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는 중앙 지대의 행정 수도 바그다드 외에 2개의 큰 도시가 있다. 우리가 지금 올라가는 북부의 상업도시 모술과 남부의 항구도시 바스라가 바그다드와 더불어 이라크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대도시들이다. 모술 은 바그다드, 앗수르와 같이 티그리스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요나가 하나님 명령에 따라 찾아갔던 니느웨 성이 같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트라를 떠나 밤길을 달려 모술에서 이라크의 2번째 밤을 맞았다. 모술은 니느웨가 파괴된 후 동쪽으로 티그리스강을 끼고 생겨난 도시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 중에 하나이다.
아침에 일어난 우리는 니느웨 성을 향했다. 모술의 옛 이름이기도한 니느웨는 앗수르가 세워지고 수도로서 앗수르, 니므룻 다음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던 시기쯤 살만에셀1세(1274-1245)때부터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성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르곤 2세(722-705)때 잠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코르샤밧이라는 성으로 수도가 옮겼다가 다시 그의 아들 세나케립(705-681)이 왕이 된 이후 줄곧 니느웨는 앗수르의 대표적인 수도였었다. 니느웨 성은 초기 토성으로 축성했으나 세나케립이 토성 밖으로 다시 높고 견고하게 석성을 쌓아올렸다.
앗수르의 최대 번영기 아슈르나시팔2세(883-859) 시절의 왕궁과 신전, 도서관 등은 파헤쳐졌지만 니느웨의 옛 도성은 남아있는 토성의 흔적으로 보아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토성의 흔적은 사라져 가고 가치 있는 중요한 유물은 1차대전 이후 유럽의(특히 영국) 강대국이 몰려와 다 가져가 버려 지금은 재건된 석성의 문 몇 개와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앗슈르나시팔 2세가 세운 도서관 자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와 문화를 지금 우리에게 상세히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이곳에서 많이 발견되어 런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니느웨 성 북쪽 성문으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몰아내 준다는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황소의 몸통으로 조각된 샤마시 석상(유익인면모우상;有翼人面牡牛像)이 성문을 지키고 있는 곳으로 일부 복원된 성벽과 함께 그래도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를 배철현 목사님의 사회와 김광운 목사님의 설교로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줄곧 옆에서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무엇인가 손에 들고 우리를 쳐다본다. 니느웨 성을 주제로 한 사진엽서와 간단한 영어 안내 팜플렛을 들고 우리에게 사주기를 원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참 예쁘게 생긴 얼굴에 맑고 동그란 눈을 지닌 아이에게 누가 이토록 애처로운 눈빛을 갖게 했을까? 우리는 불쌍하게 보이는 아이를 내세워 물건을 팔고있는 여인들을 보면서도 가련한 천사의 눈을 가진 아이의 물건을 많이 사주었다.
성안은 입구의 웅장함과는 달리 예전의 궁전이나 신전, 도서관 같은 것은 발굴로 인하여 파헤쳐져 없어지고 잔해만이 흐트러져 있다. 관리가 엉망인 성안은 벽돌조각 나뒹구는 안쪽에 철망으로 담을 두르고 그 안에 양들을 기르는가 하면 농토가 되어버린 폐허로 남아있다. 주전 612년 바벨론과 메데(메디아)의 연합군에 의해 앗수르가 패망하여 도시가 완전히 불타버리기까지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15개의 성문을 가지고 12.4Km 길이의 성벽에 14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니느웨는 후대 바벨론 성과 더불어 메소포타미아의 최대 도성이었다. 현재의 니느웨는 모술시의 한 변두리에 속한 동네에 성의 한 복판이 끊겨져 한쪽은 무너진 토성 언덕으로 들판이 되어 남아있고 한쪽은 빈민 주거지가 되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주전 720년 북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치세때 앗수르 왕 살만에셀5세(727-722)가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호세아를 잡아가고 722년 살만에셀5세가 죽자 그의 동생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722년 사마리아성을 완정히 정복하고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남자들 특히 왕족과 귀족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정책을 폈었다. 이는 혼혈족을 만들어 민족성을 잃게 하여 국가의 재기를 저지시키는 방법으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앗수르는 이 방법으로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주전16세기-주전 7세기)할 수 있는 정치력이기도 했다. 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혼혈족으로 변하여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북쪽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는 다섯 남편을 가졌던 우물가 여인의 사건(요4:9)이 있었다.
니느웨는 주전5,000년경(이때를 노아의 홍수시기로 보는 학자가 많이 있다)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앗수르 번영기시절 한때 약 80,000명의 시민들이 붐비던 도성이었다. 지금은 성안에 밭을 갈고 양을 치는 농가 몇 채가 보이고 길로 끊긴 남쪽 거리의 언덕위로 요나모스크의 미나렛만이 우뚝 솟아 보인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나 니느웨는 특히 교회에서 아동부 시절 즐겨듣던 성경의 요나 이야기가 일어난 현장이기도하다. 주전 760년경(왕하14:25)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듣지 않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3일씩 있었던 사건 후 요나는 니느웨를 찾아간다. 앗수르 왕 앗수르단3세(772-755)가 앗수르를 치리하고 있던 이시기는 앗수르가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기가 아니라 쇠퇴기에 있었다. 당시 오히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783-743)가 요르단 지역과 다메섹을 차지하고 메소포타미아의 북쪽 일부를 정복하는 북이스라엘의 황금기를 누리던 시대였다.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회개하던 왕과 백성을 생각하며 박넝쿨 하나의 시듬을 안타까워하던 인간 요나를 보며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물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다시 한번 느껴본다.
요나모스크 는 니느웨성이 도로로 잘려나간 남쪽 상가를 지나 니느웨성의 남쪽 언덕에 제법 큰 규모로 1920년에 완공을 본 모스크이다. 요나의 무덤 위에 세웠다하며 모스크 안에 요나의 기념묘가 있기는 하지만 실은 어느 왕묘의 위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높은 언덕을 석축으로 몇 개의 기단으로 쌓아올리고 중앙에 모스크를 오르는 긴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황금빛 미나렛이 사람을 반긴다. 화려한 아랍 문양의 인테리어와 아치로 아름답게 꾸며진 모스크에는 순례객들과 주민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붐비고 있고 깊숙한 중앙에는 요나의 무덤이라는 안치소가 한 홀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파란색의 외벽과 황금색 돔으로 치장된 모스크의 입구 전망대에서는 모술 시내와 니느웨성의 폐허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내 어느 곳에서도 이 모스크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요나모스크를 나와 사마리아를 괴멸시키고 남자들을 앗수르로 끌고 왔던 사르곤2세(722-705)가 세웠다는 코르샤밧 을 향했다. 모술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는 코르샤밧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 모술에서 다시 점심식사를 했다. 이제 양고기와 닭고기, 마른빵이 목에 걸리기 시작한다. 먹어야한다는 의무감과 시장기로 식사를 마치고 이제 어제 떠나왔던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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