의 기회였다. 예후의 숙청이전에 아합의 원수이었던 벤하닷은 앗수루의 발흥에 따라 아합과 친구가 되어 앗수루를 막아 내기도 했다. 이 벤하닷 1세는 그러나 하사엘(Hazael)의 쿠테타로 죽는다. 하사엘이 집권하자(BC842-860) 먼저 앗수루의 침공을 막아내야 했다.
  살만에셀 3세는 BC853년에 있었던 카르카르 전투의 패배를 앗수루의 패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 다메섹과 하닷이 이끄는 아람연합을 여러 차례 괴롭힌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군사작전이 BC841년에 있었다. 앗수루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아람 연합군을 격파하고 다메섹을 포위하였다. 인근의 농토와 삼림을 불질러 황폐하게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하사엘이 다메섹 성을 무너뜨릴 수 없자 지구전을 피하고 계속 남진하여 하우란(Hauran)까지 이르고 뵈니게 해면까지 이르렀으며, 두로와 시돈,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후에게 공물을 받았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살만에셋의 전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비에서는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Prichard).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앗수루 사람들은 눌러 앉으려 오지 않았다. 병력들은 이어 철수해버렸다. 그 후 한 차례 서부지역을 침공한 후(bc837), 한 세기 동안 앗수루는 서부지역으로 출정하지 않는다. 살만에셀은 다른 지방의 출정에 열을 올렸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중에 한 명이 반란을 일으켜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 새 왕은 이 반란진압을 위한 내전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것이다. 살만에셀의 후계를 이는 왕은 삼시아닷 5세인데(Shamsi-addad 5세,bc842-812), 일단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가 반란을 평정하고 났을 때는 아르메니아 산맥의 우라르트(Urartu) 왕국이 무시 못할 세력으로 커 있었다. 앗수루는 우라르트의 침공을 대비하느라 한 시의 여유도 없이 내정을 살펴야 했다. 살만에셀 3세와 삼시아닷 5세의 연대기에서 뜻 밖에도 메데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서부 이란에 정착했던 인도-아리안 계 종족이다. 삼시아닷 5세가 죽은 후 아닷 나라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의 나이가 어려, 대비(大妃) 세미라미스(Semiramis)가 4년 반 동안 섭정을 했다. BC9세기가 끝날 때까지 앗수루는 아람족들을 넘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앗수루의 상황 때문에 다메섹의 하사엘은 마음 놓고 이스라엘을 공략할 수 잇었다. 예후는 그를 대항할 수 없었고, 이내 남쪽으로 아르논 강의 모압 지역까지의 이스라엘 영토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왕하10:32-33, 참조 아모스1:3). 예후를 계승한 여호아하스는(BC815-902) 더욱 악화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짓밟히고 정복 당하였는데, 하사엘은 여호아하스에게 단지 10대의 병거와 5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경호대와 1만명의 경찰병력만을 보유하도록 하고 무장을 완전해제했다(왕하13:7). 아합은 앗수루에 대항하기 위해 자기 병거 2000승을 보냈다. 여기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또 아람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불렛셋을 침공하고 가드를 포위 점령했다. 유다는 엄청난 공물을 바치고 그 명맥을 유지했다(왕하12:17-18). 이스라엘로 말하면, 요단 동편, 에스드렐론 평원, 해변지방, 그리고 갈릴리까지도 다메섹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 이스라엘은 곧 다메섹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부분의 이웃들은 이스라엘의 약세를 틈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약탈과 습격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아모스1장 참조).

3 유다의 사정(BC837-800)

  요아스에 대한 평가/ 왕하12:1-3
  성전 개수 /왕하12:16
  하사엘에게 공물을 바침 /왕하12:17018
  요아스의 최후/왕하12:16-21
  역대기 사가의 눈/대하24:15-19, 20-22, 25-26

  이 시기에 유다는 이스라엘을 불구로 만들었던 그런 내분에 휘말리지 않았고, 또 아람군대의 침입에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약해진 것이 분명하다. 유다의 왕은 아달랴의 폐망 때 어린 아이로서 왕위에 오른 요아스가 위(位)에 있었다. 그의 오랫 동안의 치세에 관하여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그가 하사엘에게 공물을 바친 사실과 성전을 개수하고 정화했다는 것 뿐이다(왕하12장). 성전개수와 정화는 아달랴가 가증스러운 일을 저지른 뒤여서 필연적으로 취해야 했던 조치였다. 이 조치는 아마 요아스 즉위 직후에 취한 조치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인 왕을 섭정했을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제의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열왕기는 요아스를 경건한 왕이라 하지만 극구 칭찬을 하지 않고 있어서 무언가 해야할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역대기 사가(史家)는 신명기 사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역대하 24장). 이 사가는 요아스의 경건성이란 게 그의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았을 동안의 영향 때문이라 한다.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제사장들의 지나친 권세를 싫어하고 이교에 대해 좀더 관대한 자들의 영향 아래서 이교를 다시 한번 허용했다. 여호야다의 아들이 이런 요아스를 비난하자 처형해버린다. 요아스는 그리하여 집권시작 이전에 신하들의 미움을 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암살된다.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를 계승한다.

 

토의

왜 예후 때에 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해졌나. 그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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