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의 신학적인 발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율법

은바리라이프 2009. 9. 5. 18:26

바울의 신학적인 발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율법


이 책의 제목은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이다. 지금까지의 자세한 설명은, 내가 기대하는 것처럼, 이 제목 선정의 정당성을 보여 주었다. 즉 바울은 롬 9-11장에서 '하나님의 자아'(Ich Gottes)로부터 생각한다. 이 자아가 이스라엘을 만든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그의 자아를 말씀하시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소위 본래의 이스라엘에게 유효하였고 그리고나서 마침내 전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효하다. 바울이 이러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세움과 관련하여 신학적인 논증을 할 때 특별한 방식으로 인증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학이 그로 하여금 성서를 그렇게 해석하게 하는 것, 바울이 성령의 자유 안에서 성서의 의문을 영적인 권세로 바꾸기 위해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의 신학적인 논증을 이끄는 형식적인 성서 권위가 아니라, 바울의 경우 자명하게 성서 뒤에서, 물론 전체 성서 뒤에서, 자신을 알리는 하나님의 권위이다. 사람들은 아마 바울이 랍비적인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구체적으로 미드라쉬의 양식을 취급한다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궁극적인 결정적인 사정 형편에 대해 2차적일)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바울의 부르심, 즉 바울의 경우 본래적인 권위를 서술하는 그의 다메섹 경험이었다고 지적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바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부르심(die Berufung Israels durch Gott)에 대해서 그것을 신학화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롬 11:25의 musthvrion 용어를 살펴보자.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될 것이다.) 김세윤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바울 복음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Gospel)에서 '비밀' 용어를 자세하게 다룬다. 그가 올바르게 강조하는 바 바울이 이 용어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것은 11:33-36의 종결 찬가로써 입증될 것이다. 김세윤도 11:34(= 사 40:13)의 수사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고전 2:12로써 대답되었다고 여긴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그리스도의 영(nou'n Cristou'?)을 가졌으며, 그것으로써 아마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고,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지식이 그 영 뿐 아니라 그가 받았던 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고전 2:12)."

김세윤의 모든 자세한 논증을 언급하고 그것도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는 아니다. 단지 한가지 점만, 즉 25절의 "비밀"을 이사야서 진술의 배경에서 해석하는 그의 시도를 생각해보자. 이점에 있어서 김세윤은 이 연구의 1.4 단락에서 기도되었던 비슷한 방법론적인 전제를 사용한다.[127/128] 김세윤은 올바르게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부름 받은 그의 소명을 사 49:1-6의 하나님의 종 소명 기사("narrative")에서 취했다는 말씀으로써 서술한다는 데서 시작한다. 이때 김세윤은 Otto Betz를 인증하여 "하지만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소명 기사 중 하나인 이사야 6장은 바울의 소명과 관련해 볼때 받을 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 6장의 빛 안에서 롬 11:25의 비밀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지를 주장한다. 이사야 6장은 어떤 환상이 나타나는 소명기사 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때 한 그리스도 현현(Christophanie)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소명과 사 6:1-6에 언급된 종 소명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종의 소명 사이에 유형론적인 일치를 보면서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이사야 설화의 형태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더 자세하게는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소명을 사 49:1-6과 사 6장, 양 본문의 빛 안에서 보았다는 것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김세윤은 이사야 6장과 문제가 제기된 바울 서신의 구절들의 평행 구절들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런 평행 구절을 볼 때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이사야의 소명 기사의 빛 아래서 그리고 이사야 6장의 "형태"를 따라 설명하지 않았다는 가정은 쉽게 가정될 수 없다.

여기까지 김세윤의 주장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김세윤의 가설이 이사야 6장과 관련해서 가장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가설에 연결하는 사고들은 아주 사변적이다. 게다가 그런 생각들은 바울의 이전 서신의 진술과 일치될 수 없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 형성 과정의 시작 이후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확신했다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전적으로 동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이런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이런 확신에 있어서 그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때부터 롬 11:25f의 비밀을 계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그는 사 6장과 49:1-6에서 자신의 다메섹 소명의 전형을 보았을 때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과 함께 롬 11:25f의 비밀을 들었으며 나중에 사 6장과 49:1-6에서 그것을 확인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떻든 사 6장과 49:1-6의 조합은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설명해주며 롬 11:25f의 비밀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김세윤의 논증의 핵심은 사 6:9(LXX)이라는 것은 자명하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유대 민족들에게 하는 말(Anrede)이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설교 과제로 해석될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의 사도가 아니다! 김세윤에 의해서도 바울은 회심 이후 이방인의 사도였다(위를 참조).

롬 9-11장으로부터 살전 2:14-16을 본다면, 이 둘을 동일한 한 사람의 진술로 보기는 어렵다. 롬 9-11장이 전체 이스라엘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학적인 논증이라면 살전 2:14-16의 기록자는 유대인에게서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단념한다.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유대인의 경우 저자는 단지 정죄하는 말만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주님이신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바울을 박해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고, 심지어 이방인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방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죄의 양을 가득 채웠다. 그 결과는 e!fqasen deV ejp j aujtouV" hJ ojrghV eij" tevlo"이다. 번역하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벌써 그들에게 전적으로 임하였다." 즉 유대인의 멸망 상태는 전망이 없다. 진노(ojrghv)는 여기서 마지막 날 멸망의 심판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 대개 정당하게 가정된다. 부정 과거 e!fqasen은 Ernst von Dobschutz의 견해처럼 "예언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예언자는 미래가 가져다 주는 것을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구절 역시도 롬 9-11장과 모순적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주석가들이 살전 2:14-16의 진술을, 특히 2:16의 진술을 약화시키는 시도를 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Gustav Stahlin에 의하면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유대인에게 놓여져 있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진노의 영원함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 바울이 그렇게 했다면 "바울이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종말론적인 견해를 기본적으로 서술하는 로마서 11장에 대해 조정할 수 없는 모순으로" 들어갔을 것이다.[129/130] 그래서 그는, 바울의 신학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자의 경우 아주 철저하게,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로마서 11장에 대한 이런 견해를 "살전 2:14ff과 같은 유대인과 관련된 다른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도 표준적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Ferdinand Hahn이나 Ulrich Luz 같은 학자들도 "살전 2:14ff가 성찰되지 않은, 전통적인 진술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숙고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다르게 주장된 가정보다 더 간단하다"고 조정을 시도한다. 바울이 여기서 전통적인 진술들을 함께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히 논쟁될 수 없는 사실이다. Odil Hannes Steck은 바울이 전통적인 기독교 및 이방인의 유대인 비난의 요소들을 붙잡았다고 이것을 한번 더 분명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Werner G. Kummel도 그 이전에 벌써 그것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U. Wilckens도 바울이 살전 2:14-16에서 롬 9-11장에서와 다르게 이스라엘의 구속사적인 입장을 생각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롬 11:25f의 비밀은 "그[바울]의 구속사 사고에서의 한 전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와 선지자를 살해한 자, 유대인] 유대인 정죄를 최초로 원칙화했다. 그러나 그후 동일한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는 단지 바울적인 전승에서만 계속 작용했던 어떤 변화를 이루었다."

바울의 경우 나타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순적인 진술의 견해를 피하기를 바라는 다른 가능성은 살전 2:14-16을 비바울적인 삽입(Interpolation)으로 평가하고 그래서 세련된 방식으로 그 구절을 롬 9-11장의 의미로 해석하는 노력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다. 2:14-16을 비바울적으로 생각하는 Karl-Gottfried Eckart의 자의적인, 데살로니가전서 해석은 Kummel과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의 확신 있는 비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Hans-Martin Schenke 역시도 Eckart의 분석을 방법론적으로 불충분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전 2:14-16의 비바울적인 성격을 고수하고자 한다. Schenke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문학적으로 두 서신과 세부적인 편집절로 구분하기 때문에 다음의 판단을 정당하다고 여긴다. 곧 "어떻든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한 편집자의 손이 작용했다면, 거의 아무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정하지 못한 것으로 의심 받은 유명한 2:15f은 이 편집자가 아니라 바울에게 부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130/131] 문학 분석의 관점에서 이 구절들은 단순하게 '유대인'이라는 중심 단어 아래 2장 14절 끝에 걸려 있는, 속사도적 내지는 초기 카톨릭적인 반셈적으로 설정된, 아주 확정된, 사도행전과 비슷한, 전제된 이방인 기독교의 바울상의, 주후 70년만에 일어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어떤 유대인 적대적인 진술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표어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런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제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특이한 평행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바울의 이스라엘 진술과 관련해 볼때 모순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내용 사정에 약간의 빛이 비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유대인 내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만 긍정적인 평가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도 비슷하다. "율법은 거룩하다"(롬 7:12), "율법은 신령하다"(롬 7:14 등)와 같은 진술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 곧 모세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성찰에서 어떤 변화가 가정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나의 저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에서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거기서는 데살로니가전서로부터 로마서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아니라 단지 갈라디아서에서 로마서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다룬다. 가끔 내가 바울에게서 로마서에 대한 갈라디아서의 철저한 단절을 주장하는 것처럼 내 시도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58쪽에 강조했던 것으로부터 드러난다. 즉 "바울은 자신을 이 새로운 신학적인 노력으로써 스스로 신실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믿었다라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본래적인 관심,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복음을 믿음에서 난 인의에 있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바울의 의도를 확실히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바울은 오직 그 인의 신학의 이스라엘- 관련 의미를 근거로 그의 인의 신학을 새롭게 숙고하였다.[131/132] 그것에 대한 대가는 율법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통찰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이스라엘"의 주제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도 특히 갈 4:21-31의 사라-하갈 "알레고리" 안에서 그러하다. 여기서는 오늘날까지 아주 논쟁적인, 이 어려운 단락의 문제점이 취급될 수 없으며 더욱이 해결될 수 없다. 문제점은 알고 있듯이 본문비평적인 질문에서 분류에 이르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상당한 점에 있어서는 분명하다. 즉 갈라디아서의 바울에게 있어서 지상의 예루살렘은, 그리고 이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도!, 종의 성육신 그리고 복음을 제정하는 자유와 함께 복음의 모순적 반대의 성육신이다. 사라를 믿음의 의의 대표자인 아브라함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아브라함과 사라는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을 대변하지 않는다. 모든 유대인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예루살렘과 그의 민족이 바로 하갈에게 그리고 이스마엘에게로 소급된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그것은 또한 완전한 현실의 전도(顚倒)이다. 그리고 유대인은 심지어 그의 통찰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갈은 한번도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전적으로 비방 받을 뿐 아니라, 동시에 민족적인 이스라엘, 경험적 이스라엘이 비방 받는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 서신의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평가되어 있지 않았다. 전체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와 율법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단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단어도 발견되지 않는다. 할례와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인 로마서의 진술을 갈라디아서에 적용하는 자는 방법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종살이에 대한 동의어인 것처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민족은 이런 종살이의 역사적인 자리에 있어서 동의어이다. 다시 한번, 사람들이 갈라디아서에 집어 넣는 로마서 진술의 도움을 받을 때 율법과 이스라엘의 맥락에서 이 편지를 더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때 갈 5:14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 율법'(oJ pa'" novmo")은 5:3에서 '율법 전체'(o@lon toVn novmon)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에 일치하는 점은, 바울이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갈 6:16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jIsrahVl tou' qeou)에 대한 축복 말씀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132/133]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한편으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갈라디아서 진술과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서 진술의 차이점은 간과될 수 없으며 논쟁될 수도 없다. 차이점을 지나칠 수 없지만 드러난 결론을 끌어내지 않는 곤경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은 Ulrich Luz가 몸부림치는 것처럼 갈 3f장과 롬 9:1-5; 11:16-32 간의 대립이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서신이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Luz는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상황 안에서만 다양성의 토대를 찾는다. "여기서 바울이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 것은 율법이 인도하는 구원의 길로서 이해되지만 구원에 이르지 않고 구원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세한 서술의 결론에 있는 것은 유대교가 배척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물론 도출되지 않은, 결론의 근거는 은혜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으로 로마서에 이른다면 더 긍정적인 율법 견해는, 다시 한번 말한다면 물론 그 경우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데, 4장에서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할례 견해와 그 이전의 서신과 비교해볼때 변화된 견해와 잘 연결된다. 그러니까. 김세윤과 반대로(위를 참조), 가정할 수 있는 바 그의 경우 갈라디아의 혼란 이후 롬 11:25의 비밀이 일어났다는 점인데, 그 비밀로부터 내가 가정하고 싶은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 진술을 얻고자하는, 갱신된 집중적인 노력 없이 그것은 결코 추론되지 않았으며, 그때 보여졌던 것처럼 이사야서는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갈라디아에서 바울 적대자가 유대인들이었다면 또 이로써 추측컨대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 기독교인과 접촉이 있었다면, 비록 아주 밀접한 접촉이 아니라도, 이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지도자의 부정적인 반응은 불가피했을 것이다.[133/134] 바울의 신학적 사상 변화가 예루살렘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의해서도 적어도 함께 한정되었다는 앞에서 여러번 진술된 나의 추측은 결론에서 묘사된 사고를 통해 계속 입증되었을 것이다. 다시한번 U. Wilkens를 인용한다면,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어떤 변화의 전환(Kehrtwendung)을 향했다. "그러니까 바울은 롬 11:1에서 열정적으로 논쟁한 것을 바로 앞서 갈라디아서에서 규정짓기 어렵게 입증하였다. 하지만 그 사상은 로마서에서도 9:2b부터는 복음에 적대적인 이스라엘의, 그러한 종말론적인 배제로 향해 가는 곳에서(11:8-10), 그의 이전 판단의 배경에서 그후 바울이 롬 11:11ff에서부터 11:25f의 '비밀'에서 발견하는 대답은 더욱 놀랍게 된다. 즉 그 대답은 바울의 구속사적인 생각에 일어난 한 전환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선사된 인식으로 재진술해야한 것으로 믿은 것이 어느정도 우리에게 구속력 있는 사도의 진술인가는 질문에 대해 짧지만 좀더 언급해보자. E. P. Sanders가 올바르게 주목하게 하는바 바울이 충만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대하는 것은 재림이 곧 일어난다는 그의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거기에 다른 어려움도 덧붙는다. 그것은 온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다. 고대의 열두 지파 동맹은 북왕국의 멸망 이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체 진술의 문제점을 푸는 것이 기독교인의 과제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유대인에게 맡겨야 한다. 기독교인은 주제넘게 그것을 다루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은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기독교내 신학적인 대화 상대자가 이 전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자신의 신학적인 사변의 초석으로 삼는 곳에서 적어도 질문으로서 의식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은 적어도 이 대화 상대자에게 그가 유대 민족의 정체 문제를 풀 수 없으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난제(Aporie)로 인도하는, 역사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요청으로써 기독교 신학에 짐을 지워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134/135] 롬 11:25의 비밀이 사변적인 공상에서 기인한다는, 많이 비판을 받은 Rudolf Bultmann의 명제가 정말 진리의 한 요소를 담고 있는가? 이 질문과 가장 분명하게 신구약성서 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다른 질문은 구분된다. 이 책의 헌정 인물인 Walther Zimmerli는 신구약성서에서 포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아성(Selbigkeit)을 박력있게 지적하였다. Bultmann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롬 9-11장에서 구체적인 구속사적인 바울의 성찰은 시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 불트만에 의해 확고하게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찰은, 바로 나-인용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20세기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고수되는 바울의 믿음, 곧 구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점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이 예비 작업으로 이해한 성서적 신학의 과제는 놀랍게도 계시가 역사적인 사건이고, 우리에 대한 게시가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로 경험했던 것이 우리에게 유효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에서 어디에 어떤 의미로 있는가를 알게 하는데 있다. 이 질문을 이렇게 제기하는 0痼?모든 종류의 마르시온주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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