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도망간 이유

은바리라이프 2009. 10. 9. 17:32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도망간 이유  


★요나서의 배경
우리는 (왕하 14;25)을 통해서 요나가 활동하던 때가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는 가드헤벨에서 출생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엘리야가 살린 과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왕상 17:8-24).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하였으며 그는 여로보암 2세가 북쪽 원정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민족의 앞날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예언을 했지만, 요나는 조국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같은 낙관적인 예언을 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요나는 어린 시절을 여로보암의 부친인 요아스 시대에 보내었고, 성인 시절은 여로보암 2세가 전 솔로몬의 영토를 회복한 부흥기에 살았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이러한 시기는 솔로몬 이후 다시 한 번 그 영광을 재현했던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에 자신들이 번영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던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나의 시대적 배경
요나는 여로보암 2세(B.C.782-753년) 때의 선지자로, 엘리사 이후에 그리고 아모스, 호세아 직전에 활동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여러 해 동안의 침체된 분위기가 걷히고 민족적인 사기가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의 앗수르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나약한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쇠태한 듯하였으나 그래도 이스라엘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시대에 이르러 앗수르인들의 잔학성이 옛이야기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로들에 대한 그들의 야만적인 행위는 특히 B.C.9-7세기의 고대 앗수르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아마도 아슈르단 3세(B.C.773-775년) 의 통치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두 번에 걸친 온역(B.C.765,-759년)과 일식(B.C.763년)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가라 부르시는 하나님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십니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약을 하고 있는, 민족의 존경을 한몸에 안고 있는 요나에게, 민족의 대적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가기 싫어했을 것을 뻔하지요. 아마도 수일밤을 지새우며, 왜 하필 니느웨, 이스라엘 지경의 어느 곳이든 상관없는데, 왜 하필 적국 니느웨인가? 이 상황을 저 자신으로 대치해 봤습니다. 남들은 다 편하게 목회를 하는데 "왜 나만 인터넷사역을 주셔서 이게 도대체 열매가 있는 거야 아니야"  가끔 벗팅겨 봅니다. 요나와 같이 일맥도 발버둥 치다가 결국 인터넷사역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와 우리 믿음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가라는 말씀까지는 순종하겠는데, 가라는 지역은 본인이 정해야한다는 생각은 완전한 순종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사건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려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순종을 보이나,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를 되묻는 의심을 범하는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안가기보다 반대로 도망가는 요나
성경에서 보면, 요나의 이러한 불순종에서 기원한 고민은 그로 하여금 극단적인 반항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곳이 북쪽편의 끝에 위치한 니느웨라면,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곳으로 택한 곳은 서편의 끝인 다시스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3절을 다시 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나아갔다는 것을 두번이나 반복함을 보더라도 그의 도망함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반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몰라서 반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우선 반항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심을 안다는 전제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반항을 하는 것은 와닿지 않게 작은 하나님보다 크게 와닿는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끔 하는, 순종하고 싶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재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순간 사라져 버림을 잘 압니다.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도망간 이유
여기서,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요나 역시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데에는 그 동족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서 자기민족 이스라엘만 계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바깥, 그것도 니느웨의 정반대쪽으로 가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거슬러 올라가 엘리사시대로 가서 살펴보자면 문둥이 나아만 장군이 병고침을 받고 자기나라로 돌아갈때 이스라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흙을 담아가는 행위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계시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서 요나 또한 이스라엘만 벗어나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였던것입니다.


★ 예를 들어서 요나가 얼마나 철저히 도망을 준비하였나 연구하여 봅시다.요나는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얼굴을 피하여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남유다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가는 배를 탔다면,추리를 해볼 수 있지 않나요? ①만약 일맥이 지리적으로 북쪽에 살았는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다면 평양쯤 살았는데 ②자기나라가 아닌 남쪽의 군산항쯤으로 도망을 왔습니다.③니느웨가 중국쯤 된다면 다시스는 일본으로 도망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취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구원함과 평강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셨다고 성경에 말씀하십니다(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104:29).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전하는 선지자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 위해 도망하였다는 사실은 엄청난 반역 중에 반역임을 뜻하며, 이정도의 상황에서라면, 그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도 결코 필요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바르지 못한 지식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겁니다. 요나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신관이 이와 같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으로만 생각하였고,바알과 아세라 신은 농경신과 풍요의 신으로 알았습니다.각기 자기가 필요한 신을 택하였고 마침내 여호와의 버림을 당하는 수난을 당한 민족입니다.지금 이 시대가 요나시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잘 살 수 있도록 한 것이 자기 신이 도와준 것이라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목하는 것을 당연하고, 그 은혜를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이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거절할 수 없는 은혜라는 저희의 교리적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인 파님은 은혜와 평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파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일 인간이 본다면 그의 생명은 죽음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스랍들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음을 보듯이, 빛과 같은 의를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는 것은 엄청난 죄에 대한 직면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마땅하신 주권에 대하여, 이것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고,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연기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대하는 것은 진정한 파님을 보는 순간에 죽음으로 그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의 이방 니느웨에 대한 개인적 미움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주권을 앞서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실수가 우리게도 많이 있지 않은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내 문제는 내 문제라는 식의 태도,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고, 내 실생활의 문제는 내 실생활의 문제라는 식의 태도 모두가 바로 요나의 반응과 같은 것입니다.


★선원들의 神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본문으로 돌아와, 이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여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던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4절에 성경은 말하길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하며 이 큰 풍랑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이 사실과 무지하고 무관하게도, 5절에서 처럼 자신의 항해의 경험을 통하여 먼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고 배가 깨어져 나갈 정도가 되자, 이제는 그들 자신의 신들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각자의 신들을 불렀다는 사실은 다음의 사실들을 수반합니다. 이들이 다신주의적인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우주적인 영역까지도 단 번에 통치하시는 신에 대하여서는 무지하였다는 것과, 이렇게 다양한 자신들의 신들에게 구하다면 그 중에 이 풍랑을 잠재울 신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6절에서 처럼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워 그의 신에게 기도하게 하여 조금이라고 더 많은 신들에게 접촉하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 생각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배밑창에 내려가면 하나님이 못 볼 줄 생각한 것입니다.잠이 왔겠습니까? 밖에 나오면 하나님이 들킬 것같아서 눈을 감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죄인의 심정입니다. 마음이 편했을까요? 저도 부부싸움을 하면 옛날처럼 소리를 지를까하여서 그냥 잠을 자버립니다.

문제가 해결이 될때까지....

이처럼, 선원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多神주의적인 이해의 틀안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신들 중에 하나의 신으로 자신의 작은 영역에서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신으로 말입니다. 나중에 9절에 나오는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이런 상황을 알고 역설하는 가장 적절하고 명확한 하나님에 대한 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전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작은 영역에서 생긴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다른 이교의 신들과 함께 신적인 능력을 경연하고 마침내 이겨내면 참신으로 아니면 거짓신으로 보려하는 시도의 위험성을 잘 보여줍니다 (100일 수능기도회: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예언받기 능력행하는 것을 쫓아다니기).


★제비뽑기 이야기
7절에 요나와 선원들은 이 어려운 상황에 제비를 뽑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의 본문은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오는가에 대하여 알고자 한 것이지, 그의 책임을 물어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제비를 뽑는 것은 죄인을 가려내려는 의도라기 보다, 어느 신에게 무엇을 누가 잘못했는가를 알아내어 이 풍랑가운데 그들이 살고자 하는데 있었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제비 뽑는 방식은 한꺼번에 다 같이 뽑는 것이 아니라 한명씩 돌아가며, 예스인가 노인가를 구분하는것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모두가 제비를 뽑아 모두에게 노가 나왔다면 어느누구의 어떠한 신에게든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셈이죠. 그러나, 이러한 제비뽑기의 방식으로도 요나가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unlike 성경의 제비뽑기: 아간의 범죄, 땅분배).


  제비 뽑기에 걸린 요나의 반응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요나는 9절에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거침없이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제비뽑기를 통하여 그에게 주목된 모든 시선보다,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에 대하여 주목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밖에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의 이러한 불순종의 사건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을 낯을 피할 수 없고 (10절) 하나님께 속한 자신을 발견하게 됨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비뽑기에 요나가 걸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라, 이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나가 히브리인이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여호와가 그의 신임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요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그의 직업이 무엇이며,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며, 자신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나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요나는 그 풍랑이 나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를 구원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노를 저어서 배를 육지로 돌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바람과 파도는 더욱 거세어져 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침내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순간 바다는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이를 본 선원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즉시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습니다(1:16). 하나님은 미리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 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내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야기의 후반부 이야기
10절에 보면, 원어표현을 통해서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할때, “이미 고하였으므로”로 해석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가 승선을 하기 전에 이미 그가 하나님으로 부터 피해 다시스로 간다는 것을 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들의 다신주의적인 이해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을 피하는 요나에 대하여 가벼이 생각하였던 것임을 알게 합니다. 이제, 요나의 말을 들은 이들은, 걱정에 사로잡혀 우주적인 신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는 요나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분노아래 놓여졌다고 믿었습니다.  


이 생각을 마음에 담게 되자, 바다의 흉융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를 묻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은 그들 스스로 생각하길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응은 회개함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요나의 반응은 회개함이었습니다. “나의 연고일 줄 내가 아노라”함을 통해 겸허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바른 신(神)지식은 자신과 자신을 잘못을 돌아보는 척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자기 자신또한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요나와 달리 회개의 반응을 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이들의 신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신들은 일관성없이 변덕스럽고 자신만 아는 독선적인 신들이기에 이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회개보다는 분을 달래는 방법을 구해야 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14절). 여기서 요나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것들과 같지 않으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의 내용(14절)은 이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꺼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꺼려한 이유는 배를 임대한 물주 요나가 죽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요나를 바다에 던져 재물로 죽일 경우 요나의 하나님의 보복이 두려워 망설였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후 16절에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 그들의 각자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죠.


★이야기에 대한 사실성 여부
15절에 어찌되었건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바다의 뛰노는 것이 그쳤다고 합니다. 이것도 놀라운 사실이죠. 그러데 더 놀라운 일은 17절에 나와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삼일 삼야를 그 뱃속에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때문에, 요나서를 허구적인 문학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기술한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을 잘못된 생각입니다. 존 윌슨이 쓴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라는 소논문에 보면, 한 선원이 포클랜드 섬들주위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스펌고래에게 먹혀버렸답니다. 그래도 나머지 선원들은 계속하여 다른 고래를 잡으려 했답니다. 가까스로 한 마리 고래를 잡았는데, 고래고기를 발라내기 위해 배를 갈랐는데 그 곳에 그들의 잃어버린 동료가 있더랍니다.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이내 회복이 되어 다시 고래사냥에 나갔답니다. 물론, 그의 얼굴과 목과 손들에는 고래 위액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었지만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나서를 허구라 하는 이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한 것 아닙니다. 이 정도의 사건은 허구임에 틀림없고 허구로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담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허구라고 하는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있는 것보다, 더한 기적은 이런 개인적인 체험을 하고 그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요나의 말을 듣고 진짜 간단히 회개한 니느웨성 모든 백성의 반응이 더 큰 기적이고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봅시다.
요나 당시의 유대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 요나서를 속죄일에 읽게 하였던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이 니느웨의 회개의 사건이 이들의 속죄일에 다시한번 기억되어야할 정도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니느웨 백성의 회개를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 따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요나가 니느웨에 전한 주제는 다름아니라, 다가올 심판에 대한 선포가 전부였습니다. 이 단순한 선포에 온백성이 즉각적으로 회개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대로 놀라운 기적이겠으나 요나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피하려던 자신과 사뭇 대조되는 반응이었습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하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호와의 낯을 대하는 순간 여호와의 낯을 대하는 정상적인 경외의 반응을 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중 된자가 먼저된다는 가르침에 충격을 받은 바리새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요나가 선포한 말씀의 힘, 곧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인식은 이시대에 어느목사의 말이(예언) 성경말씀보다 권위를 두는 이상한 교회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처럼,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모두를 꼭 두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한번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을 뵈옵기를 구하는 간절함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서는 것을 오히려 삼가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 : 12)


우리는 어떠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이스라엘의 대표하는 한 인물 요나의 부르심입니까? 아니면 큰성 니느웨와 같은 죄인된 우리를 향한 부르심입니까? 어느 쪽의 부르심이건 분명한 것은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더 부르심에 대해 나눠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①나의 부르심
우리는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니느웨와 같이 회개-그 자신의 교만-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받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말하자면, 대개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니느웨와 같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았던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주시고자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상적인 회개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잘 읽어 보면, 내려 갔더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내려갔다는 말은 퍽 상징적인 뜻이 있다고 봅니다. 올라가는 인생이 아니고, 내려가는 인생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인간의 인생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내리막 길로 달려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불순종의 길은 내리막 길입니다.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가는 길은 성공의 길 같으나, 결국 그 길은 내리막 길입니다.

요나는 ① 니느웨로 가라고 했으나 욥바로 내려갔다고 했고, ②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다고 했으나, 성경대로 보면 배에 내렸다고 되었고, ③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었다고 했고, ④ 풍랑으로 바다에 던짐으로 바다속으로 내려가 잠기게 되었고, ⑤ 결국 큰 물고기 뱃속으로 까지 들어갔으니, 철저하게 내려 갔습니다.이렇게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거역할 때 모든 것은 내리막 길일 뿐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운다고 하였는데, 이 엄청난 일, 흔히 기적이라고 정의하는 이같은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바로 그만한 믿음도 없어 완전히 하나님의 믿지않던 자들이 그만한 믿음이 생겨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니느웨와 같이 죄인된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로의 부르심을 먼저 주셨다는 겁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요나서를 속죄일에 읽음을 통해, 니느웨의 회개를 이스라엘의 회개의 모델로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인됨에서 구원받음의 사건은 그저 구원받음의 한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오히려 극심한 죄인된, 구원받기에도 합당치 않은 우리의 구원받음의 좋은 소식, 복음을 다른들에게 또 하나의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이유는 나 혼자만 예수 믿어서 천국가라고 부르신 거 아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이유는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안 것으로 혼자 좋아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다. 선원들처럼 자기들이 필요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요나처럼 먼저 받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되, 그 은혜가 감사해서 주시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싶고 순종해서, 그래로 살아가는 이가 되는 것이 이 부르심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성도라 합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제자들이고 합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리스도로 제자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을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②부르심 다시 묵상하기
결국,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것으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하도록 하고, 그의 통치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르심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


많은 이들이 부르심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직자들과 교회지도자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런 부르심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가리키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고행을 하며 말씀을 연구하는 이들이나, 들에 나가 힘든 노동을 하는 이들이나 똑 같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삶의 장소가 곧 부르심의 장소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이런 부르심에 대한 오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누가 성령시대에 자기만 택함을 받아서 성도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하나요?


★부르심을 떠올리게 될 때,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부르심이 가치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하는 우리를 부르셨다면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높으시고 높으신 크고 크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했다. 그 구원의 부르심으로 이제 네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내 주기를 바란다. 네가 도와주면 정말 좋겠단다.” 오!주님 저는 어린아이 입니다. 제가 아직 기저귀를 차고 혼자서는 기저귀를 갈 수 없도록 저는 어립니다. 주님 말씀으로 성장시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의 실체를 알면 알수록 이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사랑하며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지 모르게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개인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알게 하시고, 드러내게 하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부르시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이가 있기는 있되 거의 없다는 겁니다(마22:14* 사65:12).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요나처럼 반응하시겠습니까?  부르심에 "아멘 "이라고 말씀드리고 지금 결단하십시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먼저, 요나를 통해 하나님 가라하신 곳으로 가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완전한 순종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직면하게 하셨고, 이러한 모습을 당연히 여기기보다 믿음없음을 통탄히 여겨야 함을 알게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 크신 하나님을 자신보다 작게 여기는 불경함의 죄를 짓고도 무지한 자신을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참으로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순종하게 되기를 구해야 할 줄로 압니다.


둘째로, 요나를 통해 하나님을 얼굴을 피하듯 살려는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엄히 경고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의 거룩과 영광을 우리 삶의 목표로 다시 두어야 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알지 못하게 되면 본문의 선원들과 같이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구하는 바에 반드시 응답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심하게는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무지의 죄를 범게 됨을 알게 하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사랑 둘째는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믿음이 있노라하고 행치않는다면 그것은 귀신의 믿음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셋째로, 요나를 통해 보여준 것은 평안을 주시기보다 환난주심을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기 보다, 자신을 잘못을 먼저 돌아보며 오히려 이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이처럼 사람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여, 회개케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얻게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바로 회개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께 돌아갑시다. 아버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간날 부터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요나와 같이 거억한 자입니다.요나나 탕자 비유는 죄인을위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증표입니다. 글이 길어 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아멘!!입니까? 아니요입니까?  지금 결단 하십시요.扈

순종이 없는 경외는 위선과 속임입니다. 요나가 탄 배는 훈련소요 신학교입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물고기로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풍랑은 사랑의 채찍이요, 회개의 기회입니다(히12:6) C. S. Lewis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하나님은 안락속에서 속삭이시고 양심의 찔림을 통해서는 조금 크게 말씀하시고 고통을 통해서 크게 외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