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제14장 바울이 보는 침례

은바리라이프 2009. 9. 8. 09:24

  제14장 바울이 보는 침례
  이진천
  

침례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의식이었습니다. 또한 이방 로마종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여 생긴 카톨릭 교회에서조차도 초기에는 침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듭해 오면서 침례 의식은 많은 변화를 거듭하게 되었고, 지금은 개신 교회에서조차도 사람에게 물을 뿌리거나 붓는 형식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그것이 얼마나 잘 못 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침례가 단순히 의식이 아닌 중요한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날 성도들이 이 침례 신앙 위에 믿음의 기초를 세우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매우 잘 못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거짓 전도자들과 선생들은 침례의 의미를 축소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례는 단순히 구원을 받은 자가 행하는 의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믿는 자의 죽음, 묻히심, 부활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일 이 복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로부터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빠지게 된다면 그는 구원을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골2:12)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이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될 것임이라(롬6:3-5)

이처럼 확실하게 침례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침례에는 묻히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오는 과정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 그리고 다시 부활하심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고전15:1-3). 복음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구원으로 인도받은 진리입니다.

이처럼 침례에는 복음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세례를 통해서도 그러한 진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세례에는 오직 죄 씻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침례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우리의 지난 인생이 죽고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우리의 부활을 말한다.

죽음이 있다면 곧 부활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실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례(洗禮)는 몸은 그대로 두고 죄의 문제만을 씻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 수 없으며, 또한 그에게는 다시 태어남도 없을 것입니다. 완전하게 죽었을 때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례를 만족시키는 것은 세례가 아니라 침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 같이 우리로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4)

생명의 새로움을 얻었다는 것은 전에 죄의 몸을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새로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침례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여전히 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거듭남을 통해서 새로운 신분과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 안에는 우리의 몸이 새로워진 것이 아닌 혼이 새로워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3.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옷은 몸을 가리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몸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침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몸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더불어 죄가 가리워지고, 의인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이라"(갈3:26,27)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물 침례가 결코 죄 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일1:7, 골1:14). 침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간증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결코 죄사함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침례를 행한 자가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침례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겠다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심과 같이 자신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쓸 것이며, 또한 본이 되는 삶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4. 침례 주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얼마 전 어느 미국인 선교사님이 시무룩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의 한 교회로부터 더 이상 지원금을 보내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선교사는 많은 사람들을 구령하고 침례를 주었는데, 당신은 구령은 열심히 했지만 단 한명도 침례를 준 적이 없으니 사역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침례를 주는 숫자가 그의 사역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것은 아무도 내가 내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음이라. 이것/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3-17)

만일 오늘날 선교사의 기준으로 바울을 본다면 그는 형편없는 선교사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많은 이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았으며, 평생 그의 사역을 하면서 침례를 준 자가 그의 기억에 남아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였지 침례를 주는 일에 힘을 기울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이 몇 명에게 침례를 주었는가를 과시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자신이 몇 명 구원했는지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침례에 순종하는 것은 침례를 주는 자가 아니라 침례를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을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요하기도 하고, 또한 침례를 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함으로서 억지로 침례를 받는 경우들도 허다하게 있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잘 못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머리로 구원을 이해했다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매우 잘 못된 것입니다. 구원은 복음, 즉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을 믿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침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능력 있는 목회자가 침례를 행한다 할지라도 받는 자가 충분한 믿음의 고백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목회자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바울은 이일에 대하여 전혀 자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침례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5. 구약에서 침례의 모형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나와 홍해를 건너는 것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받은 사실은 대하여 침례의 모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과정을 통하여 더 이상 이집트에 속한 백성이 아닌 모세에 속한 백성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고(고전10:2)

이 모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신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 나온 사실을 침례와 연관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침례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침례 안에는 세상과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례 안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벗어나 광야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침례에 대한 또 다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침례는 한 몸, 한 성령의 모형

침례가 주는 또 다른 의미는 바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와의 한 몸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와의 연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요, 곧 한 성령에 의하여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전12:13)

우리는 교회의 회원(지체)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하는 규정을 정해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식으로서의 침례를 받지 않았다고 구원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입증하고 서로 보임으로서 한 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한 몸임을 드러내는데 침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엡4:5)

침례는 단순히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서로가 고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 주님을 믿으며, 같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들은 각각일 수 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요, 곧 한 성령에 의하여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전12:13)

침례의 하나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매인 자나 자유한 자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종이나 빈부관계, 혹은 종이나 자유한 자가 모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당시의 주장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민족간, 세대간에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오직 한 믿음 안에서 침례를 통하여 동일한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침례는 단순한 규례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많은 영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동참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침례신앙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온전케 하고 또한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