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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와 유대교

은바리라이프 2009. 9. 4. 18:42

헬레니즘 시대와 유대교

 

 

시작하는 말

 

페르시야시대가 후대 이스라엘 역사와 생활에 많은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과 비교 해 볼 때 결코 뒤질 수 없는 많은 변화가 마케도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사업과 헬레니즘의 전파를 타고 일어났다. 전략적 요충지인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알렉산더 제국의 3분된 세력의 소용돌이에서 때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지만 참혹한 박해를 겪으며 자생을 위한 몸부림을 쳤다.

본 발제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사업과 그 영향으로 인하여 전개되는 이스라엘역사의 대외적인 변화와 마카베오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하겠다.

 

 

 

1. 알렉산더 대왕과 헬레니즘의 전파

 

주전 336년 페르시야의 다리우스 3세의 즉위와 함께 마게도냐의 왕으로 등극한 알렉산더는 그의 위대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수학하였다. 왕위에 오른 그는 "부분적으로는 범 헬라적인 (pan-Hellenic)이상을 구현하려는 열의에서, 부분적으로는 훨씬 더 세속적인 동기에서 아시아의 헬라인들을 페르시야의 멍에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을 출정시켰다." 그리고 334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트로이(소아시아 북서쪽의 도성)지역에 있는 그라니쿠스(Granicus) 강변에서 페르시야 군을 격파하고 333년 다리우스3세 자신이 직접 지휘한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는 여세를 몰아 가능한 신속하게 이집트를 정벌하기 위하여 수리아 - 팔레스틴의 내륙지방을 점령해 갔다. 알렉산더는 내륙지방의 점령을 그의 군대장관 파르메니오(Parmenio)에게 맡겼고, 그는 과거 이스라엘의 왕도였던 사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저항 없이 마게도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정복당했다. 정복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마카비 Ⅱ 6:2절의 그리짐산 성소를 근거로하는 사마리아의 분리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를 군네벡은 "정복된 사마리아의 군사식민지와 그로인한 헬라화의 반동으로 야훼신앙에 투철한 자들이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성소인 세겜을 재건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존브라이트는 사마리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동으로 알렉산더의 수리아 지사 안드로마쿠스(Andromachus)가 불타죽은 것을 이유로 사마리아를 혹독하게 파괴한 후 그 위에 마게도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도주하였거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세겜을 재건하고 자신들의 중심지를 이곳으로 옮겼으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네벡과 존 브라이트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마르틴 노트의 주장은 시기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는 "한니발 장군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 패한 후 안티오쿠스에게 도망한 후 그를 격동시켜 190년 소아시아의 메안델의 마그네시아 전투를 벌이게 했으며 안티오쿠스3세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되고 이로써 셀류코스 왕조의 세력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는 데 이러한 쇠퇴기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와 큰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언제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사마리아 공동체가 예루살렘에서 분리되어 세겜 근처에 있는 고대 성산인 그리짐 산에 독자적인 제의를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332년 이집트로 진입한 알렉산더는 "합법적인 바로"로 옹립되었으며 그해 인도를 획득하였으며 마침내 331년에 이집트로부터 수리아-팔레스타인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원정을 감행하여 페르시야 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그의 정복전쟁은 323 6 13일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정복은 헬레니즘의 확산을 타고 계속되었다.

 

 

2. 프톨레미왕조와 셀류커스 왕조의 영향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게도냐 제국은 마침내 281년에 세 개의 독립된 국가로 분할되고 만다. "마게도냐는 안티고네가 통치하였고, 에집트는 프톨레미가, 남부 아시아의 전 지역은 셀류커스가 통치"하였다.

안티고네가 301년 입수스(Ipsus)전투에서 패배하여 목숨을 잃고 난 후 팔레스틴과 페니키아는 프톨레미에게 넘어갔다. 프톨레미 왕조는 과거 페르시야의 행정조직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것은 제노(Zeno)의 파피루스에 근거를 갖는데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었으며 또한 토지의 소유권을 보장 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거류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통용하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구약의 히브리어와 팔레스틴 사람들의 통속 아람어를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전 3세기에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먼저 오경에 대한 번역이 진행되었고 그 후에 구약성경 모두 번역되었다.

 

수십 년 계속되던 팔레스틴의 평화는 200년경 셀류커스의 안티오커스 3세에 의해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가 패배하므로 위협받게 되었고 198년 최종적으로 셀류커스 제국은 팔레스틴을 합병하였다. 합병을 이룬 안티오커스 3세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배려를 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시대와 프톨레미 시대에 누렸던 특권을 보장 받았으며 조상들의 율법에 따라 살 수 있었으며 난민들의 본국 귀환과 일시적인 것이지만 세금의 면제를 약속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190년 안티오커스 3세가 프톨레미왕조와 동맹한 로마군대에 참패하고 188년 아파메아(Apamea)평화조약을 맺음으로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티오커스 3세는 이 전쟁의 실패로 인해 로마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금의 조달방법으로 엘람의 신전을 약탈하다가 188년 살해되었다. 그 뒤를 이은 셀류커스 4세 역시 같은 이유로 "그의 장관 헨리 오도르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보화를 몰수 하려고 시도 하였다." (마카베오 2 3:4-40) 그러나 그도 곧 암살되고 그의 뒤를 이어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안티오커스 4세는 당시 위태로운 정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헬레니즘을 이용한 정치적 통일정책을 추진하였다.

사회적으로 상류층들의 대부분이 헬레니즘에 개방적이었고, 심지어 성도 예루살렘에서 조차 극단의 배교적인 헬라 경기가 시행되었으며(마카베오 4:12f, 요벨 3:13) 심지어 예루살렘을 헬라적 도시로 바꾸어 안티오키아(Antiochia)라고 명명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티오커스는 프톨레미 왕조의 위협과 저항할 수 없는 로마의 위협 속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게 지급했어야 하므로 끝없는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 안티오커스 3세가 유대인들에 내렸던 칙령을 철폐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하튼 안티오커스 4세의 정책은 조상들의 종교에 충실한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갈등은 175년경에 대제사장직의 암투로 처음 드러나게 된다. 안티오커스 4세가 왕위에 오를 때 유대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 3세였다(마카베오2 4: 1-6)그러나 그의 동생 야손(Jason)은 안티오커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왕에게 더욱 협조하겠다는 약속아래 대제사장의 자리를 찬탈하였다.(마카베오 4: 7-9) 그러나 그도 역시 안티오커스4세에게 더 많은 돈을 준 메넬라우스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다. "메넬라우스는 왕에게 약속한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성전 기물들을 내어 팔기 시작했며 ... 169년 안티오커스가 이집트 침공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메넬라우스의 묵인하에 성전을 약탈하여 그 성물들과 기물들을 쓸어가고 심지어 성전 전면의 금박까지 벗겨"가도록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안티오커스4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은 억누를 수 없으리 만큼 팽배하였고 이 사건 이후 즉시 예루살렘에서는 소요가 있었던 것 같다.

 

소요에 대해 곧 조치가 내려졌다. 168년 이집트 재 원정에 오른 안티오커스 4세는 정복을 눈앞에 두고 로마의 개입으로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굴욕의 감정만큼이나 심기가 불편하였을 것이고 이 불똥이 예루살렘으로 번져갔을 것이다. 167년 안티오커스 4세는 용병대장 아폴로니우스에게 큰 병력을 주어 예루살렘을 기습 공격하여 파괴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은 적국의 성벽처럼 취급되었고 아크라(Acra)라 불리워진 성채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곳은 단지 군대가 주둔했던 영지가 아니라 "헬라화화 한 이교도들과 배교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이 사건은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안티오커스 4세는 유대인들의 저항에 대해 "한 포고령(마카베오 상 1:41)을 통해 그 모든 중요한 종교의식을 금지하였다." 마카베오 2 6: 18-31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율법의 사본들은 파기 할 것이며 할례금지, 이교제단이 도처에 세워지고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고 이것을 어길 시에는 사형을 당하여야 했다. 심지어 167 12월에 올림푸스 제우신의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3. 마카베오 독립전쟁

 

마카베오 운동은 안티오커스 4세의 유대교 박해에 대한 반동으로 봉기 된 것이다. 안티오커스4세의 지시에 대해 일부의 헬라화한 유대인들은 환호하였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스스로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의 박해는 참혹하기만 하였다. 이와 같은 혹독한 시기에 다니엘서는 최종 형태로 편찬되었다.

잔혹한 유대교 박해는 경건한 무리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룻다(Lydda) 동쪽 산지에 모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는 왕의 관리로부터 이방의 희생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거부 하였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는 이것을 보고 분노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제사 드리는 자도 죽였다. (마카베오서 상 2:15-28)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맛다디아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뭉쳤고 하시딤도 그들에게 동조하였다.

노인이던 맛다디아가 죽자 (166) 마카베오라 불리우는 그의 셋째 아들 유다(Judas)가 저항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마카베오 1 3:1) 매우 유능하고 과감한 유다는 저항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 성공적으로 싸웠다. 이 유대인의 투쟁은 그의 별명에 따라 마카베오 전쟁이라고 불리운다.

셀류커스왕조는 그들의 반란초기에 마카베오 3 10-12절에 기록된 대로 아폴로니우스 와 그 군대를 파병하였지만 지형에 익숙한 유다의 군대에 참패하였다. 마카비는 유격전으로 계속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에 심각성을 인식 했을 때에도 안티오쿠스 당시 파르디아의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에 보낼 수 없었다. 이후 상당수의 시리아 군대가 유대에 파견되었으나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었고 마카비는 승전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대제사장인 메네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주하였다. "성전이 더럽혀 진지 3년이 지난 셀레코우스 왕조 제 148년 기슬레우월, 164 12 25일에, 합법적인 하나님 예배를 위한 성전은 회복되었고, 8일 동안 축제(수전절- Hanukkah)가 벌어지는 동시에 희생제사, 기도 , 찬양이 드려졌다."

마카베오의 전쟁은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한 방어전의 성격을 완전히 벋어나 정복을 하는 공격전으로 바뀌었다." 그는 헬라주의자들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아크라를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한 이유로 안티오커스 4세의 사망 후 실질적인 권한을 쥐게 된 리시아스가 직접 많은 군대를 끌고 진격해 왔다. 마카베오는 그들에게 패하여 예루살렘으로 후퇴하였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들은 권력투쟁의 문제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제의해 왔다. 유다 마카베오는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의 획득도 목표로 하였으나 하시딤의 목적은 종교적 자유의 획득에 있었다. 결국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던 하시딤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적인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해 나갔다. 결국 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 하였다가 막강한 셀류커스 군대에 의해 160년 사망하였다.

 

 

마치는 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세계통일의 욕망은 그 헬레니즘을 통하여 전세계에 영향을 주었고, 그가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인한 제국의 분할은 신민 이스라엘에게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억압은 곧 민중봉기로 이어졌으며 마카베오 독립전쟁의 응집력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마카베오의 독립전쟁이 그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억압으로 부터의 자유이상 정치적인 독립까지를 목적하고 전쟁을 감행함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지만 그 전쟁으로인한 영향력은 하스몬왕가를 통해 오랜세월 이스라엘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