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스데반 2

은바리라이프 2009. 9. 7. 18:52

  스데반의 설교 Ⅳ(사도행전7: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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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이가 정하여 주사 모세가 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그 뒤에 일어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껫 우리 조상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들의 소유지 안으로 예수와 함께 이 장막을 가지고 들어가 다윗의 시대까지 이르니라(44,45)

[읽을거리]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었는가를 지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랐을 때에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다윗의 시대에 이를 때까지 장막을 빼앗겨 이방인들의 소유지에 있게 하는 일들을 행하였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설교의 핵심은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보듯이 세리나 창녀 등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죄인임을 먼저 생각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일일이 들추어냄으로서 죄인임을 알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의 죽으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앞에는 언제나 먼저 회개가 뒤따르는 모습을 봅니다. 이 말은 모든 믿음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이 모든 죄들을 사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고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사도행전2:38)

먼저 죄를 알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복음 전도 방식은 모든 증거자들의 공통적인 방법입니다. 죄 사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모든 복음 증거자들은 먼저 세상을 향해 그들이 죄임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묵상과 기도]
과연 나의 믿음의 출발이 죄 사함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진단해보고 세상을 향해 담대함으로 죄들과 주님의 용서하심을 전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합시다.
  스데반의 설교 Ⅴ(사도행전7: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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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짖겠느냐 혹은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아니하였느냐 함과 같으니라(49,50)

[읽을거리]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문제에 이어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성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성정은 본래 다윗이 짓기로 작정하였던 것이었으나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었습니다. 그 후에 훼손되어졌으나 두 차례에 걸쳐서 다시 재건되어지는 우여곡절을 가지고 있는,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매우 의미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스데반은 이 건물이 하나님께서 거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지금까지 그들이 믿고 있었던 신앙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곳임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조상들의 죄 문제에 이어서 성전의 문제로 또 다시 그들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더 이상 성전을 죄 문제를 해결하는 장소로 여겨서는 않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전은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그들의 건물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성전은 이제 더 이상 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정한 성전은 바로 주님이 머물고 계신 곳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우리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심에 서 있던 성전 안에 언제나 주님께서 머물고 계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의 몸에 주님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이 성전이 파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들이 와서 냄새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성전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보수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이 주님께서 머무시는 전임을 알고 거룩한 삶을 사는 지혜로움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건물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몸이 성전임을 바로 알고 이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묵상과 기도]
주님이 함께 하는 우리의 몸이 성전임을 알고 죄에게 내어주어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근신하며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됩니다.
  스데반의 설교 Ⅵ(사도행전7: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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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51)

[읽을거리]
스데반이 설교하고 있는 장소는 온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모여있는 공회였습니다. 지금 그의 상태는 실제적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그들 앞에서 살려달라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지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서 분노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자세는 전혀 용서를 구하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공회에 모여있는 그들을 향해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죄를 범한 것 같이 지금 그들도 죄를 범하고 있노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의해 죽으셨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눈으로 볼 때 지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넘긴자요 살인한 자들이며 율법을 받고서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스데반이 아니라 공회에 모여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중심은 죄를 깨닫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는 이일을 위해서 죽음도 각오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베드로에 의해서 증거된 바가 있습니다. 그도 역시 솔로몬의 주랑 앞에서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들이 유대인들임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사도행전3:14-15). 이 일을 통하여 오천 명이나 믿게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에 대한 설교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심각한 죄 문제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칫 잘 못하면 성도들이나, 혹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교회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곳으로 사람들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복음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결과에 상관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스데반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도록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묵상과 기도]
우리는 때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타협하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거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나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스데반의 순교(사도행전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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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60)

[읽을거리]
스데반의 순교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서 있는 자리는 그를 죽이기 위한 사람들로 둘러싸 있었고,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지적했고, 오히려 그들이 전하지 말도록 권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회에 모인 자들이 마음이 상해 이를 갈 때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이 말을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순간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모여들어 스데반을 도시 밖으로 내 던지고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이미 순교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주 예수님이시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드는, 곧 육신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사실은 그 현장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사도가 된 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순교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복음전도의 장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순교의 현장에 있었던 바울은 언제나 죽음이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스데반의 순교를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으로 바꾸었고, 이는 20세기의 역사를 거듭해 오면서도 변치않는 신앙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죽음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순교하는 일들을 보곤 합니다.

스데반이 영향은 순교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복음을 지키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난 20세기 동안 사탄의 무리들은 복음을 감추거나 말살시키기 위해서 모진 핍박과 고난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에 영향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순수한 진리를 보전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 왔고, 지금도 그러한 일들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되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묵상과 기도]
순수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순교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담대한 복음 증거자의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