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교 사회에서의 개신교와 국가권력
한국종교학회 '불교와 기독교, 갈등과 충돌' 주제로 학술대회 개최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모든 다원주의적인 상황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들의 세부적인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든 간에 탈 독점적인 종교적 기업들이 고객집단의 충성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권위있게 부과할 수 있었던 종교적 전통을 이제는 시장에 내어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구매”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고객들에게 “판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원주의적인 상황은 무엇보다도 시장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기관은 매매기관이 되며, 종교적 전통은 소비자상품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쨌든 많은 종교활동이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된다.
문제제기 : 종교와 국가권력
최근 한국사회에 종교 편향이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특정종교에 편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것은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다행히도 종교간의 큰 갈등이 없이 발전하여 왔다. 이것은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특정종교를 지원하고, 여기에 다른 종교가 차별을 느낀다면 대한민국은 이념갈등, 지역갈등 못지않게 또 다른 심각한 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종교학회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사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은 우리 한국사회에 낯선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의 가장 밑바탕에는 종교가 있으며, 그 종교를 기반으로 사회는 통합되어 왔다. 종교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초가 되어 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헌법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와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였고, 그것은 별 이론(異論)이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과연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이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앞으로 더욱 토론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오늘 필자는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복음주의가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이슈는 국가권력이 여러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특정 종교를 지원하고, 또한 특정 종교가 국가권력을 이용하려 한다면 이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주의는 다종교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둘째, 한국 개신교는 국가로부터 편향적인 지원을 받아 왔는가? 셋째, 현재 개신교는 한국사회로부터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필자는 첫번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근대복음주의의 역사를 개괄할 것이며, 두번째 문제를 위해서 근대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개신교와 국가권력의 관계를 살펴 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번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최근에 이슈가 되는 여러 문제들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를 공장하게 다루기 위해서 비교연구를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비교연구를 통해서만 편향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I. 서구 기독교사회의 변화와 개신교 복음주의
1. 존 로크와 관용령
오랫동안 서구사회는 기독교에 근거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영국에서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영국은 성공회, 천주교, 청교도 가운데 무엇을 사회의 근본으로 삼을까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성공회가 영국 국교회가 되었다가 천주교가 여기에 대해서 도전하였고, 다음에는 청교도가 여기에 가세했다. 영국의 기독교가 분열함에 따라서 영국 사회가 분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여기에 대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 1689년에 만들어진 관용령이다. 이 관용령에 의하면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이지만 청교도에게도 관용이 주어지며, 천주교는 여기에서 예외이다.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이다.
이 관용령의 이론적인 배경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존 로크이다. 존 로크는 종교를 사회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사회의 기초는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 상호간에 맺는 계약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 사회의 근간은 영국인들이 오래 동안 믿어오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 왕과 시민의 대표인 의회가 맺는 조약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 사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세속사회에서 국가의 종교에 관한 임무는 과거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과거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의 영적인 복지를 진작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책임자는 바른 종교를 선택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국가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국가의 왕과 종교의 감독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게 된다. 왕이 없는 곳에 감독이 없는 것이다(No king no bishop).
하지만 존 로크는 국가가 이런 임무를 감당하면 안 된다고 본다. 로크는 여기에 대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시민정부는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시민은 국가에 이런 종교적인 임무를 맡기지 않았고, 둘째, 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곳인데, 세속정부는 이런 것을 맡을 자격이 없으며, 셋째, 일반 정부는 항상 강제력을 통해서 업무를 추진하는데, 영적인 문제는 이런 강제력을 통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로크의 사상은 유럽의 역사에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이 세속사회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종교는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로크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자발적인 공동체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종교공동체는 국가와는 다르다. 사람이 어떤 민족으로 태어나는가와 어떤 신앙을 갖는가는 전연 다른 문제다. 예를 들면, 영국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영국 시민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영국 시민이 태어날 때부터 영국 국교회 신자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국 국교회 신자가 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공동체는 국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서 참여한 신자들의 결정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크에 의하면, 국가는 어떤 특정 공동체의 결정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로크는, 종교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반 시민의 영역으로 확대될 때, 국가가 그것을 제한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종교의 관용은 종교에 관한 부분에만 국한되며, 그 이상의 범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종교를 가졌다고 시민적인 자유와 재산상의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아울러서 성직자가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세속적인 영역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면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종교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더 이상 국가의 강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종교는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설득이다. 이제 종교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설득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임을 입증해야 한다. 설득의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도덕이며, 다른 하나는 기적이다. 로크는 더 이상 강제적인 힘이 없는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 한 단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타락한 종교를 참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울러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기적을 찾는다.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는 것과 관련하여 참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부활이라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서구국가의 세속화는 인류역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어떤 특정종교에 기반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 것이다. 필자는 이런 세속국가가 기독교사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독교사회는 이런 세속화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종교 문제에 국가가 직접 간여하지 않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그 결과 기독교사회에서는 타종교의 신앙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이슬람이나 불교 국가와 비교할 때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슬람이나 불교 국가는 세속국가가 아니다. 그 국가들의 기초는 종교이며, 따라서 타종교에 관용을 베풀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사회는 비록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강한 나라이지만 그 국가의 기초를 종교에 두지 않는다. 그 결과 국가가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대하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가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개신교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는 개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국가의 힘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과거 카톨릭이나, 성공회와 같이 국가교회의 전통을 갖고 있는 교회는 종교의 전파에 있어서 국가의 힘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근대 복음주의 개신교는 개종을 위해서 국가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다수인 국가는 불교 국가나 이슬람국가와는 달리 다른 종교에 대해서 국가의 힘으로 간섭하지는 않는다.
2. 정교분리와 복음주의 개신교의 등장
근대 복음주의는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출발하였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종교선택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가 되었고, 이제는 이런 강제력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종교를 유지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이것을 미국의 유명한 교회사가인 시드니 미드(Sidney Mead)는 "강요에서 설득으로"(from coercion to persuasion) 종교의 구조가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새로운 종교구조를 교회가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여전히 정부의 권위에 의해서, 유아세례에 의해서, 사회 구성원의 의무에 기초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보다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부흥사들이다. 부흥사들은 신앙은 국가나 사회의 강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이것이 없이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존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경험한 종교체험이며, 그는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강조하였다. 부흥사들은 종교의 위치는 마음이며, 그래서 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보았다. 만일 종교의 위치가 마음이라면 국가는 개개인의 마음을 통치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다루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부흥사들인 것이다.
부흥사들은 더이상 강요로 신자를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선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부흥사들은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한 설교를 했으며, 이것을 노래를 통해서 전달하였고, 때로 연극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자들이 학문적인 언어로 된 지루한 원고설교를 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이것은 설교가 이루어지는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분명하다. 부흥사들은 대중들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갔으며, 전통적인 날짜와 관계없이 대중들이 편리한 시간을 택하였다. 이것은 설교의 내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흥사들은 복잡한 교리를 말하기보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단순화해서 전한다. 이것은 다같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이후 종교의 문제를 더이상 국가의 권력에 의지할 수 없을 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방법들이다. 부흥운동으로 대별되는 개신교 복음주의는 이렇게 대중들을 설득하는 수많은 방법들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권력에 의존해서 포교하는 종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부흥운동의 등장과 함께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은 교파의 등장이다. 국가가 어떤 특정 종교에 기초하지 않게 되었을 때, 자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다양한 교파이다. 과거의 국가들은 어떤 특정 신앙을 국교로 정했고, 그 외의 것은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국가는 이단을 박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더 이상 특정종교에 특권을 주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신앙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종교시장의 형성이다. 다양한 종교들은 자신의 교리와 예배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어떤 종교가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어떤 종교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 또 얼마나 잘 설득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런 종교시장이 형성된 가장 큰 원인은 미국 독립 당시에 여러 교파들이 다같이 비슷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영국의 지배는 영국 국교회의 지배이고, 이것은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게는 분명한 불이익이기 때문에 미국 개신교는 나라를 위해서 싸웠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서도 싸웠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다음에 미국의 주요 교파들은 자신들의 교파가 국교회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떤 교파도 자신들의 교파를 국교로 만들만큼 강하지 못했다. 따라서 결국에는 어떤 교파도 국가로부터 특별한 특권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의 정교분리가 성립된 것이었다. 이것은 로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18세기 말 미국의 종교상황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이다. 이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하면 미국의회는 국교를 만드는 법도, 또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금지하는 법도 만들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이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문제를 국가의 영역이 아닌 사적인 영역으로 옮긴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법학자의 하나인 데이비드 필드(David F. Filed)는 이런 정교분리는 미국이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만든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인간과 그의 창조주의 관계는 사적인 관계이며, 이 관계에 대해서 어떤 다른 사람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조직된 법률 가운데 명백히 표현한 첫번째 나라”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국교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에 특권을 주는 것을 금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종교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종교시장에 들어서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종교시장에서 어떤 종교도 국가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의 미국 종교는 그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신앙행위에 의해서 성장하든지, 쇠퇴하든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새로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믿는 것을 설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것이 개신교 복음주의가 갖고 있는 전도전략인 것이다.
3. 서구 기독교의 선교와 개신교 복음주의
근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국가가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 하는 것은 선교의 방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정교의 분리를 분명한 원칙으로 하고 있는 미국과 그렇지 않은 러시아나 유럽 국가들의 선교정책을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정교분리가 확립된 나라에서는 선교는 사적인 일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적인 사업이 아니었고,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선교는 공적인 일이며, 이것은 국가적인 사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교를 보호하는 일차적인 경우를 프랑스의 천주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주교는 원래 정교일치의 사회였다. 그래서 천주교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은 곧 천주교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러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계승한 것이 바로 프랑스이다. 사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반 천주교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해외에서 프랑스는 강력한 천주교 보호정책을 썼던 것이다. 프랑스는 자국의 천주교 선교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천주교 선교사까지 보호하겠다고 나서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는 이런 국가의 보호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러시아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러시아 황제는 러시아정교회의 대표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는 곧 러시아제국 확장의 일부였다. 우리는 이것을 러시아의 한국 선교에서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조선에 러시아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97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칙령으로 명령한 것을 출발로 하고 있다. 이 칙령에 의해서 러시아정교회 공의회는 조선선교를 결의했다. 따라서 당연히 러시아 선교는 러시아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러시아 대사관은 정교회의 부지 확보뿐만 아니라 신자 확보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같은 러시아정교회의 정교유착은 한국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영국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회이지만 이미 17세기 말부터 관용령이 통과되어 타 신앙에 대해서 관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성공회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는 차별이 존재했다. 이것이 폐지된 것이 19세기 중엽이다. 이와 같은 것이 영국의 선교정책에도 반영된다. 영국은 영국인에게 영국국교회인 성공회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영국이 1858년 인도를 직접지배하면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우리의 신념을 우리 신민 중 누구에게 강요하려는 권리와 욕망을 다같이 포기한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이나 관례 때문에 총애를 받든지, 또는 성가신 일을 당하거나 불안을 당하게 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모두가 다같이 법 앞에 평등하고, 차별 없는 보호를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국왕이 뜻하는 바이며, 기쁨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영국의 통치가 기독교 선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적어도 영국은 인도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불이익이 되지 않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영국 사회에서 주장하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다. 이것은 선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교분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미국의 선교는 어떠한가? 미국은 선교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의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다른 나라와 국교를 수립할 때, 미국은 다른 나라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기하였다. 미국은 1854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에도 이 원칙을 지켰고, 필리핀을 점령하였을 때에도 이 원칙을 지켰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원칙과 아울러서 미국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이다. 따라서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도 자국민의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아울러서 현지인에게도 가능한 대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복음주의 개신교는 이와 같은 자유로운 종교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왔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사실 종교개혁 좌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국가의 도움보다도 국가의 박해를 받아왔다. 이런 복음주의적인 개신교가 국가에 요구한 것은 국가의 도움이 아니라 어떤 종교든지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런 복음주의의 요구에 맞게 국내적으로도 종교시장을 개편하였고, 국제적으로도 이런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여 왔다.
그러면 복음주의가 이런 새로운 종교시장에 맞게 자신을 새롭게 적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주의는 대중에게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종교를 설명하는 방법을 배웠고(기독교의 기본진리), 복음주의는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였고(토착언어 사용), 대중들이 좋아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찬송가), 이것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지성보다는 감정),이것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선교사)을 양성하였다. 선교를 국가의 힘에 의지하는 천주교나 정교회보다,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자유로운 종교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욱 잘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II. 한국의 종교시장과 타종교
1. 개항기 한국의 종교상황과 개신교 선교
정교분리는 조선사회에서는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 국가였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종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조선에서 이런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갑오경장의 시행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유교사회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유교는 조선의 국교였고, 유교의식은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였다. 이것은 대한제국이 양력을 채용하면서도 음력을 사용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즉 음력은 유교의 제례에 필요했으며, 대한제국은 이 음력을 중심으로 한 유교 제례를 충실하게 지켰다. 대한제국은 황제를 제관으로 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유교 국가였다. 하늘에 드리는 제사는 중국의 천자만이 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이 그런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속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간 대한제국은 여전히 유교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유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유교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동안 불교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조선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본은 조선에 일본불교를 이식하려고 했다. 우선 일본이 한 것은 불교에 대한 차별철폐이다. 1895년 조선정부는 일본 불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도성에 들어 올 수 있도록 입성해금(入城解禁)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전통종교의 재건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정부는 조선불교를 모두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고,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두어 조선불교의 총본사로 삼아 조선불교가 국가의 종교정책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교가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간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불교계는 이것을 환영하였다. 과거 사적인 종교에서 이제 공적인 종교로 격상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유교나 불교는 정교분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국가 권력에서 자유로운 종교라는 개념을 갖지 못하였다. 이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천주교는 거꾸로 프랑스의 권세를 빌려서 선교하려고 하였다. 원래 황사영백서를 통하여 서구 세력의 힘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던 천주교는 1886년 조불조약을 맺은 후, 프랑스의 권세를 의지하여 선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조선정부를 무시하였고, 그래서 천주교신자들은 관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천주교신자들은 개신교신자들이 성당 건축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황해도지방에서 특히 심했고, 제주도에서도 큰 사건으로 나타났다. 이런 갈등이 일어나다가 1904년 프랑스와 대한제국 사이에 조약을 맺어 선교사는 한국인에게 천주교를 강요하지 못하며, 정부는 천주교신부에게 선교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개항기 한국사회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다종교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당시 한국사회에 어떤 종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교는 쇠퇴하고 있었고, 불교는 새로운 대안이 못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은 바로 이런 종교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등장하였지만 여전히 외국의 종교였다. 이런 다종교적인 상황이 한국에 종교시장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에 가서는 정교의 분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정교의 분리는 어떤 한 종교가 그 사회를 독점하지 못할 때 생긴다. 한국에서의 정교분리는 궁극적으로 이런 다종교상황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개화파지도자인 박영효의 상소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1888년 고종에게 보낸 상소에서 “모름지기 종교는 백성에게 맡겨 자유롭게 신봉하게 하고, 정부가 관여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자고로 종교로 관련된 쟁론으로 말미암아 인심이 동요되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사람목숨을 해치는 일이 수로 셀 수가 없으니 가히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복음주의적인 개신교는 어떻게 선교하였을까? 무엇보다도 개신교는 국가권력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의 개신교선교가 주로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미국은 이미 정교분리의 사회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모든 국가들 가운데 종교 문제에 대해서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종교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인식했으며, 미국 공사가 선교사들을 도왔을 때에도 그들이 선교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시민이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없이는 참 신자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힘으로 선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개신교가 이런 탈 권력적인 종교를 지향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한때 조선정부는 개신교를 국교로 삼을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박영효는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개신교를 국교로 삼을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박영효는 조선이 개화되려면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광범과 선교사들은 이것을 반대하고, 단지 신앙의 자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헐버트도 고종이 선교사들에게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언더우드도 정부의 관계자들이 장로교회를 국교로 하는 것에 대해서 제안하기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선교사들의 반응은 진정한 신앙은 국가의 권력에 의존하여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요구하였던 것은 신앙의 자유이지, 기독교에 대한 특혜가 아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원했던 것은 기독교에 대한 국가의 혜택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이 믿는 바를 전할 수 있는 선교의 자유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전하는 종교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접근하였다. 선교사들은 권력을 가진 한국의 지배계층보다는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여성과 보통사람들에게 접근하였다. 한국장로교회가 받아들인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의하면 선교사는 천주교와는 달리 국가의 법적인 소송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조선정부는 끝까지 개신교에게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적이 없다. 조선정부가 개신교를 용인한 것은 이미 개신교가 널리 받아들여져서 더 이상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는 이 같은 종교시장에 어떻게 자신이 믿는 바를 잘 전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본다.
2. 일제시대의 종교와 개신교
일제의 통치는 한국의 종교지형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일본이 비록 서양문명을 받아들였지만 일본이 서양의 정교분리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천황을 국체로 하는 종교공동체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국가의 제도적인 틀 안에서 인정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의미의 종교자유는 아니었다. 일본은 신도, 불교, 기독교는 공인종교로 인정하고, 유교는 교육기관으로 분류하여 일제의 통치를 돕게 하였고, 천도교와 무속신앙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종교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제시대의 종교의 특성은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일본은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조선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우선 불교보호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불교로서는 기쁨의 소식이었다. 총독부는 사찰령을 만들어서 전국의 불교조직을 장악하였으며, 막대한 보조금으로 사찰을 수리하게 하였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국보로 지정하여 보호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종교편향으로 이해되어졌고,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해서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당시 불교인들에게는 불교를 살리는 길이라고 인식되어졌지만 사실은 불교를 일본화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유교에도 같은 정책을 사용하였다. 사실 갑오경장 이후 유교는 매우 침체해 있었다. 총독부는 이런 유교에 막대한 자금을 뿌려가며 유교를 친일세력으로 만들었다. 한일합방 당시 총독부는 유생들의 행동이 “충량한 신민의 모범으로서 존경할 만”하다고 해서 전국의 유생, 효자 등, 유교의 가치를 지켜온 사람들을 3,209명에게 천황의 하사선물을 주었고,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바꿔서 그 책임자를 총독이 직접 임명하고, 후원하였다. 일제시대 유교는 종교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으로 분류되었다. 아울러서 총독부는 시들어 가는 시골의 향교와 서당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교는 총독부을 받아 유지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불교나 유교는 이런 조치를 환영하였다. 박승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런 종교의 국가적 공인화의 움직임에 가장 크게 환영한 측은 조선조 아래에서 도성출입마저 금지당해온 불교계와 조선조의 지배이념이면서도 결국은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던 현실에서 민중들로부터 외면 당해온 유교계였다. 일제는 한말의 복잡한 정세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던 두 종교를 먼저 자신들의 통치정책에 긴요한 국민교화단체로 만들기를 원했다."
물론 불교나 유교에 대한 이런 보호정책이 진정으로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통제하였으며, 일부 지도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위에서 보는 대로, 조선총독부는 불교와 유교에게 자유는 주었지만 정교분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조선정부가 하는 대로 불교와 유교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러면 서양종교는 어떠한가?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와 유교는 이 땅의 종교였으며, 따라서 조선정부가 통제할 수 있었음에 비해서 서양종교는 근본적으로 서양인이 와서 선교하였고, 그 종교에 관한 통제권도 서양인에게 있었다. 즉, 서양종교는 근본적으로 조선정부의 통제권 밖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서양종교에 대해서는 총독부는 정교분리를 주장하여 자신들의 통치에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먼저 천주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천주교는 근본적으로 서양 종교였으며, 프랑스 선교회의 관할아래 있었다. 총독부는 천주교에게 정교분리를 요구하였고, 천주교는 총독부에게 선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원했다. 조선천주교는 총독부가 제시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고, 가능한 대로 일제와 마찰을 피하였다. 그 결과 천주교는 일제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정교분리의 입장은 천주교신자로 하여금 3.1 운동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천주교는 신사참배문제를 일찍이 용인하게 만들었고, 아울러서 일제 말, 조선천주교와 일본천주교를 합치는 데에도 같은 노력을 기울여서 조선교구에 일본인 주교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조선천주교는 가능한 대로 일본의 조선통치에 협력하였다.
같은 서양종교이지만 개신교는 천주교와 약간 다른 길을 걸었다. 일제는 처음부터 개신교에 대해서 회유와 경계의 양면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토는 처음 총독이 되었을 때부터 개신교선교사들을 회유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개신교가 일본 통치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개신교를 의혹의 눈초리로 보았으며, 개신교가, 천주교를 포함하여 자신들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신교와 총독부는 기회가 있는 대로 마찰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서 기독교지도자를 박멸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일합방 직후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취했던 정책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유교와 불교는 총독부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개신교는 강한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일제에 의해서 공인된 종교이지만 3.1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실 공인된 종교 가운데서 일제와 대항한 종교는 개신교가 가장 강력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천도교는 일제시대 공인된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천도교는 일제에 의해서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개신교는 일제시대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총독부와 싸웠다. 첫번째의 경우, 1915년에 제정된 개정사립학교 규칙이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학교를 세워 종교를 가르쳤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학교교육과 종교교육은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볼 때, 교육은 국가의 영역이며, 따라서 교과과정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과과정에 의하면 성경과 종교의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법으로 이것을 금하였다. 이것이 개정사립학교규칙이다. 여기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사립학교는 설립의 이념을 갖고 있고, 이런 법률은 이것을 규제하는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그 결과 삼일운동이후, 소위 문화 통치 기간에 각종학교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타협안이 나왔다. 이것은 종교교육에 관한 논쟁의 시초이다.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에는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선교의 자유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천주교에도 사립학교가 있었으나 천주교는 개신교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종교법제정에 대한 반대이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종교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종교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자유와 대립된다고 하여 실패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이것이 다시금 시도되었다. 종교법의 내용은 종교교사의 자격을 규정하는 것이며, 종교를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며, 이것을 어겼을 경우에 부과할 수 있는 벌금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다 할 반대가 없었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런 법이 종교의 자유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해서 여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이 법은 결국 1939년 통과되었다.
세번째는 신사참배문제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신도를 국가신도로 승격시키고, 이것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려고 하였고, 이것을 조선에까지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이같은 신사참배는 한국의 전통종교에서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것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즉 개신교와 천주교는 처음에 이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이것이 완화되었다. 먼저 천주교는 1936년 신사참배 허용훈령이 있었는데, 신사는 국민의례이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다. 이어서 개신교도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이 신사참배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된 교단은 바로 장로교회였다. 1938년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열린 장로교총회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비록 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고 할지라도 한국교회 내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주기철목사와 같은 순교자도 나왔다.
우리가 이상에서 살펴보듯이 일제시대 총독부의 종교정책은 매우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은 전통종교인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는 보호정책을 사용했으며, 기독교는 견제정책을 사용했고, 민족종교는 탄압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의 통치목적에 따라 종교를 통치했다. 특별이 일본은 불교에 많은 혜택을 주면서 또한 자신들의 통치를 이용하면서 지배하였다. 그래서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이 불교를 이용해서 기독교를 견제한다고 생각하였다. 천도교는 불법집단으로 간주되어 점점 쇠퇴하는 길을 걸었다. 기독교는 서양세력 때문에 노골적인 탄압은 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천주교와 개신교는 가능한대로 일제와 갈등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신교는 몇 가지 경우에 일본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제시대의 종교시장은 공평하지 않았다.
4. 해방 후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개신교
일제 통치에서의 해방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승리로 이루어졌다. 1945년 9월 7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 제 1회에서 “조선점령의 목적이 조선인의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이라고 공포하고 있다. 이미 미군정은 “종교를 포함한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군정의 기본이며, 피점령국의 종교에 방해는 말할 것도 없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조선의 역사에서 최초로 정교분리를 국가권력이 명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인은 일제시대에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이것은 종교상의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그래서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여 제일처음 행한 것은 38선 이남의 모든 신궁을 해체하고, 불태웠으며, 이어서 신사도 소각하도록 명령하였다. 미군은 조선을 일본신사라는 강요된 종교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사실 일본은 신사참배라는 국가종교를 통하여 조선을 통치한 것이다. 따라서 신사의 해체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군정은 1949년 10월 군정법령 11호에서 1925년 제정되었던 치안유지법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종족, 국적, 신앙, 또는 정치사상의 이유로 차별”을 하는 모든 법을 폐지한다고 되어있다. 이같은 조처에 의해서 일제시대 차별받던 민족종교도 이제 합법적인 종교로 대우를 받게 되어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해방은 이같은 민족종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종교와 증산교 같은 민족종교가 부흥하게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유교를 정부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일제시대 교육기관이었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바꾸어 종교기관으로 인정하였고, 전에 국가가 관리하였던 향교를 이제는 유림이 관리하게 하였다. 이제 유교는 국가종교가 아니라 유림이라는 사적 단체가 이끌어가는 사적인 종교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고종의 황제즉위식 재현이 이씨 종친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국가행사가 아니라 종중행사인 것이다.
미군정과 불교와의 관계는 약간 복잡하다. 해방 후, 불교는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의 갈등 가운데 있었다. 일제 청산을 외치는 비구승과 현실적인 실세인 대처승 간의 갈등은 매우 컸다. 이런 가운데 대처승의 단체인 중앙총무원이 당시의 입법원을 통하여 사찰령, 사찰령시행규칙, 포교규칙, 사원규칙을 폐지하고, 대신 불교의 모든 재산권을 불교의 대표인 교정(敎正)에게 맡길 것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재산임시보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또한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호와 같은 일에 관하여 행정관청의 허가를 받을 때에는 교정을 경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임시보호법은 몇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첫째는 불교의 친일청산을 주장하였던 단체인 조선불교총본원의 반발이다. 이 법은 일방적으로 대처승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법은 일본불교의 재산까지도 불교의 소유로 할 위험이 있으며, 그것도 중앙총무원에게 귀속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승인하기 어려웠다. 결국 미군정당국은 이 임시법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의 유물인 사찰령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미군정이 조선불교를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은 지나친 음모론이다.
이런 과정에서 혜택을 본 것이 개신교이다. 개신교 가운데 성결교회와 같은 일부교파는 교단이 전체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북한이 공산화되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적산의 일부를 분배하여 주었다. 여기에 해당되는 적산은 주로 천리교나 신도와 같은 단체의 것이 주를 이루며, 여기에는 일부 일본불교의 재산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불교의 재산 가운데 일부는 불교에 귀속되기도 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개신교가 많은 혜택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개신교가 일제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것도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가 미군정에 의해서 비교적 호의적인 대우를 받게 된 것은 개신교가 바로 해방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이 나가려고 하는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이 땅에 자유 민주주의를 실시하려고 하였고,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개신교이다. 개신교는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를 반대하였고,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개신교가 미군정에 의해서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관계에 따라서 당시의 종교는 미군정으로부터 다른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유교의 경우에도 미군정은 좌파적인 유림지도자인 김창숙을 입법위원에서 배재했으며, 불교에서도 중앙총무원 측은 재야세력을 좌파세력으로 공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려고 하였다. 미군정의 지상목표는 자유민주주의 구축이었고, 여기에 협조하는 종교는 우대를 받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해방은 전반적으로 보아 한국사회에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신사는 폐지되었고, 불법종교로 지목되었던 민족종교는 부활되었다. 유교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불교는 내부적인 문제로 사찰령이 폐지되지 못했지만 이미 폐지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막강한 인맥과 사상적인 동질성으로 인해서 가장 큰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제시대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이어온 것도 있다. 그것은 무속신앙과 유사종교를 규제하는 것이다. 아직 무속신앙은 종교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서 미군정은 유사종교가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생각해서 구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지,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정교분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5. 대한민국의 건국과 기독교
1948년 7월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의 헌법은 한국의 종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헌법 20조는 두 조항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며, 둘째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도, 1919년 임시정부의 헌법도 종교의 자유는 말했다. 하지만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정교의 분리를 명시한 것은 한국 전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종교에 근거한 나라가 아니라 종교와 분리된 세속사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에 있어서 국교가 부정되고, 정교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이 미군정의 정권이양으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미국헌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필자는 국교가 부정되고, 정교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해방 이후의 종교시장이 어떤 특정 종교가 독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와 불교는 자신들의 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인식되었고, 또한 일제시대 일본과 싸우지도 못했다. 또한 일부 유교지도자들은 친공산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시대 불교는 일본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 여파로 해방 이후 불교는 비구승과 대처승의 갈등 가운데 있게 되었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도 친일의 죄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울러서 기독교가 아직 한국 사람들 저변에 확대되지 않아 한국의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어떤 종교도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국교의 부정과 정교분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본다.
사실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종교는 개신교와 대종교라고 생각된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서문은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천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개신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쓸 수 있는 신의 개념이다. 하지만 순국선열은 기독교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며, 특별히 이것은 대종교를 비롯한 한국의 전통종교를 의식한 내용이라고 본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선서는 이렇게 다종교 상황을 고려했다고 본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개신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오래 되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아울러서 개신교국가인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신교는 해방 공간의 정치지도자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종교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대종교는 한일합방 시기에 만들어진 민족종교이다. 일본은 대종교를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해 박해했으며, 결국 국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중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고, 해방이 되자 이들이 대거 귀국해서 신생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승만의 초대 정부에 개신교 신자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참여시켰다.
한말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민족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비록 나라가 망하였지만 나라의 혼, 즉 국혼(國魂)이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박은식은 이 국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강력한 민족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아래서 형성된 것이 대종교이다. 대종교인들 가운데는 뛰어난 민족운동가들이 많이 있다.
해방 후 대종교 신자가 정부에 참여하면서 이들은 단군신앙을 민족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정당시 민정장관 안재홍, 초대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 문교장관 안호상과 같은 인물이다. 대종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단기(檀紀)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만들고, 전국 체전당시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을 단군정신 아래서 세우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로서의 대종교는 그 후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런 대종교의 사상을 안호상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안호상은 혈통에 근거한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그 근본에는 단군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민주의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헌법이 규정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이런 안호상은 초대문교장관으로서 민족종교에 근거한 민족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개신교는 단기를 연호로 사용하고, 개천절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시키는데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였다. 즉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서 존경받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종교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경계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승만의 개천절 경축사에서 들어난다. 이승만은 1949년 맞은 제 1회 개천절 경축사에서 단군은 신성화하는 것은 일본이 천조대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단군은 역사적인 인물로서 국가의 조상으로 섬기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서 그는 국가의 연호로 단기를 사용하는 것도 폐기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대종교가 민족종교의 기치를 내걸고 신생대한민국에 단군정신을 불어 넣으려고 했다면 개신교는 반공을 기치로 하여 자유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국가인 미국이 남한에 진주하고,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개신교는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얻게 되었다. 개신교는 미국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동연대가 가능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적인 공감대가 있었고, 이것은 다같이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갖게 되었다. 둘째는 개신교는 미국의 서구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는 집단이었으며, 따라서 미군의 통치와 이어지는 해방공간에서 국제적인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종교였다. 이런 요소들은 결국 해방 이후 개신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같은 개신교의 위치는 해방 이후 한국의 상황을 기독교신앙을 지키기에 좋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우선 개신교는 우상숭배를 배교행위로 이해한다. 일제 말 다른 종교와 달리 개신교가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것도 바로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정부는 국기에 대한 최경례인 배례를 강요하였고, 이것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상기시켰다. 개신교는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배례를 경례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이승만정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국기에 대한 배례를 주목례로 개정하였다. 이것은 정교분리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정하는 문제였다. 일본은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개신교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개신교가 또한 강조하는 것은 주일성수이다. 개신교는 이것을 처음부터 생명처럼 생각하여 왔다. 일제시대 총독부는 주일에 각종 동원령을 내려 개신교인들을 괴롭혔다. 이북에서 개신교와 공산주의가 마찰을 빚었던 첫번째 케이스가 바로 주일성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북은 주일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인들은 종교의 자유가 진정으로 실현되려면 주일성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첫번째 경우가 1948년 5월 총선거인데, 총선거는 주일에 실시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한 결과 그 다음 날일 월요일, 곧 5월 10일에 실시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계속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에 가서 이승만정부와 개신교 사이의 큰 마찰의 원인이 되었다.
일제시대 한국 개신교는 한반도 안에 있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비해서 일제의 종교정책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 않았고, 여기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신교의 배경에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개신교는 보다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군정과 신생 정부가 개신교의 선교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방송선교를 들 수 있다. 한국교회는 1947년 3월부터 매주 주일마다 서울방송을 통하여 기독교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일제시대부터 기독교는 방송을 통하여 기독교를 전했다. 공영방송이 국민에게 종교적인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이 방송시간을 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독교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따라서 이것을 기독교에만 배타적으로 보는 특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형목제도를 들 수 있다. 형목제도는 일제시대 불교의 전유물이었다. 일제시대 개신교도 형목제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개신교는 형목을 파송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하게 되었다. 결국 미군정 당국은 재소자들이 종교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재소자들은 개신교를 택하였다. 해방 이후 이와 같은 형무소 형목제도는 장면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타종교에도 문호가 개방되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군목제도이다. 한국의 군목제도는 한국전쟁이전 해군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 개신교지도자들이 군목제도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이승만대통령이 이것을 받아들여 개신교와 천주교에 군종장교를 파송하도록 했다. 이승만대통령은 국가 예산으로 군목제도를 지원하면 타 종교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교단에서 경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허락하였다. 원래 다른 종교에도 파송하도록 요청하였으나 다른 종교는 자체 사정상 여기에 합당한 인물을 파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목제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었다. 반공은 신생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개신교에 있어서도 가장 큰 적이었다. 개신교가 군목을 파견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국가의 운명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목제도는 한편으로는 개신교선교 기회의 확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런 방식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에 앞장섰던 것이다.
헌법에서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를 포함한다. 개신교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가능한 방법으로 확대하려고 해왔다. 이런 것을 특별히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신교는 해방 이후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섰고, 가능한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여기에 비해서 다른 종교는 해방 이후 개신교만큼 적극적으로 포교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이승만대통령의 종교편향에 관해서이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개신교를 비롯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단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그가 반대하는 공산주의를 기독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종교편향정책을 썼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실 이승만대통령은 종교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초대 문교장관에 대종교인인 안호상, 개신교인인 백락준, 그리고 불교 총무원장 출신인 김법린을 차례로 임명하였다. 특히 깁법린은 재직중 동국대학을 종합대학교로 승격시켰다. 이것은 이승만이 종교담당자를 특정종교에 편파적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승만의 1950년대 중반 비구승 지지를 개신교 지원을 위한 불교분열정책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때,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본다. 사실 이승만은 원래 대처승이 주도하는 총무원 측과 가까웠다. 그 이유는 이들이 우익진영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끝난 다음에 총무원측은 한민당과 함께 반 이승만 진영에 합류하였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비구승측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비구승측은 이승만을 이용하여 총무원측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아울러서 이승만은 대다수 사람들이 왜색불교 청산을 바라는 상황에서 비구승을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비구승측은 막강한 이승만정부의 지원으로 대처승측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불교개입은 이승만과 비구승측의 이해,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려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III. 최근의 이슈들
1. 민족주의의 부활과 정부의 민족종교/민간신앙 지원
우리는 위에서 개화기부터 시작하여 한국정부의 종교정책을 살펴보았다. 구한말을 포함한 조선정부는 분명한 종교정책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는 불교와 유교는 보호하고, 기독교는 견제하며, 다른 종교는 박해했다. 해방 후에는 정교분리의 원칙 하에 서양종교인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혜택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속신앙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대통령 시절 소위 민족주의 부활과 함께 한국의 종교지형은 새로운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산업화는 종교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신교는 주로 산업화와 동시에 시작한 도시화에 힘입어 한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사고와 희망을 불러일으킴으로서 큰 성장을 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하지만 이런 산업화와 더불어 한국사회에 강하게 밀어닥친 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사실 이 민족주의는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강화하면서 소위 한국적 민족주의라는 것과 함께 강화되었다. 이것은 그 다음부터 일종의 국가 시책이 되었다.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였고,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헌법에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의 부활은 민족종교에 대한 관심의 증폭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에 공인받지 못한 종교였던 민족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학, 증산교, 무속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소위 진보적인 운동권 학자들에 의해서 크게 강조되었다. 그들은 민중종교 속에서 민중의 아픔과 한민족의 정신을 보았고, 여기에 한국의 정신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종교가 되었다.
이런 민족종교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국가적인 지원으로 나타났다. 소위 수많은 문화재 보호 운동이 사실은 민족종교 보호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종교와 문화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민족문화의 보존은 민족종교의 보존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민족종교가 새롭게 혜택 받는 종교로 부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대표적인 경우를 전두환정권의 국풍(國風)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두환은 민족종교를 새로운 통치정신으로 삼고, 1981년 국풍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민족문화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사실은 민족문화라는 이름으로 당시 강하게 일어나던 반정부운동을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종교복구운동이 독재정권에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게 된다.
이런 민족종교 및 민간신앙은 지방자치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강해진 것 같다. 전국마다 각종의 지방문화축제가 열리고 여기에는 전통축제를 복원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각 지역의 전통축제는 대부분 무속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그 지역의 개신교 단체들의 강한 반대를 받는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강릉기독교협의회가 강릉단오제를 시장을 제주로서 진행하고, 여기에서 무형문화재가 아닌 무당을 불러 비용을 주는 것은 시 예산을 오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기독교와 전통문화의 갈등은 상징물에서도 나타난다. 서울시가 용산공원 기념물로 용오름을 만들어서 설치하였을 때, 한기총은 여기에 대해서 반대했다. 기독교에서 용은 적그리스도의 상징이므로 다종교사회에서 이런 상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가 청와대 숙정문에서 무당인 인간문화재 김금화 씨를 초청해서 액막이 굿판을 벌이려고 계획한 것에 대해서 한기총을 중심으로 이것을 반대했다. 이것은 국가의 예산으로 특정신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문화 내지 민간신앙과 개신교의 갈등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 정부의 전통종교 지원과 개신교의 반발
이런 과정에서 불교도 한국의 전통종교로 인식되어 국가로부터 직?간접으로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특별히 이것은 관광산업의 진흥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부는 특별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외국 관광객 유치와 전통불교문화의 보급을 목적으로 막대한 정부지원책을 발표하였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전통사찰 개?보수를 위한 정부 예산은 2003년 51억, 2004년 57억, 2005년 61.6억, 2006년 60.5억, 2007년 ‘60+α’억으로 나와 있다. 이것과 아울러서 소위 템플스테이 관련 정부지원은 2003년 15억 원, 2004년 18억 원, 2005년 25억 원, 2006년 35억 원, 2007년 150억 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이것은 전통종교의 이름 아래 불교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다.
최근 종교계 편향 문제로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정부에 요구하여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 정부의 종교계 지원 총 예산 984억 원 중 불교 77%(965억), 유교 7.1%(69억), 기독교 5.3%(52억), 민족종교 2.6%(26억)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종교관련 예산의 절대다수가 불교계로 지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지원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기독교신자인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불교계를 의식하여 후보시절 불교 정책 7대공약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1) 불교문화재 유지 보수를 위한 정부예산증대, 2) 연등축제를 국가전통문화축제로 지정, 3) 국제불교문화교류센터 건립지원, 4) 10.27 법란 특별법 제정을 통한 불교계 명예회복 ? 피해보상 추진, 5) 불교인이 임명되는 전통문화담당 보좌관 제도 신설, 6) 남북 불교교류와 북한 불교문화재 복원사업지원, 7) 가칭 불교전통문화연구소 설립 등의 공약이었다. 이 중 연등축제는 이미 예산 5억 원이 책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는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면서 개신교 내에서는 지금까지의 정부정책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불교계가 종교편향을 지적하고, 정부의 개신교 지원을 문제삼고 있는데, 다수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 전통문화와 전통종교의 이름으로 실질적으로 무속이나 불교와 같은 전통종교가 혜택을 입은 것이 아닌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에 문제의 초점이 될 것이다.
최근 들어서 정부의 관광산업 진흥에 개신교 문화유적도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리산 남장로교 선교사휴양지, 순천 매산동 남장로교 선교역사 문화유적지 조성 사업에 정부가 보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최근 인천시는 한국선교역사 기념관 건립에 15억을 지원하고,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 복원비로 20억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문광부는 2008년 교회가 순수한 종교행사가 아닌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행사를 할 경우에 1000만 원씩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개신교도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진보신당에서는 종교편향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문화의 개념정의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문화는 하나가 아니다. 한국은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다. 특별히 한국의 종교인구 가운데 가장 많은 종교인구를 갖고 있는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포함)는 당당히 한국문화의 하나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한국문화는 한국인의 문화이다. 다수의 한국인이 표현하는 것이 한국문화라면 기독교문화도 한국문화 내지는 한국종교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3. 단군상문제와 민족종교
한국 개신교가 국가와 관련해서 가장 큰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이 바로 단군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건국과정에서 단기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제정하며,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삼는 등, 단군을 민족의 종심으로 삼으려는 강한 운동이 있었다. 이것은 종종 단군을 단지 민족의 조상으로 보는지, 아니면 신적인 존재로 보는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개신교와 정부 당국의 중요한 마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단군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해방 이후 계속되어 왔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승만은 단군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은 인정해도 그 이상의 것은 반대했다. 하지만 자유당정권 때 단군전을 건립하려는 운동은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박정희정권 때의 일이다. 박정희는 민족주체의식을 강조하였고, 그 일환으로 1966년 박정희는 남산에 거대한 단군상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민족종교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가 이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루지 못하고, 대신 1968년 사직공원에 현정회(顯正會)라는 단체를 통하여 단군상을 설립하고, 이것은 1973년 서울시 보호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어 문화공보부는 국민경모단군상(國民敬慕檀君像)을 제정하여 전국에 통일적으로 비치하게 하였다. 얼마 후 현정회가 제작한 것을 단군표준영정으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직·간접으로 정부가 이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5년 서울시는 역점 사업으로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상을 중심으로 단군성전을 크게 확충하기로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을 국고지원과 개인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시점으로 전국에 단군전 건립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지리산에는 단군 국조전을 세울 계획을 가졌다. 이것은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만들려는 민족종교와 여기에 호응한 정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에 가서는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는 개신교 대표를 초청하여 이런 계획을 갖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1987년 한국 교회는 단군문제로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단군기술문제였다. 대종교의 안호상을 중심으로 한 재야 사학자들은 정부에 일찍이 단군신화를 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식민지사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사를 다시 써야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것을 수용하여 집필지침을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에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오래 동안 단군신회를 사실이라고 주장한 대종교 계열의 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얼마 전에 단군상 건립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개신교는 다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며, 따라서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곰이 인간이 되는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해서 역사교과서에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개신교는 이런 주장이 민족종교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라고 이해했다. 여기에 대해서 개신교 역사가이며, 동시에 한국사 교수인 이만열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단군신화를 단지 신화로만 보는 것은 식민지 사관이며,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대종교의 종교이해이므로 양쪽을 다 배격하고, 단군신화는 신화라는 언어 속에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면서 단군은 당시 통치자의 명칭이며, 환웅과 곰의 결혼은 환웅부족과 곰 부족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현행 역사교과서에는 이런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이같은 이만열 교수의 주장은 과거 이승만의 주장과 같다. 단군은 신앙의 대상은 아니지만 민족의 역사적 인물로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1999년 다시금 문제가 되었다. 대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문화운동회라는 단체가 전국의 초중등학교와 공원과 같은 공공건물에 369기의 단군동상을 기증하여 세우고, 전국 곳곳에 단군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쓰여진 건립기에는 단군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단군문제에 민감해 있던 개신교는 보수적인 한기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단군상 건립반대 운동을 벌였고, 한기총은 공립학교에서 특정종교의 상을 건립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반된다며 강력한 금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개개단체의 문제라고 하며 이것을 방관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일부 신자들은 이 상을 우상이라고 보고, 이중 69기가 훼손되는 일이 생겼다. 특히 99년 7월 경기도 여주의 학교에 세워졌던 단군상의 머리가 전기톱으로 잘려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대해서 홍익운동연합(한문화운동회의 후신)은 기독교는 자신의 조상을 모르는 반민족적인 종교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기총은 2003년 9월, 전국교회의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 『단군문제통합공과, 역사를 바르게, 소망을 주님께』라는 교재를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홍익운동연합은 이 책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며, 반민족적 행위라며 법정에 고소를 하였다. 하지만 법원은 단군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왜곡이라고 볼 수 없으며, 단군상은 단지 인물상이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건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으로서 일반 개신교가 승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계속되는 문제이다. 특별히 이것은 북한과 관련되어 일어나고 있다. 원래 사회주의는 단군을 신화라고 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 기원을 단군으로 만들고, 단군을 시작으로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이것은 1993년 북한의 인류학자들이 단군유적을 발굴했다고 공표하고, 거대한 단군상을 세우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단군논쟁이 얼마나 정치와 관련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4. 교육의 평준화정책과 사립학교의 통제
일제시대 한국개신교와 조선 총독부 사이에 가장 큰 마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육에 관한 것이다. 일본은 교육은 궁극적으로 국가가 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사립학교는 설립이념에 따라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군정과 이승만정부 시절에는 이런 사학의 자율성이 존중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이와 같은 사학의 자율성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 케이스가 바로 평준화정책이다.
평준화 정책은 1969년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중학교 무시험 추첨배정제도에서 시작되고, 이것은 곧 바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1974년도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국 대부분이 이 평준화 정책 아래 있다. 이 평준화 정책은 개신교 계통 사립학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계통 학교도 이제 정부가 추첨을 통해서 배정하는 학생을 받아야만 했다. 아울러서 정부는 학교의 재정을 지원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추첨을 통해서 원치않게 들어온 학생들에게 종교교육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여기에 일부 학생들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기독교관련 수업을 거부하는 문제가 생겼다. 사립학교는 자신의 건학이념을 실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사립학교의 선교의 자유, 학생의 종교의 자유 사이에 무엇이 우선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직도 이 문제는 재판에 계류중이다. 일심에서는 학생의 종교 자유를 우선시하는 재판이 나왔으나 2심에서는 신앙교육이 사회 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고, 학생에게 타 학교로 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종교자유를 해친 것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어쨌든 문제의 핵심은 사립학교 설립이념의 구현과 종교의 자유가 배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사립학교에는 학생선발권을 주고, 학생에게는 학교선택권을 주며, 국가는 세금을 공립학교에 지원하며 사립학교는 재정을 자립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교과목에 관한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은 사립학교에 종교교과목을 개설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과목도 복수로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종교과목이 강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일제시대와 같이 사립학교의 기독교교육을 제한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서울시 교육청은 한기총 등에 사과를 하였고, 종교교육에 대한 규제 지침을 사립학교에 제한시켰다. 만일 사립학교가 국가가 제정하는 교과목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사립학교의 존재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교교육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유익이 될 것이다.
최근 개신교와 정부 사이에 가장 큰 이슈가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사학법 개정이다. 사학법 개정의 핵심은 개방형 이사제도의 도입이다. 다시 말하면 개방형 이사 제도를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이사회에 들어오게 해서 학교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립학교에서는 개방형 이사가 들어오면 설립이념과 다른 방향으로 학교가 운영될 위험이 있으며, 또한 개방형 이사제도를 통하여 좌파적인 인사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학교의 운영권을 간섭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 미션 스쿨은 설립 이념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근간은 사적 재산권의 보호이다. 만일 사적 재산이 공공의 이름으로 침해당한다면 자본주의는 그 근본부터 흔들릴 것이다. 사립학교의 투명성을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투명성을 이유로 학교운영의 주체를 흔들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5. 내재적 발전론과 기독교역사왜곡
민족주의의 부활은 한국 역사전체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20세기 내내 한민족의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근대화였다.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국은 선진국이 되고, 그래야 세계무대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근대화는 한국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나타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근대화의 뿌리가 서양문명이 아니라 우리나라 자체 내에 있다는 소위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내재적 발전론에 의하면 서구문명은 내재적 발전과정에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 사관의 뿌리는 단재 신채호이며, 그는 모든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이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비아이며, 결국 민족정신을 해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같은 민족주의적인 역사관은 80년대부터 소위 좌파적인 역사이해와 접목되면서 미국과 개신교에 대한 강한 비판을 퍼부었다. 6. 25를 경험한 북한은 미국과 개신교를 하나로 묶어서 서구제국주의의 전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입장에서 개신교에 대해서 왜곡된 서술을 한다. 노무현 정부 때에 검인정 교과서로 등장한 금성출판사의 이 교과서는 이런 입장을 잘 설명해 준다. 이 교과서는 전교조의 지원 아래 전국 고등학교 근현대사 과목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금성출판사는 기독교가 민중과 대립되며, 서구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을 옹호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종교의 이념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를 물어야 한다. 먼저 개신교가 민중과 대립되는 종교인가?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지배층 보다는 여성과 보통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종교였다. 개신교에 지식인 계층이 들어온 것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의 일이다. 그러면 개신교가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 침략을 옹호했는가? 사실 19세기 말 조선은 중국, 일본, 러시아의 제국주의적인 야욕 앞에 이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미국과 관계를 갖기를 원했다. 조선이 미국을 의지한 것은 미국이 조선에 영토적인 욕심이 없으며, 미국은 정교분리의 국가여서 조선에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개신교선교사는 조선이 미국과 접촉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개신교는 일제침략을 옹호했는가? 사실 조선 땅에 있으면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종교는 없다. 심지어 가장 민족적인 종교로 알려져 있는 대종교조차도 정치에 간섭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개신교는 불교나 유교, 그리고 천주교와 비해서 가장 일본의 견제를 많이 받은 종교였고, 일본 당국과 마찰을 빚은 종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의 친일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하지 않고, 개신교만을 지적하는 것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특별히 이 교과서는 복음주의적인 개신교를 공격하고 있는데, 사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정교분리의 원칙아래 한국에 온 개신교선교는 천주교나 정교회에 비해서 조선정부의 법을 존중하였다. 이런 교과서가 정부의 검인정을 거쳐서 출판되었고, 이것이 학교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개신교를 상대적으로 폄하하는 것이며, 사실과도 다른 비역사적인 서술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국정교과서인 『국사』도 개신교의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 국사는 전통종교인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는 민족문화의 발달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반면에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근·현대 문화에서는 갑자기 종교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사 전체에서 불교와 유교 못지않게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 한국을 움직이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 부분에서 기독교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국사』에서 한국 개신교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한 곳도 없고, 그것도 한국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전체를 합해도 겨우 몇 줄을 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국사』교과서는 여러 종교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하고, 다른 전통종교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하여 역사적 사실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국사』교과서는 근현대의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종교의 포교가 자유스러워 진점이다.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고, 개신교는 1880년대에 서양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갔다. 동학은 3대 교주인 손병희 때 친일 세력을 내 쫒고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단군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교에서는 박은식이 유교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교육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에서는 한용운이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면서 불교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서양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의 활동은 교세를 확장 한 것이고, 천도교와 대종교는 항일 민족운동을 하였고, 유교는 근대교육과 계몽운동을, 불교는 자주성회복을 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국사』가 얼마나 서양종교에 대해서 인색하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한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면 누가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는가는 명백하다. 단지 이 『국사』교과서만 보는 사람은 기독교보다 유교가 더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한국 학계에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한국사를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등장하고 있다. 소위 뉴 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이 그것이다. 이 교과서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실증적인 입장에서 한국사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계는 뉴 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개신교에 대해서 편향적인 선호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불교계는 뉴 라이트의 역사교과서가 근대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며, 이것은 개신교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도록 만든다며, 여기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 최근의 종교편향논란
마지막으로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은 공무원의 종교편향문제이다.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한 개신교의 기도모임에 참석해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기도를 드린 사건에서 출발한다. 그 후 불교계와 언론은 공직자인 기독교신자들이 자신의 공직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를 강요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지역의 공직자가 같은 지역의 개신교목사를 자문위원으로 초빙하는 것, 공직자가 개신교 종교모임에 참석하여 인사를 하는 것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공직자종교편향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종교인이 자기 종교단체에 가서 신앙적인 표현을 한 것을 문제삼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많은 정치가들이 불교단체에 가서 우리나라가 불국토가 되기를 원한다는 덕담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불교신자라면 이 나라가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과연 잘못일까? 개신교의 목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배나 기도회 등 신앙공동체 내에서의 신앙적 발언까지도 종교편향으로 간주한다면 공직자의 신앙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 문제는 공직자에게도 한 인간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있고, 거기에는 선교의 자유도 포함되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물론 공권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에게 강제적으로 신앙을 강요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공직자가 한 개인으로 자신이 믿는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했다면 이것을 과연 문제삼을 수 있을까?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의 대표적인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여기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공직자종교편향금지법은 아직 제정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국무회의는 공부원복무규정에 “공무원은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차별이 없이 공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였고, 문광부 산하에 공직자 종교차별자문회의를 만들어 종교차별에 대한 신고를 받고, 여기에 대한 판정을 내린다. 지난 11월 24일 문광부는 총 8건의 종교차별신고가 접수되었는데, 그중의 1건을 종교차별로 판정했다고 발표하였다. 종교차별의 내용은 공립중학교 영어교사가 수업 전에 학생에게 순번으로 기도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교사가 혼자 묵념으로 기도한 것으로 드러났고, 학생들을 위하여 상담해주고, 기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문위원회는 이것을 종교차별이라고 판단했다.
맺는 말 : 자유로운 종교시장을 위하여
우리는 이상에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국의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었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복음주의 개신교는 이미 정교분리의 원칙을 알고 있으며, 이것을 실천하여 왔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 개신교는 유럽의 비국교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유럽의 비국교도는 국가종교와 싸워 왔으며, 이런 과정 가운데 종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시된 것은 미국에서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국가의 도움이 없는 교회를 만들었으며, 이런 과정 가운데 대중들에게 접근하는 법을 배웠다. 다시 말하면 복음주의 개신교는 종교시장을 이해하고 있었고, 소위 구매를 강요받지 않는 대중들에게 종교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른 종교는 이런 종교시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종교를 사회통합의 기초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교가 다양화된다는 것은 사회가 분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사회, 불교사회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사회에서 개종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세속화를 경험하였고, 타 종교와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사회인 미국이 타 신앙과 공존하는 길은 종교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신앙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미국 헌법은 국가가 참 종교를 판단하는 기능을 부정하였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의 교리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각 종교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입증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는 모든 종교들에게 공정한 경쟁의 룰을 제공해 줌으로서 자유로운 종교시장을 제공해 주고, 그 종교시장에서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택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종교소비자들에게 달린 문제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나타나있는 정교분리의 정신이라고 본다.
그러면 근대 한국의 역사는 이와 같은 다종교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먼저 조선은 이런 다종교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쓴 것이다. 쇄국정책은 근본적으로 종교시장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화라는 물결 앞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신교가 들어오고, 천주교가 용인되었다. 아울러서 일본의 힘에 의하여 불교도 일정부분 차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서양종교는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여 자유를 용인하였지만 불교는 정부가 직접 통제하려고 하였다. 유교도 국가종교의 위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종교시장이 개방되었지만 이것은 매우 초기의 것이었다. 서양종교 가운데 개신교는 특히 신앙은 국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어 국교제도를 반대하였고, 국가로부터 도움도 받지 않았다.
이런 종교시장은 일제시대 더욱 왜곡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종교는 보호해 주고, 자신의 통치에 방해되는 종교는 견제하고, 도전하는 종교는 박해하였다. 일본의 통치에 유리한 종교는 신도, 불교와 유교가 해당되며, 방해되는 종교는 기독교였으며, 도전하는 종교는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였다. 여기에 일제시대 심각한 종교시장의 왜곡이 일어났다. 불교와 유교가 일본의 보호를 받은 것은 해방이 되자 큰 짐으로 나타났고, 한동안 한국 종교에서 중심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민족종교는 심한 박해를 받았으므로 국내에서는 발전할 수 없었고, 외국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일본당국과 종교의 자유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사립학교, 종교법제정, 신사참배에 대한 도전 등은 모두 자유로운 종교시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개신교는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방 후, 한국의 종교시장은 새롭게 개편되었다. 미군정은 종교시장의 왜곡을 상당히 바로잡았다. 우선 신도를 제거하고, 유교를 국가의 통제에서 해방시켰고, 민족종교를 다시금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견제를 풀었다. 이승만정부는 이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특별히 당시한국사회를 이끌어가던 것은 기독교와 대종교였다. 개천절의 실시, 단기의 사용,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제정은 초기한국사회가 대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대종교의 등장은 한국사회가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반공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새로운 과제를 잘 이해하는 종교는 바로 기독교이며, 이것은 기독교가 해방 이후 한국의 중심종교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교이다. 정부는 불교는 해방 이후 비구와 대처 사이의 싸움 때문에 일관된 종교정책을 사용할 수 없었다.
최근 이 같은 종교 갈등은 다시금 증폭되고 있다. 그 기원은 한국 전통종교의 부흥과 여기에 맞서는 기독교의 대응 때문이다. 박정희와 그 이후 한국의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민족종교의 지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무속이 한국의 고유사상으로 등장하고, 단군신앙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되고, 불교가 전통문화의 이름으로 혜택을 받았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사상은 곧 바로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져서 역사교과서의 기독교 왜곡 및 축소로 이어졌다. 또한 약간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이런 정서는 사립학교에서 종교행위 제한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울러서 이런 상황은 개신교 공직자들의 선교행위를 문제삼아 종교편향방지법 제정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은 다 종교상황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신교가 가장 적극적인 전도를 한다. 이것을 타 종교에서는 지나친 공격적인 선교행위라고 보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선교의 자유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 20조는 종교의 자유, 국교의 불인정, 정교의 분리를 말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 속에는 신앙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고, 국교의 불인정 속에는 대한민국은 종교에 근거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특정종교가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다종교 상황인 한국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는 아직 합의되어야 할 것이 많다.
우리가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국가가 어떤 종교가 참인지 아닌지, 종교의 내용에 대해서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어떤 종교는 신을 인정하고, 어떤 종교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는 배타적이고, 어떤 종교는 포용적이다. 그러나 국가가 거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의 외적인 행위가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 그것은 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의무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종교는 대한민국의 종교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는 전통종교라고 해서 국가의 혜택을 입고, 어떤 종교는 서양종교라고 해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이미 이 땅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하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자꾸 서양종교라고 해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편견이다.
대한민국은 선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에는 신앙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가 다 포함되어 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장이 판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같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종교는 살아남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교의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도에는 이르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그 경계인지는 사회적인 합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2008. 12. 17. 아포롤기아)
박명수 교수
성결대학교 신학과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M.A.Th.D.과정수료)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STM., Ph. D.)
하바드 신학대학원(Visiting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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