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스데반 1

은바리라이프 2009. 9. 7. 18:37

  스데반(사도행전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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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공회 안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스데반을 똑바로 바라보니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읽을거리]
스데반에 대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최초의 순교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면 그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리베르티, 그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등 아시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있던 회당에서 논쟁을 벌일 때 아무도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지혜와 영이 충만한 초대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심지어 무리들이 스데반이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고 간주하고 사람들을 매수하고 그를 잡아 서 공회로 데려와 거짓 증인들을 내세우고 모함을 해야 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은 스데반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그가 공회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스데반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금의 상황은 바로 죽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는 무리들의 모함과 공회 앞에서의 긴장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평안과 기쁨의 표정을 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뒤에 오는 핍박과 힘겨운 환경을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옳은 진리만을 말하는데 핍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핍박하는 대적을 향해 또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세상의 법에 자신의 논리를 맡기고는 판단을 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평안이나 기쁨도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원수들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현장에는 언제나 핍박이 뒤따르게 될 것이고, 심지어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라도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법에 호소를 한다고 할지라도 차라리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세상법에 호소하는 것을 온전치 못한 행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6:1-8). 우리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차라리 당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과 표정은 바로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주님이신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묵상과 기도]
스데반의 모습을 통하여 어떠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스데반의 설교Ⅰ(사도행전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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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또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족장을 낳으니라(8)

[읽을거리]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는 성경 전체에 걸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설교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설교의 주제로 꺼냈던 인물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가장 첫 번째 조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첫 번째 인물로 등장을 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이후로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의 열 두 아들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번성시켰던 인물입니다. 그가 받은 언약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할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할례를 통하여 그들 백성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백성이라는 징표로 행하게 되어있는 의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비슷한 하나의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침례'라는 의식입니다. 이 침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로 행하는 의식입니다. 이 침례에 관하여는 많은 부분에 걸쳐서 설명이 되고 있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면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듯이 오직 주님의 자녀 된 자라야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할례 받은 백성은 갈대아로부터 나온 자(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만일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려 두고 다시 갈대아로 간다면 할례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됨을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또 다시 세상으로 가려고 한다면 침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씨는 계속해서 결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낳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 그들은 또 다시 자녀를 낳고 다른 이들에게 침례를 주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그들, 즉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왔으며, 그의 후손들인 그들이 결코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의 주님의 자녀 된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묵상과 기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그리스도인, 그리고 분명한 믿음의 씨를 받은 자라야 주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스데반의 설교 Ⅱ(사도행전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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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마침내 요셉이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일어나 우리 친족들을 교활하게 다루고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여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하였느니라(18,19)

[읽을거리]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나와 가나안을 밟고 할례를 받게 된 사실에 이어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 들어가 자손을 번성하고 후에 또 다시 이집트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번성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땅, 그리고 세상을 대표하는 땅 이집트에서 번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가나안에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요셉을 미리 이집트로 보내시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서 기근으로 인한 재앙을 면했고, 또한 자손까지 번성하는 놀라운 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곳은 그들이 머물 영원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약 4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는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해야만 했고,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학대를 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또 다시 하나님께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본래 머물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지도자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갈수록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이 점점 쌓여져 갈 때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자손들이 점점 많아질 때 만족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고, 또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우리를 배반할 것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많은 물질은 오히려 많은 다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몇몇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자녀들은 점점 멀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육신마저 우리를 배반하고 늙어가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겉으로는 행복을 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떠나야만 하는 이집트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야 할 땅은 가나안이었듯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들이 가야하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작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있겠지만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영원히 머물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묵상과 기도]
때로는 세상이 우리에게 육신적인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이 결코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 있어야 하는 땅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스데반의 설교 Ⅲ(사도행전7: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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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그들이 이르기를 누가 너를 치리자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이 모세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난 천사의 손을 통하여 치리자와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그가 사십 년 동안 이짐트 땅과 홍해와 광야에서 이적과 표적을 보이고 그들을 인도하여 내었느니라(35,36)

[읽을거리]
스데반 설교의 중심은 이제 모세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세는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모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면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 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25) 그러나 정작 백성들의 그의 행동에 대하여 냉담했고, 오히려 모세를 광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소명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가 즉시 쓰임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상상할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가 기나긴 시간 동안 방황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40년의 세월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모세를 하나님은 다시 부르셨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자기 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백성들이 그를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0년 뒤에 다시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때로는 우리의 부르심이 바로 사역을 하도록 만들어 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훈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지도자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과 기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누구나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기도로 준비하는 성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