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칼럼·논문·서적/기독논문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 나무-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은바리라이프 2009. 8. 24. 07:03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 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데에 적합하다. 그 이유는 팔레스타인의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는 이 곳에서 풍부하게 나기 때문이다. 또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쉬게 될 천년 왕국 시절을 나타내고 있다(미카4:3-4). 야곱(이스라엘)은 죽기 직전에 그 아들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장래를 예언했다. 유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카나안에 그가 차지하는 땅에서는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나귀들을 포도나무에 매여, 그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했다(창49:9-12).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고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하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시편80:8-11절에서 . . .

?주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져오셔서’ 이방을(카나안 족속들) 내어쫓으시고 그 포도나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에 자리를 마련하시고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시니, 그것이 땅을 메웠으며. 산들이 그 나무의 그림자에 덮였고, 그 나무의 줄기들은 훌륭한 백향목들 같았으며. 그 나무의 줄기들은 바다(지중해)까지 뻗쳤고 가지들은 강(유프라테스)까지 뻗쳤나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거친 땅에서 취하여 카나안 땅에 심은 사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은 “넓게 편 팔”을 지니신 전능하신 분인데, 그분이 돕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파라오의 땅,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옮겨 심으신 “선한 농부”셨다. 또한 이것은 전적로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옮겨심기 위하여 카나안의 모든 이방족속들을 몰아내어 “그 땅을 깨끗하게 하신”분도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왜냐면 그 카나안 땅의 성읍은 매우 견고하고 그 족속들은 거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민13:26-33).

한때 옮겨진 포도나무는 더욱 자랐나서, 그 땅을 덥기 시작하여, 솔로몬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시편의 말씀대로 지중해까지 그 가지를 뻗고 유프라테스강까지 넝쿨을 뻗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도원”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이제 내가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 노래하리니, 그의 포도원에 관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심히 기름진 산(카나안)에 포도원을 가졌도다. 그가 땅을 파며 거기에서 돌을 주워 내고 최상품 포도나무를 심으며 그 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그 안에 포도즙틀도 만들었도다. 그가 포도가 열리기를 바랐더니 야생 포도가 열렸도다.? (사5:1-2)

이스라엘 만큼 풍성한 은혜를 받은 민족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포도원에 행했던 것 외에 무엇을 더 했어야 했느냐? 내가 포도 열리기를 바랐는데 야생 포도가 열림은 어쩐 일이냐??(사5: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상품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야생 포도”가 맺힌 것을 보셨을 때 그 실망은 매우 크셨던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름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를 한 ‘고귀한 포도나무’, 즉 온전히 올바른 씨로 심었더니 어찌하여 네가 내게 타국 포도나무인 빗나간 식물이 되었느뇨??(렘3:21)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포도원을 어떻게 하시고자 하셨던가? ?이제, 내가 가서 내 포도원을 위하여 할 일을 말하리라. 내가 거기에서 울타리를 걷어 내어 먹히게 할 것이며, 거기에서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하리라. 내가 그것(포도원)을 황폐하게 두리니, 그것이 가지를 치거나 갈지도 못하게 되어 찔레가시를 내리라. 내가 또 구름에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사5:5,6). 그리고 “포도원”과“포도나무”의 의미하는 것을 실수하지 않게하기 위하여 ?만군의 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이요, 유다 사람들(유대인들)은 그의 ‘기뻐하시는 초목’(포도나무)이라. 그가 공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만이 보이며, 의를 바라셨으나 부르짖음만이 보이는도다?(사5:7)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징계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져 왔는가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포도원)의 상태와 그 땅에서 뽑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포도나무)민족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과실을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다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며 삼림의 나무들 중에 있는 그 가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거기서 취한 나무로 무엇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으며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슨 그릇을 걸 못 한 개를 취할 수 있겠느냐? . . . 내가 삼림의 나무들 가운데서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불에 내어 준 것처럼 내가 예루살렘의 거민들도 그렇게 내어 주리라?(겔15:2-6). 이스라엘은 불이 붙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시덤불이다(출3:1-3) 지금 이스라엘은 “박해의 불길”을 통과하고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즉 이스라엘은 땔감으로나 적당한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단지 가지뿐이며 “뿌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그 포도나무는 다시 부활할 것이며, 천년왕국 시대가 오면 그 포도원(팔레스타인)도 다시 열매를 맺는 풍요로운 땅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에 대한 비유”(마21:33-41)를 읽어보면 포도원의 농부들, 곧 유대인들이 포도원(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상속자(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포도원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로 그 포도원은 다른 농부들, 곧 이방인들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특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올리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아와 세 가지 내용이 담긴 질문을 하였다. “언제 이런 일(성전 파괴이 있겠으며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시대) 끝의 표적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표적를 언급하셨다.

1. “멸망의 가증한 것”(적그리스도)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이 예언한 것처럼(살후2:1-4) 선지자 다니엘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엘 앉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단9:27).

2. “인자의 표적”은 “구름”이다. 예수님께서 구름사이로 올라가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때도 구름을 타고 오신다(행1:9, 마24:30).

3. “무화과나무의 표적”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표적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의 한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보면 그 일이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 알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유대 민족을 의미)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 지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2-35).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열매를 얻으려고 무화과나무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자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막11:12-14). 마가는 예수님께서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못하신 이유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마21:18-20)고 했다. 그럼 왜 그 나무를 저주했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무화과의 열매는 잎사귀를 자라기 전인 봄부터 그 전 해에 자랐던 가지에서 자라기 시작하여 6월이면 완전히 여물게 된다. 새 가지에서 늦게 맺힌 열매는 그 때부터 계속자라 8월이 넘어가면서부터 여물게 된다. 가을까지도 여물지 못한 열매는 겨울이 지난 후 초목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다시 여문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4월경이므로 무화과가 익을 때가 아니었다. 무화과는 빨라도 6월이 되어야 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잎사귀가 겨울을 난 무화과에는 그 전 해에 여문 열매도 남아 있다. 그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있는 잎사귀를 보시고 거기서 그 전 해의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 위선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는 것은 간단하다. 예수께서는 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 가운데에는 당연히 그에 못지 않은 결실이 있으리라 기대하셨지만 아무런 열매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의 위선에 대하여 저주를 내리신 것이다(마23:1-33).

우리는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눅13:6-9)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나라를 가리킨다.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심겼듯이 유대 민족은 팔레스타인에 심겼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으로써 육신으로 오셔서 유대 나라에서 약3년 동안 복음을 전하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나무를 찍어 버리기로 결심하시고, 포도원을 헐어 버리셨다.

그러나 그 나무는 즉시 베어지지 않았고 은혜의 기간이 40년간 연장된 후 A.D. 70년에 “도끼를 든” 로마의 타이더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점령당하였다. 즉 무화과나무인 이스라엘은 찍혀서 포도원 밖, 이방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다.

“무화과나무”(이스라엘)는 도끼에 찍혀 “포도원(팔레스타인)밖에 내던졌으나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을 뿐이지(눅3:7-9), 뿌리까지 잘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마24:32-34)에서 볼 때 뿌리로부터 새 나무가 돋아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화과, 곧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일어나 “잎사귀를 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다는 표적이다. 이 경우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기 전에 잎이 먼저 나온다. 즉 이스라엘은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국가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지금 “시대의 표적”은 분명히 “무화과나무”의 부활을 가리키고 있다. “시온이즘”과 “반유대주의”에서 “잎사귀를 내는 모습”이 보인다. “시온이즘”이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 유대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염원을 말한다. “시온이즘”에는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인 세 모습이 있다. “종교적인 모습”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여, 구약에 기록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대교 신앙의 부활을 바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모습은 그들이 박해받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벗어나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 완전히 정착하여 자기들이 심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약속된 메시야의 통치 아래 그들의 왕국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인구수와 관습이 자국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이집트의 속박이 부활된 것이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거대한 토목 공사나 소떼를 치는 일 등 고된 노동에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을 강하게 속박하여 그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출1:7-22).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것은 앞으로 일어날 예례미야 선지자가 말한 “야곱의 환란 때”의 그림자이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꺽으시고 그들을 맨 “”을 끊어주심으로서 이방인이 다시는 그들을 얽매지 못하게 될 것이다.(렘30:4-8)

이 두 가지 “표적”, 시온이즘과 반유대주의는 점점 더 뚜렷해져서 봄에 나무에 싹이 나는 것처럼,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나려 하는데, 이것은 “가까이 온 여름” 즉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마24:33-35). 이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특권을 상징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올리브나무”로 불리었으나 그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 가지가 꺾였다고 경고하고 있다(11:16-17).

로마서 11:17-27에는 “두 올리브나무”의 비유가 나온다.

“두 올리브나무”

하나는 (Good)올리브 나무고, 또 하나는 (Wild)올리브 나무이다. 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을 돌올리브 나무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참올리브나무의 뿌리는 세 갈래이다. 원 뿌리는 아브라함이며, 둘은 이삭과 야곱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할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이것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이것이 모든 세대에게 줄 나의 기념이 되리라.?(출3:15)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와 같이 “삼중”으로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삼위일쳬”이심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삭에세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야곱을 인도한 것에서는 성령를 볼 수 있다.

참올리브 나무의 “세 갈래의 뿌리”는 거룩했다. 구별되어 있었으며, “뿌리”가 거룩하므로 “가지”도 그러했다. 그 다음 구절에는 가지 전체가 아니라, “얼마가” 꺾였다고 했다. 그 가지들은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기 위하여 꺽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꺾였고,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것은 꺾인 가지를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올리브나무”의 가지였는데, 참올리브나무의 “뿌리”와 “기름진 진액”에 참여하기 위해서 접붙여진 것이다. 이것으로 “올리브 나무”가 뿌리가 뽑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단지 돌올리브 나무가지가 올리브 나무가지 대신 접붙여진 것으로 참 올리브나무는 아직 살아 있어서 “올리브 나무가지”와 “올리브 나무가지”에 모두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 나무가지”인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본래가지가 다시 접붙임을 받으려면 “돌올리브 나무가지”는 참올리브 나무에 계속 붙여 있지 못하고 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서 참올리브 나무 “뿌리”와 “기름진 진액”을 함께 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버린 유대인들은 믿음 없음으로 꺽인 가지들이다.

접붙이는 목적으로 살펴보면 “올리브 나무”를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야 “돌올리브나무”의 열매가 좋아질 수 있다. 만약 “돌올리브 나무”를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이면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리고 좋은 참올리브 나무마저 거칠어진다. 이것을 알고 있던 바울은 “참올리브 나무”에 “돌올리브 나무”를 접붙이는 것은 “본성을 거슬러”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이방인을 유대교에 끌어들임은 유대교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보다 유대인이 더 순수한 가지이므로 유대교의 순수성을 위해서는 이방인, 즉 “돌올리브 나무가지”를 “참올리브 나무가지”에서 제하여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본래가지”를 접붙여야 한다(롬11:24) “이방인”이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에 나온 것들은 현재의 “기독교계”, 즉 입로만 교회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뿐이었다(계3:16). 하나님은 “참올리브 나무”에서 “돌올리브 나무가지”를 제하여 버리듯이 그 교회를 제해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참된 교회인 “영적인 이스라엘”은 꺾여지지 않을 것이다.

“두 올리브나무”의 비유는 3가지로서 매우 중요한데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일어날것을 가리키고 있다.

1.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충만함”까지는 “이방인들의 때”를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복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다 충만한 수가 되어 마지막 이방인들이 구원받아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이 완성되는 때이다.

2.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나무 가지”가 꺽인 본래의 가지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돌올리브나무 가지는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계속 거하지 못할 것이므로 다시 꺾여 버릴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아주 잘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꺾인 가지를 다시 일으켜 접붙이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입으로만 교회라고 하는 “돌올리브 나무가지”의 배교를 보고 있다. 곧 그들이 “잘려 버리면” 눈멀었던 이스라엘이 “본래 가지”로써 다시 접붙여질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불 속에 던져 버릴 마른 가지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버려짐과 눈이 먼 것은 잠시뿐이고, 그들은 다시 이 땅의 나라들 사이에 그들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버림 받아 말라버린 채로 불에 타는 나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동안 그들이 “눈먼 것”으로 인해 “잘려 던져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땅의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한다. 또 주의할 만한 사실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나무들로 상징되었는데 그들의 압제자인 이방 국가들은 “들짐승”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단7: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