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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1)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8:27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1) 
      모든 성경의 기도는 약속을 믿고 구하는 것이다  
 
       이세령 목사(로텔담 사랑의교회)
 
      #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대해서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대상4:10절은 야베스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2001년도 출판된 책 제목 때문이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라는 부제목이 있다.


   필자도 이 책에 대해서 소문을 익히 들었는데, 얼마 전에 한 성도가 책을 빌려 주어서 읽게 되었다.

 

   야베스 기도는 2001년에 첫판이 나왔고, 필자가 받은 책은 2002년도에 153쇄의 책이다. 엄청난 판매를 기록한 책이다. 미국에서 출판 해당년도인 2001년에 800만권 이상이 팔린 책이다. 한국에도 엄청나게 팔리고 소개가 되었다.


   늦게나마 야베스의 기도의 영향력을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더니 야베스의 기도라는 찬양도 다양하게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워십 댄스도 유행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야베스의 기도가 하나의 상품 로고가 되어서 엄청난 부산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실제로 뺏지 목거리, 장식 등이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 출간 이후 후속 책들도 많이 나온 것 같다. 대단한 영향력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가치는 실제로 기도가 가지는 힘과 능력을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기도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부담되지 않는 분량의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야베스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을 도약대로 삼아,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 기도의 응답을 간증 형식으로 연결해서, 저자가 이해한 야베스 기도를 증명하고 이런 기도를 드리도록 격려한다. 필자도 늦었지만 읽고서 나름의 감동을 받았다. 기도를 통해서 삶을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좋은 메시지를 받았다.


   필자가 이런 나름의 인상을 가지고 야베스의 기도가 있는 본문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한다. 물론 책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문을 해설하면서 야베스의 기도의 본질에 충실하게 소개하려는 것이다. 복에 복을 더하사 지경을 넓히시고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 야베스가 누구인가?


   먼저 야베스의 기도의 주인공인 야베스에 대해서 살펴보자.


   야베스는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그 어머니가 수고하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수고라는 단어는 고통이란 단어이다. 고통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찹이다. 그런데 야베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야차브라는 말의 자음 순서를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야차브가 아니라 야베츠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의 자음을 교환했다. 성경에는 야베스라는 이름이 이곳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길르앗 야베스라는 말과 한글은 같지만 자음의 구성이 다르다.


   고통스럽게 낳은 아들이기에 야베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어머니가 지었다. 성경에서 자녀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주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의 경우 그들의 이름을 모두 레아와 라헬이 지어 준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특수한 경우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내가 아이를 낳고, 그때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한나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서원의 적용과 관련된다. 모세라는 이름은 애굽의 공주가 지어준다. 이렇듯 어머니가 이름을 주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아주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지 않기에 야베스의 이름을 짓는 경우도 그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야베스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아주 특별한 경우가 되는 것은 이름을 짓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성경의 경우를 살펴보면 자녀의 이름을 짓는 어머니의 이름이나 신분이 분명히 제시된다. 그리고 남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야베스의 경우는 어머니의 이름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남편 즉 야베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또한 야베스가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라고 소개하는데, 형제들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독특한 이름 짓기라고 할 수 있다.


   야베스는 고통 가운데 이름 모르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다. 부모가 있지만 이름도 모른다. 형제도 있지만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아내나 자식들도 모른다.


   이런 사실들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


   야베스를 소개하는 대상4장의 말씀은 1절에 유다의 자손들을 소개함으로 시작한다. 야곱의 아들인 유다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대상2:3-4). 그 중에서 베레스의 직계 계보를 대상4:1-7절에서 다시 소개한다(다시라 함은 2-3장에서 이미 소개가 되었다). 그리고 8-20절까지는 베레스의 계보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8절의 고스는 그 아버지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고, 다른 족보와 연결이 없다. 9절에 야베스도 위에서 살핀대로 부모의 이름을 모른다. 11절은 글룹, 14절은 므오노대, 15절은 갈렙, 17절은 에스라가 삽입형식으로 소개된다. 이들은 모두 부모의 이름은 모르지만 베레스라는 유다 지파에 소속하게 된 이름들이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대상2-4장에 소개되는데 제일 마지막에 언급된다 (대상4:21-23절의 셀라은 유다가 다말이 아닌 가나안 여자 수아의 딸에게서 얻은 생존한 아들이다. 따라서 족보가 형성된다. 이에 대해서는 윌리암슨이 쓴 유다 가문의 대칭 구조적 구조 이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야베스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야베스는 고통 중에 낳은 아들이고, 부모의 이름은 모르고 조상을 유다 지파 안에서 추적할 수 없지만 그러나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 현재까지의 야베스에 대한 관찰 결과이다.


   # 야베스가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에 귀화한 겐 족속의 후예일 가능성


   그런데 야베스에 대해서 추정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보가 더 있다. 대상2:55절의 말씀이다.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


   여기에 언급된 야베스는 겐 종족 출신의 서기관들이 살던 지역 명칭이다. 그런데 이 야베스는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지명 길르앗 야베스와는 다른 단어이다. 야베스의 기도의 야베스와 같은 단어이다. 성경에는 지역 이름을 사람 이름과 동일한 경우가 많다. 가까운 예로 삼손이 태어난 지역이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인데, 이 지역 이름은 대상2:53,54절에 소라와 에스다올 종족과 연결된다. 따라서 야베스란 지역 명칭이 야베스란 인물과의 연결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야베스에 살던 겐 족속이 누구인가?


   모세의 장인이 누구인가? 이드로 혹은 호밥이라고 부른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결혼을 했다.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라는 미디안 사람이자 겐 족속이다. 삿4:1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그리고 삿1:16절을 보면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 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겐 사람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미디안 자손이고, 이방 사람이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회에 편입된 사람이다. 출애굽 이후에 편입이 되어서 유다 지파와 함께 거했다. 실제로 겐 족속들이 살던 야베스라는 지역이 소개되는 대상2:55절은 유다 지파의 거주지를 소개하는 문맥에 들어있다. 대상2-4장은 유다 지파의 족보이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야베스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의 기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조명을 준다.


   야베스가 유다 지파에 속했지만 그러나 그 부모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의 이름도 모른다. 야베스라는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발견할 수 도 없다. 또한 실제로 그의 족보를 유다 지파에서 보기는 하지만 족보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사실들에 덧붙여 야베스라는 지명이 이방 사람으로서 유다 지파에 편입된 겐 사람들의 거주처라는 사실은 야베스가 이방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야베스의 정체성을 정리하였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의 뿌리가 없는 이방인 즉 겐 사람으로서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일 가능성이다.


   # 지경을 넓힌다는 의미에 대해서


   본문 10절을 보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이것은 개역 개정 번역인데, 이전에 쓰던 성경이 친숙한 분들이 많다.


   거기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의 기도가 관심을 끌었던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이다.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다.


   "복에 복을 더하사"를 개정 번역은 "복을 주시려거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조건절의 문법은 강화되었지만 뜻은 약화된 번역이다. 다르게 번역을 하자면 "복에 복을 주시려거든" 혹은 "정말 복을 주시려거든"이 좋겠다 (영어로는 bless me indeed).


   복을 준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 히브리 문법적으로 사실이다. 문제는 복이 무엇인데 그렇게 강조해서 말했는가가 중요하다. 이 복 자체의 개념은 좀 더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우선 복의 내용으로서 지경을 넓힌다는 것을 살펴보자.


   지경을 넓힌다는 말이 개정역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라고 했다.


   지경은 땅의 경계를 말한다.


   이런 번역을 그대로 놓고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야베스라는 사람이 물려받거나 가지고 있는 땅이 있는데, 이것을 더 넓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문자적인 전달이 그렇게 만든다.


   그런데 지경을 넓히시고 라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해하게 해 주는 구체적인 문맥이 없다. 복의 내용으로서 지경의 넓어짐이다. 이것을 통해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는 저자 부르스 윌킨스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꿈을 꾸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만일 야베스가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 제가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계산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야베스 시대가 대체로 사사 시대라고 인정을 한다. 비교되는 시점을 통해서 그런 결론에 대체로 인정한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 별로 자기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을 얻던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베스의 복이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지경을 넓혀 달라는 표현이다. 성경에 보면 사54:2에 보면 네 장막터를 넓히라는 표현과 어울리는 말로 기억된다.


   지경을 넓혀달라는 말의 문자적인 첫 인상에 충실하기 보다는 좀 더 성경적인 표현에 관심을 가져보자.
   신19:8절을 보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신19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일 세대가 모두 죽고 이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모압 평지에 있을 때 주신 말씀이다. 그때 네 지경을 넓혀,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다 네게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네 지경을 넓혀 라고 말하는 시점에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다 (물론 2지파 반이 요단 동편을 정복했다. 그러나 나머지 9지파 반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다). 모압 평지에 있다. 이제 그들은 요단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네 지경을 넓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모두 너에게 주시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히브리어의 전형적인 병렬 어법이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 전부를 얻는 것 그것이 지경이 넓혀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거기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아래 땅을 얻었다. 그러나 여호수아 세대가 모든 땅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일부분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도면 분배를 하였다(수13-21장). 12지파에게 도면 분배를 하고, 12지파들이 스스로 약속의 땅을 얻도록 세겜에서 격려하고 언약을 맺었다(수24장). 그런데 12지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그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를 당하는 사사 시대를 맞았다. 실제로 사사 시대가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을 주었던 시대인지 모른다. 사사 시대는 불순종의 시대의 대명사이다. 쫓아내지 못하였고 라는 표현이 도배를 하고, 배반하며, 또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난무한 시대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야베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한다. 내게 정말 복을 주십시오. 그리고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야베스는 겐 족속의 이방인 출신으로 유다 지파에 속했다. 그가 유다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한다.


   특히 역대기 기자는 이렇게 야베스의 기도를 소개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언약적인 표현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하나님 칭호이다. 야베스가 기도를 시작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제게 복을 주십시오.
   그리고 저 약속한 기업의 땅을 주십시오.

   저는 비록 연약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주신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십시오.


   야베스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 땅을 얻었다. 그는 족보에 언급되지 않는 연약한 가문에 속한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10절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렇게 기도 응답을 받은 야베스이다. 그래서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을 유전할 수 있는 기업을 얻었다. 이렇게 얻은 기업을 야베스라 이름하고 거기에 자신의 가족과 종족이 살게 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2:55절의 지역 명칭 야베스와 4:9-10의 야베스란 인물의 연결이 좀 더 자연스럽게 진행이 된다.


   여기서 야베스 기도에 대한 중심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따라서 기도했고 응답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다음에 이 기도의 더 넓은 측면을 다루어 보자.


   # 글을 마치면서


   야베스의 기도에 관심하면서 그동안 교회 역사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어떤 기도가 등장한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모두 동일한 가치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앞에 서는 것이다.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 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나의 뜻으로 삼고 내 뜻을 하나님의 약속 앞에 내려 놓는 것이다. 그 약속을 이루어야 하는 나의 처지, 나의 환경, 나의 삶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약속을 신뢰하고 맡기고 나아가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이다. 여기에 야베스의 기도가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기도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2009. 2. 7. 코람데오닷컴)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2) 
      모든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하나님의 안식의 복은 악을 극복함으로 얻는다  
 

   이세령 목사(로텔담 사랑의교회)
 
   야베스는 겐 족속의 후예로서 이방사람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이다. 그가 언약적 명칭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지경 모두를 얻었다.


   이제 그가 기도해서 얻은 복의 의미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1. 복은 악을 이김으로 약속을 누림이다 .


   야베스가 요청한 복의 내용은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살핀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 모두를 얻는 일이다. 이렇게 약속한 땅을 얻는 일을 복으로 간주한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3가지의 복의 내용을 약속하셨다. 민족의 번성과 약속의 땅 가나안과 그리고 이름의 창대함(권력)이다(창12:1-3). 이 세 가지의 내용은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바벨탑으로 형성된 세상 나라와 다른 종류의 강대한 나라 즉 의와 공도를 이루는 나라를 약속하셨다 (창18:18-19). 아브라함의 나라는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가 된다. 더 정확히는 아브라함의 나라가 바로 복 자체이다. 이렇게 세상에 복이 되는 아브라함의 나라를 세우신 목적은 창조 후에 타락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나라의 구체적인 구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다 (창18-19장 참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은혜의 나라이자 의와 공평을 행하는 나라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나라를 통해서 온 세상의 나라들이 회복의 길을 가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죄와 죄의 영향력을 극복하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실제로 야베스와 관련된 것은 땅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얻는 일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때로부터 400년 후의 일이다. 이는 창15:16절에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을 얻는 일과 가나안의 죄악을 제거하는 일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의 복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악을 제거하고, 의와 공평을 세우는 일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복에 야베스가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복을 주시되 약속하신 땅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야베스는 사사 시대에 그 땅을 얻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그 땅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을 당하던 시대에 그 약속의 땅을 모두 얻었다.


   야베스가 드린 두 번째 기도는 그가 얻은 땅이 아브라함의 복과 깊이 연결되었음을 보인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기도에서 '환난을 벗어나'는 표준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한다.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영어 번역은 악이나 해이다(evil-KJV, harm-NIV). 그리고 근심은 야베스의 이름과 관련된 고통이다. 사역 하면 악으로부터 벗어나 고통이 없게 해 주소서.


   악은 죄의 다른 구체적 표현이다. 야베스가 지경을 넓히는 일로서 땅을 얻는 일과 동시에 악으로부터 벗어나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여기서 야베스가 대면해야 했던 악의 내용이 무엇인가?


   야베스의 환경인 사사 시대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악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목적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사사 시대가 가진 악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삿2:11-13, 3:7절에 나온다. 바알과 아스다롯 혹은 아세라 신들을 섬긴 일이다. 이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선택했는가? 이유는 분명한데, 잘 살기 위해서이다. 행복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모든 종교의 목표지점이다. 문제는 선택 대상의 참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과 광야의 시절 동안 인도하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선택한 이유는 정착된 농경문화에서 잘 살아보기 위해서이다. 농경 문화에서 풍성한 소출을 지배하는 태양과 비의 신을 섬기는 가나안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섬기는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는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을 당한다. 여호와를 버리고 악을 선택한 결과 그들에게는 많은 고통이 있다. 삿2:14절은 이스라엘이 사방 대적들에 의해서 노략을 당하게 된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고통을 얻었다. 땅이 소출을 내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은 잃어버림으로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수고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15절이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맹세하신대로 그들의 괴로움이 삼하였다.


   이런 동시대를 살고 있는 야베스가 하는 기도를 살펴보자.
   여호와의 손이 나를 도우사 나로 악으로부터 벗어나 고통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가나안 땅을 얻는 복을 얻기를 바라면서 이스라엘과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선택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방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했다. 그래서 악을 버린다. 그리고 악이 주는 결과로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누구의 선택이 유효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애굽을 치고 광야를 인도한 여호와의 손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를 당한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겐 족속의 후손인 야베스는 그 도움의 손에 의지해서 복을 누린다.


   야베스에 대한 이런 선택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경우가 같은 사사 시대에 있었다. 사사기 앞부분에 등장하는 드보라 사사 시대의 일이다.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학대하던 시절에 이스라엘에 여선지 드보라가 일어난다. 그녀는 바락이란 장군을 앞세우고,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전쟁을 벌려서 승리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시스라는 도망하여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른다. 이곳으로 도망한 이유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 사이에는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삿4:17절은 소개한다. 그런데 남편 헤벨과 달리 야엘은 시스라를 암살한다. 그리고 야엘은 바락을 맞아서 죽인 시스라에게로 인도한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시스라와 바락 중에서 바락을 선택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했다. 그도 역시 야베스와 같이 겐 사람이다.


   여기서 언급할 일차적 결론은 야베스가 추구한 복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약속된 아브라함의 복과 일치하며 또한 그 복은 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악으로부터 벗어날 때 누려진다는 것이다.


   2. 야베스의 기도에 반영된 고통과 창세기의 타락 사건


   야베스의 기도가 가진 의미를 더 밝히기 위해서 그 기도의 근거들을 더 살펴보자.


   야베스의 이름의 근거를 소개하면서 대상4:9에 그의 어머니가 고통 가운데서 낳았음을 말한다. 이런 고통 가운데 생명을 낳는 일은 타락한 여자에게 주어진 저주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창3:16절이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고통, 수고 모두 야베스를 낳을 때 그의 모친이 가진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생명을 낳을 때 얻는 고통은 창3장에 의하면 타락의 결과이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에 등장하는 고통의 언급이 대상4:10에 있다. 악에서 벗어나 내게 근심(고통)이 없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내용이 창3:17과 5:28-29절의 말씀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라멕은 백 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세기의 두 본문에 나오는 수고가 모두 야베스의 기도에 나오는 근심 혹은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것들이고, 땅과 관련해서 소산을 얻는 고통을 말한다.


   생명의 탄생과 관련해서,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창세기의 본문은 단지 죄의 좌절스러운 저주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비록 고통 중에 나오지만 생명의 탄생은 소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창3:15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창3:15절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뱀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 타락 사건을 다시 회복으로 돌리는 첫 복음이다. 타락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한 관계를 깨고, 사람이 뱀의 말을 들음으로 뱀과 죄와 화목한 관계로 들어간 사건이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고통이 시작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뱀과 원수 관계로 두심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 두었다. 뱀 즉 사탄과 죄와 원수 관계임을 인지하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한다면 인간은 다시금 하나님께로 화목한 길이 열려있다.


   이것을 잘 증거하는 사건이 가인의 경우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가 열납되지 않자 심히 분해하면서 의인인 동생 아벨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다. 이때 하나님께서 창4:7에서 이런 경고를 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리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와 원수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열어 놓은 길을 제시하지만 그러나 가인은 거절하고 죄의 편에 서서 아벨을 죽인다. 이것은 스스로 죄의 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 것이다. 이런 가인을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고 소출을 내지 않는다(창4:11-12). 이런 영향은 창3:17절을 기초하고, 창5:28-29절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아담이나 가인에게 주어진 저주마저도 라멕은 창5:29절에서 안위를 얻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음을 제시한다. 저주 받은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지만 그러나 이 아들 노아가 안위하고 안식으로 바꾸어 줄 것을 소망한다. 이런 소망의 근거는 역시 창3:15절이다. 뱀과 여자의 원수 관계가 그의 후손들의 역사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제 창세기의 고통과 관련해서 정리하면 비록 고통이 타락의 죄와 관련해서 발생했지만 그러나 이 고통을 너머서 생명이 탄생하고, 또한 고통을 안식으로 변화되는 소망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창세기의 내용이 야베스의 기도와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가?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이런 창세기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담아내고 있는가? 창세기의 표현과 야베스의 기도의 표현이 가진 유사함을 살폈다. 이런 표현의 연결을 위한 근거가 무엇일까?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기 족보 중에 있다. 그런데 역대기 족보는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다. 사무엘과 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지에서 자신들의 멸망의 원인을 죄로서 규정하여 조상들의 역사를 분석 기록한 것과 대조된다. 역대기 역사는 한줌의 포로 귀환자들이 자신들에게 여전히 조상들의 언약과 약속이 유효한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했다. 그리고 넓은 창조의 세계를 경험한 자들의 과제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종교가 가진 유효성을 질문해야 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귀환한 자들에게 유효한가를 넘어서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유효한가를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정통성과 그 유효성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족보를 기록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보를 넘어서서 아담으로부터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대상1:1절은 아담을 언급한다. 그리고 1:3-4절은 라멕과 노아를 언급한다. 족보에서 사람을 언급함은 그 역사를 함축하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를 담고 있는 동일한 족보에 아담과 라멕 그리고 노아가 동시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적어도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을 담는 역대기 기자는 아담과 라멕 노아의 언어와 야베스의 언어의 연결을 의식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결을 부정할 수 없다. 고통의 뿌리에 있는 죄와 악을 의식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창세기의 족장들을 통해서 이해한다.


   지금까지 야베스와 그의 기도에 등장하는 고통과 창세기의 본문과의 연결이 역대기 가자를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았다. 그럼 이런 연결을 통해서 역대기 기자는 어떤 시대적 메시지를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주고 있는가?


   3. 악을 극복하여 얻는 안식의 길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있다.


   야베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미 언급을 하였다. 대상2:55에 야베스라는 지명과 거기 거주한 사람들이 겐 사람들의 자손임을 밝혔다. 그리고 대상4:8절이하에 기록된 유다 지파 자손의 명단이 뿌리가 없는 사람들임을 보였다. 야베스가 겐 족속 출신의 이방인이라고 일단 정리했다.


   여기서 야베스를 대상4:9절이 소개하는 내용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이전 번역에서는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다.


   야베스의 존귀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의 존귀함의 근거가 무엇일까? 물론 그의 기도와 그 기도의 성취를 허락받은 것과 연결된다. 약속된 땅을 얻은 일이다.


   야베스의 존귀함을 더 조명하는 인물들을 살펴보자.
   존귀한 자라는 말이 사용된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전쟁에서 큰 승리를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대상11:21, 25절에 다윗의 용사를 소개한다.
   그는(아비새) 둘째 세 명 가운데 가장 뛰어나(존귀한),
   (브나야)는 삼십 명 중에서는 뛰어나나(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이것들의 병행 본문인 삼하23:19, 23에도 존귀하다라고 번역되었다.


   전쟁에 뛰어난 용사를 가르킨다. 다른 경우는 창34:19, 삼상9:6, 삼하6:20 에서 신분적인 존귀함을 언급한다. 왕의 아들로서 세겜이나, 선지자 사무엘, 그리고 다윗 왕을 언급한다.


   이런 용례를 통해서 야베스는 전쟁의 용사에 가깝다. 선지자나 왕의 귀족 가문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와 버금가는 존귀한 자가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 그 지경 모두를 얻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면서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쟁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베스는 형제보다 존귀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부모도 형제의 이름도 기억되지 않지만 그의 이름이 기억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름의 창대함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위치인 유다 지파에 소속된다.


   이제 약속의 땅을 얻어 야베스와 같이 존귀한 자의 반열에 오는 또 한 사람을 소개해 본다. 그는 갈렙이다.
   역대상 2-4장의 족보에는 갈렙이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 유다와 베레스의 자손으로 등재되어 있다(대상2:9, 이 절은 2-4장에 이르는 유다 족보를 구성하는 핵심 구절이다, 대상2:18). 그런데 이 갈렙이 다시금 족보의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자리에 다시 기록된다. 야베스의 기도 다음 부분이다. 대상4:15절이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으로 더 유명한 이 사람은 바로 여호수아와 함께 유다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다. 그가 여호수아와 함께 배반하는 출애굽 일 세대를 설득했었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노구의 몸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실패하게 만들었던 그 아낙 자손의 땅 헤브론을 달라고 요청했고 그 땅을 얻었다. 그런데 그 갈렙이 실제로는 뿌리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유다 지파의 헤스론의 자손으로 등재가 되었다.


   갈렙은 딸 악사는 옷니엘과 결혼을 한다. 갈렙과 옷니엘은 형제로 소개된다(삿3:9). 옷니엘이 대상2:13절 족보 없는 무리들 속에서 그나스의 아들로 소개된다. 그나스의 아들이지만 유다 지파에 편입된 무리가 바로 갈렙과 옷니엘이다. 그들은 조상 그나스는 대상1:36절에 의하면 에서의 자손이다. 에돔 자손으로서 유다 지파에 편입되어 유다 지파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바로 갈렙이다.


   이런 갈렙의 역사를 유다 지파의 족보에서 길게 서술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얻은 자의 존귀함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모든 장애를 극복함을 보여준다.


   야베스가 이방인으로서, 갈렙과 함께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하게 언급되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가? 야베스에 대한 기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사실은 대상2:55에 야베스 지역에 거주했던 겐 족속들이 서기관의 역할을 했음에 근거한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내어서 역대기의 기록 속에 야베스와 그의 기도가 가진 의미를 어떻게 확보하고 있는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 가나안을 다시 얻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을 회복하는 걸음이다. 그러면서 이제 포로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넓은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 고레스 왕의 칙령을 통해서, 다니엘의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미치는 넓은 범위를 보게 된다. 즉 온 세상을 품어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공통의 뿌리를 기억해냈다. 바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이르는 족보의 구성을 포함한 대상1장의 말씀이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베스의 기록들을 찾아내어서 기록하고, 갈렙을 다시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의 뿌리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 있고, 그리고 그들이 구원의 역사에 존귀한 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열려있는 복임을 다시 확인한다. 너는 복이라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12:3).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은 창조의 회복을 위한 복이다. 죄와 악을 넘어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든 고통의 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안식의 세상을 구현하는 복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견한 이 진리를 야베스와 그의 기도를 통해서 표현했다.


   글을 마치면서


   야베스와 그의 기도가 2001년도에 조명을 다시 받았다. 야베스라는 지역에 묻혀있던 서기관들의 토판 조각이 포로에서 귀환한 무리들에 의해서 다시 조명을 받았듯이 말이다. 야베스의 기도를 옹호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 교부시대를 통해서 조명된 적이 없다. 저 방대한 교부들의 책을 전부 뒤져보아도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챨스 스펄전이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브랜드 가치를 가질 만큼 야베스의 기도는 대중화되었다.


   왜 이렇게 야베스의 기도가 다시 조명을 받는가? 왜 아마존 닷컴을 통해서 백만권이 넘게 팔린 책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이방 사람들이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의 안식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오늘 성도들로 하여금 이 약속있는 본질적 사역으로 다시 부르시는 것은 아닐까? (2009. 2. 24. 코람데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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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1&eid=DkOJUKUI9/H7F75WybFsDquJql9OckL4&qb=7JW867Kg7Iqk&enc=utf8§ion=kin&rank=1&sort=0&spq=0&pid=fF9KQg331yossbbs28ossv--144168&sid=Sn9MfnPkfkoAAHbpYPE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절 말씀)

 

역대상4장10절에는 '야베스'라는 사람이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브루스 윌킨슨'같은 사람은 그 기도를 묵상한 후에 책을 저술하기도 할 만큼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말 이 '야베스의 기도'를 묵상하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감을 잡을 뿐 아니라 내 지경을 넓혀야 겠다는 도전을 받게 되는 실로 개혁주의적인 기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품게 된다.

 

그런데… 과 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저 복에 복을 더해달라고 또는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그냥 한 성도의 기도며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이 기도에 대해서 한번 심도깊은 묵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 '야베스'의 기도가 있는 역대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역대상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칙령으로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 의해 기록되었다.(저자가 누군가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기에 에스라가 다소 가능성이 높다라고만 언급하겠다.)

 

어쨌든 이 역대상은 귀환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기록했는데, 포로기를 겪은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영감을 통해 국사를 편찬하는 데 이스라엘민족에게 최고 번영기를 연구하는 중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떠올리게 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국사를 편찬하는데 그것이 역대상,하이다. 그래서 역대상,하는 다윗과 솔로몬이 내용에 있어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들의 범과는 가볍게 다룬다.

 

또한 그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자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쭉 족보를 나열한다. 알다시피 읽는 이로 하여금 성경을 덮게 하는데 레위기와 쌍벽을 이루는 그 족보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줄기 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다.

 

왜 뜬금없이 야베스의 기도가 나올까?

 

우리는 역대상의 전체 문맥속에서 이해해야 본래 저자의 의도를 알 수있고 또 옳을 것이다. '야베스'는 '유다지파'다. 그것은 곧 '다윗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야베스'는 연약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자였다. 동일하게 '다윗'도 연약한 막내아들에 '사울'왕의 질투로 고통가운데 있었다. 문학적 표현으로 하나의 복선이랄까?

 

고통가운데 있는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모든 연약한 자들 곧 '다윗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임을 표현하기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부각시킨 것이다. 또한 '야베스'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야베스' 당대에 이루어졌는지 기록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야베스'의 후손인 '다윗'이 왕이 되므로 그리고 당대의 중,근동을 장악하므로 분명 유다지파에 한정된 그의 지경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야베스'를 기도케함으로 그의 후손인 '다윗'왕을 통해서 응답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역대상 4장10절 한 절만으로… 또는 그의 기도내용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미루어 지레 짐작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할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하실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사실 역대상 4장10절한절만을 묵상할때는 '야베스의 기도'는 축복지상주의며, 현실 기복적인 기도라 말할수 있으나, 역대상 전체속에서 재해석할 때는 비로소 '다윗'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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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에서의 야베스 

야베스:Jabez(인명)

(vbEW;, Jabez) 「그는 괴롭힘」

유다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으므로 이 이름을 지었다. 그는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내게 복에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허락하셨다(역대상 4:9,10 -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