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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은바리라이프 2009. 9. 8. 16:04

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남아 있었다. 토론이 주로 동방에서 진행되어왔던 반면, 질문에 대한 가장 상세한 대답을 제공한 곳은 서방교회였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중세

이 문제에 대한 서방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으며, 신적 은총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이 어떻게 비천한 자를 높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하느님의 영적 본성의 연결이었고, 인류가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이었다. 그것은 옛 인성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새로운 인성의 기반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성육신의 중요성을 묘사하려고 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런 강조를, 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결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화해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았던 안셀무스와 종교개혁자들의 서방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형성되는 동안 화해를 서술하는 많은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성서적 말씀 속에 어떤 선례를 가지고 있었다. 화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묘사들 중 하나는 속죄에 대한 성서적 은유와 연결된 것이었다. 사탄은 인류를 그 죄와 타락성에서 포획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사탄과의 죽음의 싸움으로 나아갔다.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그리스도가 적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부활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에게 영원성을 가져다주었다. 〈구약성서〉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하느님의 분노를 멈추게 하는 수단으로써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가 나온다. 성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가장 잘 발전했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위해 주어진 대리만족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교부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고난을 참을 수 있는지를 배우라고 훈계한다. 그들은 또한 얼마나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예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와 같이 교회의 전통 안에도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하느님을 재연합시키는 기적을 표현하려는 많은 언어방식들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표현방식에 공통적인 것은, 재연합은 하느님의 행위였다는 것과 그 행위에 인간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론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 때문에 너무 '객관적'이 되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과 마귀 사이의 거래에서 저당물로 보였다. 다른 이론들은 인간의 관련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너무 '주관적'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구속의 전 영역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그의 책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 많은 이론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속교리로 만들었는데, 이 교리에 따르면 죄는 하느님의 영예에 대한 침해였다. 인간이 그 침해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을 만족하게 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인간이 오래 살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참 인간이며 완전한 가치를 가졌던 유일한 생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하느님의 침해된 영예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하느님이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참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사람들에게 유효할 수 있었고, 참 신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와 죽음의 열매들을 수용함으로써 인류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안셀무스의 대속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정통 개신교 이념들의 기초를 형성하면서, 라틴 교회의 신학에 전승되었다. 십자가는 대속의 만족교리에 의해 강화되고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사역을 설명하는 전통적 방식들을 수정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에 스콜라 신학이 공헌한 것은 신학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는 때때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에게서 가장 완전한 표현과 교리적 견해의 충분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인간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며, 그를 통해 삼위일체와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데 필요했던 사다리를 신비주의자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몇몇 그리스 교부들의 신비적 신학에서 예기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 교리는 신비주의가 과도한 범신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더불어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며 숭배의 지속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세의 공헌은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인간적 생애를 더욱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형제단은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부터 구별되기 위해 실천적·윤리적인 신비적 헌신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주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산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참 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인성을 단순한 교리적 개념으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 새로운 인식은 비잔틴 성상에서 유형화된 그리스도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조토 같은 화가들이 예수를 묘사하기 시작했던 방식에 반영되었다고 헨리 토드와 그밖의 몇몇 사람들은 주장했다.

종교개혁과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정통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그리스도론을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를 은총에 의한 의인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루터는 죄를 의지의 노예상태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리로써의 대속이라는 교부적 은유를 재생시켰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대한 찬송들은 썼지만 사순절에 대한 찬송들은 쓰지 않았다. '오직 은총으로'와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종교개혁 이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속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만들었지만,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루터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내세운 성찬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 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교리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 논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는 신성의 편재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통하고, 그러므로 신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에서나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해석했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고대 그리스도론이 성서적 증언에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낳아진 참 하느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참 인간"이라는 루터의 구절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 안에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서술의 몇몇 측면을 종합했는데, 그것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예언자·제사장·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로 발전했다. 이것들은 〈구약성서〉의 완성을 상징했고, 교회의 계속되는 삶의 한 측면을 표현했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사역에서 그의 예언적 직능을 계속 수행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완성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 중재자로서 기능을 계속함과 동시에 제사장이면서 제물이 됨으로써 〈구약성서〉의 희생제를 종식시켰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가 임명한 자들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통치하는 분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그들의 신학적·윤리적 또는 전례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구분했다. 그러나 삼중직을 통해 개신교 신학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론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묘사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교리를 신학적으로 조문화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20세기 중반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과 현대신학 사이에는 모든 개신교 교파와 신학자들의 시각을 변경시킨 그리스도론 논쟁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 사이의 간격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현대 개신교 신학 사이의 간격이 더 크다.

논쟁의 기원들

종교개혁 시대에 정통교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비판은 '종교개혁의 좌파'인 미겔 세르베투스(1511~53)와 소키누스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이 비판은 교리 안의 비성서적 개념과 단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도덕적 모범으로서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부르려 했으며,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예수에게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등의 모순을 나타낸다.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의 저항을 정통 교리에 대한 저항의 기초로 사용하려는 경향은 계몽주의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이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때문에 16세기에는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후대의 비평은 종교개혁자들이 의도했던 것의 일관된 적용이라는 근거에서, 두 본성교리에 대항하여 '개신교 원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와 교리문답 교육은 정통주의 교리에 대한 계속적 지원을 보장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리만족에 의한 대속교리가 루터 교회와 개혁교회의 찬송과 교리문답에서처럼 널리 충분하게 표현된 곳은 없다. 개신교 경건주의 시대에 이러한 정통주의 가르침은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점증되는 강조와 결합되었고, 그 시대의 찬송가에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정통주의 이념을 비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알베르 슈바이처는 H. S. 라이마루스(1694~1768)의 연구로부터 비평적 태도가 발전했다고 보지만, 라이마루스는 예수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다루었던 계몽주의 방식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의 책들은 다른 책들처럼 연구되어야 했고, 예수의 생애는 복음서들의 증언을 비평적으로 조사하고 숙고함으로써 그려져야 했다. 계몽주의는 복음서 기록들의 상대적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현대적 관심을 처음으로 일깨웠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계몽주의 비평의 대상은 두 본성교리가 아니고 대리적 대속교리라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 이념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지 않고, 기적,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포기했다. 그리스도교리사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 대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다.

19세기

비록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주의 가르침을 단절하는 시작이었지만, 19세기에 와서는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신학자 및 학자, 한동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D. F.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35)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63)는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 영향을 끼쳤다. 슈트라우스의 연구는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 가지고 있는 상(像)의 기초인(그가 '신화들'이라 부르는)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반면 르낭은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내부적·심리적 삶을 연구하여 예수의 경력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두 책은 널리 읽혀졌고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한 자료들이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되어야만 한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을 따랐고, 그들이 제시한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기 형태였다. 슈트라우스, 르낭과 더불어 19세기에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책들이 과잉 출판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의 문제에 대한 각기 새로운 가설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의 재건을 함축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연구의 근본적 전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이었다. 또다른 구분방식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대한 종교'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최상으로 인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형이상학적 진술 때문에 이 인식을 오해했고, 그래서 그 말씀의 본래적 단순성을 왜곡시켰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역사성을 의문시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역사문제에 대한 19세기 학문의 일반적 관심으로부터 성장했지만, 또한 그것은 신학자들의 종교적·윤리적 전제들을 반영했다. 그들 중 다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불변적인 것인가를 평가하는 데서는 칸트의 도덕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예수의 본래 말씀을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연관시키는 방법에서는 헤겔의 역사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세기 과학과 연관된 진화론과 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들은 성서의 기적들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 ~1931) 등의 교리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교리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본질, 즉 하느님의 아버지됨과 사람의 형제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그 개념과 용어에서 고대 그리스도론이 비그리스도교 자료에 의존되어 있다고 증명했다.

20세기

20세기초 〈신약성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관여했는데, 결국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예수는 그의 죽음 이후 곧 도래할 시대의 종말을 기대했었고, 복음서에 있는 그의 가르침들은 종말 이전의 짧은 기간 동안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중간 윤리'였다는 것이다. 현대생활에 이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위험한 현대화로 비판받았다.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철저한 종말론'의 주제는 요하네스 폰 바이스(1863~1914)에 의해 주장되었고, 알베르 슈바이처의 저작들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복음서들의 구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이 이론은 보통 양식비평(Formgeschichte)으로 불린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전전승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복음서 설화들의 양식(비유·말씀·기적이야기·수난내용)을 강조한다. 초기 학자들은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이 새로운 이론으로 복음서 기록들의 후기적 요소들로부터 진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비록 이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구분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지만, 양식비평의 연구는 철저한 종말론이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보편적 윤리를 성문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전기적(傳記的) 의미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양식비평의 지지자들은 예수 생애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틴 디벨리우스와 루돌프 불트만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회의주의를 수긍하지 않았다.

〈신약성서〉 연구에서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초기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개신교 교회들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계속 답습했으나, 〈신약성서〉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이 신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회들의 투쟁은 몇몇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고대 교리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 그들 중 몇몇은 교리를 덜 엄격하게 다루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위격·본질·본성의 정태적 범주들로 그 교리들을 조문화하는 것은, 존재상태보다는 행위와 사건을 강조하는 성서적 사고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개혁교회 전통의 카를 바르트, 성공회 전통의 라이오넬 손턴, 루터교 전통의 카를 하임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던 신학자들이다.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지지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카를 아담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 교리를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형식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보다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많은 개신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함으로써 예언자적 직무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사장적 직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유를 그의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재해석했던 구스타프 아울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새롭게 얻은 통찰력을 그리스도의 위격교리에 맞추기 위해 대속교리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연합·분열되는 요소가 되어왔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그들의 충성을 다양한 교리적·전례적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충성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 진술은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를 분열시켰던 원인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연관된 역사적·비평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들의 공식적 진술과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그런 탐구를 어느 한도까지 허락할 지는 각각 다르지만, 20세기 후반기에는 그런 탐구를 용납할 것을 시사했다. 다른 한편 1907~10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한 현대주의의 배척은 비판적 탐구방법을 신학적으로 사용할 때 이단이 되는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로마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상당히 비평적인 문헌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비평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G. Bornkamm J. J. Pelikan 글 | 尹哲昊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