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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은바리라이프 2009. 9. 8. 15:57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복음서들이 씌어지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말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성찰이 후기에 복음서의 단순한 말씀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초기 그리스도교도 공동체는 처음부터 증언과 예배에 참가했으며, 그 증언·예배의 형식이 복음서에 있는 설화 형식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에 대한 복음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숙고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 전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후자에 의해서라는 주장이 정당하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의 신앙이 구현되어 있는 〈신약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앙은 짧은 신앙고백이나 신조들 속에 구현되었지만, 본래의 완전한 형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책들 안에 있는 신앙고백들과 신조들의 단편이고,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문서들에서 취한 것들이며,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전례에 내포되어 있는 후기 형태의 신앙고백과 신조들의 단편이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후기 형태이며, 그 기원은 아마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사도신경은 초기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후기의 표현들이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다양한 표현과 형식 가운데서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믿었던 요점을 사도신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조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배행위의 일부였으며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서두에 "나는(또는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할 때, 그 선언이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 단순히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선재

"내가 믿습니다"라는 진술은 그리스도는 마땅히 예배받을 대상이며, 따라서 그는 하느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의 바울로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3단계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만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한 그의 선재(先在), 성육신과 겸허(히브 5 : 7), 부활로 시작하여 영원히 계속되는 그의 영화가 그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진술은 〈요한의 복음서〉 서문일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의 성육신으로 동일시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했고, 말씀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했다. 이 교리의 근거자료들은 필로나 팔레스타인 랍비들의 유대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 그 자료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요한의 로고스 교리는 로고스를 특수한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신약성서〉의 다른 저작들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 장도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했던 자이며, 따라서 시간과 탁월성에 있어서 창조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구별되는 독특한 자로 말한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의 '앞서'라는 말은 분명히 그의 시간적 선재성과 우월한 존엄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선재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단어와 개념을 발견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예배드리고 있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은 아마도 그런 예배에서 사용된 찬송으로부터 인용된 듯하다. 신학적인 성찰은 만일 이 예배가 합당하다면 그는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

신조의 본문이 만들어졌을 때 이것은 구세주에 대한 통상적인 지칭이었다. 본래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야훼가 구원한다' 또는 '야훼가 구원할 것이다'(마태 1 : 21)를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는 '메시아' 칭호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이었다.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칭호로 사용했지만(루가 24 : 26, Ⅱ 요한 7), 그 칭호가 매우 일찍부터 고유명사가 되었음을 바울로의 용례로부터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그것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였고,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사도 11 : 26).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라는 단어는 주님의 지상 경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례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도 예수라는 이름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약성서〉 내의 본문의 변형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가 거의 병용되었다. 현대에 와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관습적으로 예민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일부 집단들에서만 그러했다. 많은 교회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문구들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칭호에 대한 〈구약성서〉의 의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칭호가 어떻게 다른 형태가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의 진술이 그 예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그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몇몇 경우 복음서의 용법이 이스라엘과 참 신자의 특권으로서 신의 아들됨의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나 바울로와 같은 복음 전도자들은 이 명칭으로 어떤 특별한 영예를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예를 예수의 세례 이야기(마태 3 : 17) 및 변형(마태 17 : 5)과 연결시켰으며, 바울로는 부활 믿음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하느님의 아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선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후기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에 선재의 의미를 가미하게 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였는데, 여기서 '아들'은 영원한 2번째 위격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마태 28 : 19). 복음서들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다신교의 시도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 맞서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신앙고백했다.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자는 아들을 가질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관념과 정반대되는 것이며, '독생자'는 신의 출산에 대한 그리스 신화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4절에서 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표현은 사도교회가 예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루가는 그 칭호를 크리스마스 천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루가 2 : 11). '주'(키리오스)라는 칭호가 1세기 동안 사용된 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사용했던 그 칭호의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우주에 많은 신적인 그리고 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주(Ⅰ 고린 8 : 5~6)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유형화되었듯이 모든 사람의 주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것(묵시 17 : 14)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불렀던 〈구약성서〉의 계약의 하느님, 야훼가 새 계약을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로마 10 : 1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과 같이 키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가 대항했던 2가지 부류의 청중들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때로 이 명칭은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와 같이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냈으나, 〈구약성서〉를 반영하는 문장들에서 때때로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은 선재였다(마태 22 : 44). 점차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주'라는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성육신과 겸허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신조의 더 이른 형태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라고 읽혀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혹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요한 1 : 14). 선재와 성육신은 서로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가 인간이 되심을 말할 때 그의 선재를 전제하며 그를 선재하는 자로 말할 때에는 육신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보증하는 그녀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조는 또한 인성의 초자연적 기원을 의도했다. 바울로와 요한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사야〉 7장 14절에 근거한 예수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가르침은 1세기에는 널리 퍼져 있어서 〈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 신조는 〈루가의 복음서〉 1장 35절의 의역이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예수의 세례 및 부활과도 관련되었다.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이 신조의 특징은 복음서의 중요한 부분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조와 〈신약성서〉의 편지들, 특히 바울로의 편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유사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 수난 이야기에 할애되었다는 사실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조차 그가 말하고 행한 다른 어떤 것들보다 며칠간의 예수의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의 원인은 〈신약성서〉와 신조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인데, 그것은 곧 예수의 수난·죽음·부활 사건이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신앙이다. 복음서에서 이 사건들은 절정을 이룬다. 편지들은 그 사건들을 초기 교회의 구체적 상황들에 적용시켰다. 바울로가 십자가(필립 2 : 6~11)와 '그(예수)가 배반당하신 밤'(Ⅰ 고린 11 : 23)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서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불려온 것과 이와 연관된 사건들을 교회가 기념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일부는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또다른 일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헌신적인 삶에서 수난사건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십자가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에 영향을 끼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의 대답은 다양한 은유들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드렸고,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양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인류를 살렸다. 그의 고난은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을 위한 모범이었으며, 그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의 죽음은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사의 주요한 대속(代贖) 이론을 예시한다. 〈신약성서〉는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Ⅱ 고린 5 : 19)라는 내용을 상징하기 위해 이 은유들을 사용했다.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이 구절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신조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서 이 신조의 근거는 갇혀 있는 영들에게 그리스도가 설교했다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3장 18~20절의 내용이다. 본래 지옥으로 내려감은 아마 그리스도의 죽음, 즉 그가 지하의 죽은자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와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조에 들어오기 이전에, 하강은 서방 가톨릭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연옥(limbo patrum)으로 불리는 지하세계로부터 〈구약성서〉의 신실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몇몇 교부들은 지옥으로 내려감을 지옥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요성이 계속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내려감의 교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설교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되지는 못했다.

 

영화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할 내용으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단언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를 말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3종류의 확증을 위한 근거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로마 1 : 4)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방식이었다. 부활은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소망의 근거였다(Ⅰ 데살 4 : 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로마 6 : 4)을 나타내며, "천상의 것들을 추구"(골로 3 : 1)하라는 훈계의 근거였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에 나오는 바울로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부활을 합리화하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의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과 복음서와 바울로 편지 간의 차이점들은 부활의 내용에 대해 다양한 전승이 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들은 다양한 전승들 속에서 얼마나 부활 신앙이 보편적이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승천 이야기는 특별히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에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승천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0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는 바울로가 부활을 승천과 동일시했다고 주장한다. 성부의 우편 착석은 분명히 〈시편〉 110편 1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위치로 그리스도가 고양(또는 선재교리에 대한 확증)된 것을 의미한다. 승천과 착석은 부활과 재림의 중간 시기 동안 성부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현존방식이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6절에 의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또다른 그리스도 교리, 즉 그리스도가 아직도 그의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함께 현존하고 있다는 믿음과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실 이것은 승천 교리를 부활 교리와 조화시켜 말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재림교리로서 그리스도론 부분을 결론짓는다. 초림은 육체로 온 것이고, 재림은 영광 가운데 오는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 이 교리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 많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예수가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잘못 기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로가 종말을 세상 끝날로 지연·조정하려고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으며, 〈요한의 복음서〉 는 더 진보된 단계로 본다. 예수가 보았듯이 종말의 임박성이 인간 역사의 지속적인 국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그 임박성의 진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지속적 현존에 대한 믿음은 사도교회의 전망에 속했고, 이것이 사도신경이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51~52절과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5~17절의 요약이다.

그리스도의 영화에 대한 신앙고백을 완성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에 대한 그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라는 선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고 믿었던 것에 기초한 사도교회의 기대였다.

 

고대 공의회의 그리스도 교리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정통 그리스도교의 주된 노선은 〈신약성서〉와 고대 신조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것이 교리로서 정식화되었을 때 그리스도교 신조가 되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처음 4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즉 그와 성부와의 관계, 신성과 인성의 관계의 정식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정식화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믿고 고백하던 것을 위협하는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생겼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와 이에 대항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부분이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초기 이단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인격과 사명을 오해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다. 〈신약성서〉와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은 그러한 오해를 지적하고 그것에 응답했다. 비유대 세계로부터 지지자들을 모은 그리스도 운동인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오해는 그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관심에서 일부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보통 사람인 나자렛 예수가 세례의 순간에, 또는 부활 이후에 하느님의 양자로 채택되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양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본래 악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질세계와의 관계에서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현적이고 실제가 아닌 몸만을 가졌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가현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다루었다. 어떤 초기 견해들은 성부와의 동일성을 너무 의도적으로 주장하여 위격의 구별이 상실되었고, 그는 단순히 하느님의 한 현시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자기 현시의 '양태'로 보기 때문에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양태론자'라고 불리거나 초기 주창자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주의자'라고 불렸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다른 해석들은 극단적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게 성부와 그의 위격을 구분하여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켰다. 로고스 교리의 초기 대표자들은 종속론자들이어서 로고스 개념 자체가 어떤 분파에서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성부와의 하나됨과 성부로부터의 구별에 대한 교리를 정교하게 표현할 개념의 틀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하느님과 재연합시켰던 신은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최고 신과 동일한가? 혹은 그는 반신인가?"라는 질문(아돌프 폰 하르나크)에 대답해야만 했다.

니케아 공의회

위의 물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들을 통해 교회에 제기되었다. 그는 로고스가 피조물 중에 처음이고, 하느님에 의해 대리자 또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어, 하느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따라서 하느님보다 열등하고 사람보다는 우월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지만 하느님은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위협하는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회심(回心)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했다. 참석한 주교들의 개인적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으나, 주된 의견은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 젊은 사제 아타나시우스가 주창한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만들어지지 않고 낳아졌으며' 따라서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였다고 결정했다. 또한 그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 to patri)이라고 결정되었다.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종속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니케아 공의회와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양태론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한 것은 성부가 아니고 성령도 아니며 오직 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성삼위일체의 위격들에 대한 더 분명한 용어가 필요했으며, 그런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대해 더 명료한 진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논쟁들을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쟁거리를 각 분파에게 주었다. 교리적 논쟁은 니케아에서 시작된 황제의 정치적 개입과 서로 숙적관계에 있는 주교 및 신학자들에 의해 복잡해졌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논쟁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진술이 나왔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를 적절히 구별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난에 대해 니케아 신조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4세기 중반 니케아 정통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 발전시킨 용어들을 명백히 공식화했다. 즉 하나의 본질, 3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인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구별되지만 그들의 영원성과 능력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양태론이라는 의심을 야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교리로 하느님의 통일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교회가 직면했던 두 논제 중 처음 것, 즉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제공했으며, 2번째 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료화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여기서는 정통주의 집단들로부터 몇 개의 극단적인 입장들을 배제하고 4세기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계속된 토론과정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토론거리를 제공했는데, 왜냐하면 5세기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서 성부·성자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인성과의 관계를 유비(類比)로써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는 '본성'(physis)이었다. 하나의 본질에는 3가지 위격이 있었다(4세기 논쟁의 결과였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하나는 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두 본성이 있었다. 이 두 본성간의 관계에 대해 5세기 신학자들은 논쟁했다.

당파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반세기 동안 몇 개의 주요강조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특징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대적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흡수시킨다고 비난했다. 한편 안티오크에서 사용한 사상과 언어 양식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안티오크 학파가 개별적인 성격을 주장하는 두 인격들로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서방신학은 이러한 두 대안들과 같이 추상적이지 않았다. 이 신학의 주된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실제적 관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을 희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4세기가 지나서도 황제는 항상 화해하는 행위에 참여했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나라들은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결정은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공의회의 결정은 그들의 정치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교회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와의 갈등은 네스토리우스가 '하느님의 어머니' 혹은 더욱 문자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자'(Theotokos)라는 명칭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녀는 오직 '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주장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러한 주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구분한 안티오크 학파의 주장이 모든 교회로 흘러들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위격을 나누고 있다고 비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위격을 완전히 연합시켰는데, 그들의 입장은 키릴루스의 유명한 구절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으로 표현된다. 이 구절로 보아 키릴루스가 의미하는 바는 성육신 이전에는 오직 한 본성인 신성이 있었고, 성육신 이후에는 한 인격 안에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된 두 본성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본성은 결코 독립된 실존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성육신 이후에도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이 있었다고 키릴루스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는 정교한 표현으로 이 내용을 피했다. 431년의 에페소스 공의회는 각 계파에서 몇 사람씩 모여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러나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는 실제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해결의 기초는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에서 조문화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에 대한 서방의 이해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우리는 모두 일치하여 가르친다……하나이며, 동일한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 완전하고 인성도 완전하며……혼합되거나 변질되거나 나뉘거나 혹은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을 지니며, 본성들 사이의 구분은 결코 연합을 통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존재로 협력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문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가 강조하는 것들이 표현되었는데, 인격의 통일성과 본성들의 구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교리에 대한 기본적 진술이 되었다. 서방교회측은 그리스도의 사역교리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동방교회측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는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논쟁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칼케돈을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충돌했다.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논쟁은 칼케돈의 해석을 명료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극단들은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이 정죄되었듯이 정죄되었다.

이러한 모든 신학적 토론에서 나오는 것은 위격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성과 인성과의 일치성을 확언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해석이었다. 흥미롭게도 교회의 전례는 교회의 신학자들이 진술의 명료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 때 이 해석을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교회의 전례 초기부터 현존했었던 것에 대해 재진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조문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