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

은바리라이프 2009. 8. 21. 09:02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

바울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행 22:3). 그가 회심한 것은 대략 서기 35년 경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에게서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기원 31년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행 22:3 표준 새번역)으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에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행 26:9)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밝은 빛 가운데 계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원고 9, 1898)습니다. 바울은 비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대적의 편에 서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심하였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침례를 받은 후(행 9:18)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을 지내다가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못하고 15일 간 머물다가, 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돌아가(갈 1:17-21) 6년을 지내게 됩니다.

한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안디옥에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행 11:21)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식 목회자로 바나바를 파송하였습니다. 안디옥에 도착하여 사실을 확인한 바나바는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다소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1년 동안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그 결과 처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11:19-26).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이 거둔 예루살렘 구제금을 전달하고 고린도교회로 돌아온 후(행 12:25) 교회의 경건한 몇 지도자들과 함께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 사람에게 안수한 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때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행 13:47)는 사명을 받았으며, 바울은 이것을 자신을 “이방인에게 사도”(갈 2:8)로 삼으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로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을 때, 바울은 매우 근심하였습니다. 그러한 도전은 그가 사도의 이름으로 가르친 교훈들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두 편지 서두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전?후 1:1)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육체대로만 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만 말한다면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외모, 그분의 하신 일을 여러분은 자세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수년 전, 충남에 있는 수덕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덕사 입구를 들어서는데 한 커다란 광고문이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가 모셔져 있는데 얼마 후에는 탑 안에 영원히 봉안하게 됨으로 그 전에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한 스님의 안내를 받아 법당 안에 들어가 그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리는 법당 맨 앞에 별도로 만들어진 유리 상자 안에 정중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사리의 크기는 제 주먹만 했고, 수정같이 맑은 것이 전등의 불빛을 받아 무지개 빛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에 텔레비전이나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리를 본 적이 있었지만 대개 콩알이나 좁쌀 만한 것들이었고 색깔도 매우 탁한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미심쩍어서 옆에 스님이 계신 것도 잊고, “진짜 사리맞나?”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아니, 지금 뭘보고 계세요? 저것은 사리를 모신 유리 구슬입니다. 그 구슬 위를 잘 보세요. 약간 홈이 파진 것이 보이지요? 그 안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안경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유리에 막혀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고양이처럼 실눈을 뜨고 유리 위를 노려보아야 했습니다. 아, 저는 그곳에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가물거리긴 했지만 정말 깨알 만한 크기의 사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여, 저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본 것입니다. 그 사리는 2,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부처님의 존재를 제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저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장례 지냈던 무덤에 가던 날, 저는 벅찬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님께서 3일간 누워 계셨던 바로 그 무덤을 본다니! 그러나 그날 저희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곳을 두 곳이나 방문해야 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에 의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에 갔습니다. 커다란 교회 안에 돌로 만들어진 무덤이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이게 과연 진짜 그 무덤일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일행 모두가 떨떠름한 표정이었습니다. 안내인은 다시 “정원 무덤”이라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니 산 모양이 정말 골고다(해골)같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야! 여기가 진짜인 것 같다.”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기원 1세기 경의 무덤 형태가 잘 보존된 인공 동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대를 가지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도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무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깨알 만한 사리라도 하나 있든지 해야 무슨 감동이 있을 텐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실망도 되고 약간 화도 나서 투덜거리며 입구 쪽으로 걸어나왔습니다. 저는 그 때,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한 글귀가 무덤 문짝에 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마 28:6).

아! 여러분이 그 때 거기 계셨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 글귀 앞에 벅찬 감동을 느끼며 한참을 서있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지! 내가 믿는 예수님은 살아나셨지!! 살아나신 분에게 무슨 사리가 있어! 무덤은 또 무슨 소용이 있고? 아, 저는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종교들마다 창시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무덤이나 유품이나 유골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조차 죽음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지금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계 1:17, 18; 요 11:25, 26)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창시자가 살아 계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백성들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지상에 계셨던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히 2:9)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히 1:3)으며, 이제는 “영광의 몸의 형체”(빌 3:21)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바로 이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비록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님은 잘 알지 못했지만,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예수님께 직접 배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고후 12:1-4). 그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7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 12)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그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분께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배우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그리스도도 육체대로만 알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고전 15:14)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우리 믿음도 헛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치있는 것은 예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과연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 나는 성경의 예수님 뿐 아니라, 내가 실제로 만난 영광의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 재림마을 -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