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위한 긴급제언(2) 傳하는 소식
2009/05/17 07:19 http://blog.naver.com/kjyoun24/60067668760 |
한국교회언론회(대표 김승동 목사)는 최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 교회를 위한 긴급
제언”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고, 한국 교회 변화와 쇄신을 촉구했다. 한편 참석자들은
포럼에 이어 ‘목회자의 복음적 책무와 자정(自淨)을 위한 선언’을 채택하고,“목사가 가는
곳에 교회가 가고, 교회가 있는 곳에 행복한 지역 사회가 이뤄져 가는 꿈을 소망한다”며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룬다는 굳건한 의지를 천명했다.
한국 교회를 위한 긴급제언
한국교회언론회 포럼 자료
주제 1 : 한국교회 지도자, 그문제와 처방 (박종구 목사)
주제 2 : 종교 개혁과 한국 교회 (정성구)
주제 3 : 이방·이단 종교를 넘어야 (이만석)
《주제 1》
한국 교회 지도자, 그 문제와 처방
박종구 목사(월간목회,크로스웨이 성경연구원 원장)
프롤로그 / 다시 진맥을 시작하며
하나님은 그의 구속사 전개를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신다. 그리스도께서도 지도자를 통해서 그의 사역을 펼치신다(출 3:1-6, 수 5:13-15, 삼상 3:1-9, 사 6:1-8, 렘 1:4-10, 겔 2:8-3:3, 막 3:13-19, 마 28:18-20, 행 1:8). 지도자란, 광의적으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한국 교회 지도자란 모든 크리스천이 이에 해당된다(벧전 2:1-9). 그러나 필자의 이 논거는 한국 교회 목회자로 한정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 목회자 리더십을 진단하는 종합검진의 성격을 띤다.
종합검진이란, 두 갈래의 접근이 있다. 정기검진의 경우와, 이상 징후가 있을 경우다. 필자의 작업은 후자에 속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한국 교회 리더십을 보는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많되 리더십이 표류하고 있는 현실이 목자 없는 양들의 황당함과 같기 때문이다(슥 10:2, 막 6:34).
필자의 검진 자세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신열에 시달리는 아내 곁에서 의사도 아니면서 아내의 이마를, 그리고 맥박을 짚어 본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를 향한 필자의 사랑 또한 같은 맥락이다. 지난 한 세기 한국 교회를 이끌어 온 목회자들의 근면과 노고를 잘 알고 있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그 역경을 이겨내고 열정적 도전으로 부흥을 일구어 온 교회 지도자들의 공과를 높이 평가하며 동시에 존경을 드린다.
진단 과정에서 들추어 낸 문제들은 치유를 위한 수순이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맹수가 자신의 상처 부위를 핥음으로 치유하는 그 아픔과도 같은 것, 뻗어 가는 뿌리의 아픔과도 같은 것이 필자의 아픔이다.
1. 진단 / 무엇이 문제인가
(1) 비 신학화 (非神學化) 현상이다
지난 1970~1980년대에 정점을 보인 양적 성장제일주의가 신학의 틀을 벗어난 성서해석의 풍조를 낳았다. 성서를 사사로이 풀거나, 억지로 풀거나, 구약의 수건을 쓴 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벧후 1:20-21, 3:16, 고전 14:8-9, 고후 2:17, 3:14). 성서를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이고, 살아 있는 인격으로 와 닿는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속사 플랜(The Divine Drama)이다. 그 구속사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다(요 5:39-40, 눅 24:27, 엡 1:9-10). 즉, 통전적(統全的) 시각으로 성서를 해석하지 못할 때 설교의 포퓰리즘 현상이 오고, 샤머니즘과 윤리적 설교에 갇히게 된다. 그리스도 중심의 통전적 시각을 상실할 때 그것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메시지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차별성을 희석시킨다(행 4:12).
(2) 물량 지향적이다
신학부재 현상은 빈집에 우환을 불러왔다(마 12:43-45). 기독교 세계관은 산업사회의 가치관에 침식, 또는 함몰되었다. 공룡형 거대규모의 성공주의에 현혹되어 수퍼 처치 신드롬에 빠져들게 되었다. 재정적 후원이 없으면 더 이상 리더십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 지도자의 영향력 또한 제한받게 된다. 동일한 메시지일지라도 그 선포의 형태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고급 호텔에서냐, 외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강단이냐, 어느 체육관이냐에 설교의 프리미엄이 매겨진다. 베드로의 리더십은 은과 금이 아니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었다(행 3:6). 오늘의 한국 교회는 끝없이 추구하는 물량적 성공주의가 기복적 샤머니즘의 늪에 빠져들게 했다. 은과 금은 넘쳐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은 증발된 것은 아닐까.
역사의 교훈은 명징하다. 물질의 번영이 있는 곳에 부패가 만연했다. 솔로몬이 그러했고, 여로보암 2세가 그러했다. 선지자들은 지도층의 물량 지향적 가치관을 통렬하게 공격했다(겔 28:5, 전 5:13, 호 4:7, 암 4:1, 6:4-6, 눅 16:13). 그리스도께서는 현상적인 복을 신령한 복으로 대체해 주시고, 온전케 해주셨다. 사도들의 리더십 역시 탈 물량주의에서 능력 있게 발휘되었다(마 5:1-10, 엡 1:3).
(3) 신뢰성이 없다
한국 교회 지도자를 향한 일반의 기대치는 매우 높다. 그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때 실망하게 된다. 곧 지도자로서 신뢰성을 상실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구별은 선명했다. 선포한 메시지가 성취될 때 그는 참선지자며, 그 반대일 때 거짓 선지자였다(렘 28:1-17). 또한 선포한 메시지에 대해 선지자 그 자신이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느냐가 신뢰성의 전거가 된다(겔 34:1-10, 마 23:3, 27-28).
(4) 외향성을 상실했다
에클레시아는 두 기능이 있다. 모이는 기능과 흩어지는 기능이다. 한국 교회 지도자의 마인드는 전자에 편중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의 벽이 견고해졌다. 교리의 벽, 제도의 벽, 교단의 벽, 개교회의 벽, 지역의 벽, 계보의 벽이 높다. 이는 대사회 관계에서는 문화의 벽으로 넌 커뮤니케이션의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이벤트는 언제나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기 마련이다.
한국 교회의 소극적 자화상은 세속 가치를 교회 안으로 유입되게 하는 데 빌미를 준 셈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창고 속의 소금을 꺼내야 한다. 움 속이나 말 아래의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마 5:13-16). 마치 돌고래들을 웅덩이에 몰아넣고 먹이를 미끼로 쇼를 하게 하는 조련사를 연상케 한다. 웅덩이에서는 생명의 존엄도, 창조적인 미래도 없다. 돌고래는 쪽빛바다를 그리워한다.
(5) 탈진 조짐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쉼표가 없다. 격무에 시달린다. 담임목회자에게 집중된 업무가 과중하다. 특히 설교 횟수가 연간 1,000회를 상회한다. 너무 분망하다. 그래서 주님도 종들 만나기가 어렵다는 위트가 있다.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 그대로 전이되었고, 지도자의 실적위주 과욕도 한 요인이 되었다.
지도자의 탈진현상(burnout)은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킨다. 정서적 파탄 또는 공황상태를 가져오고, 체력의 한계로 발병될 수도 있다. 또한 다양한 도전 앞에서 전문성 없는 응전만 있을 뿐이다. 단세포적이고 표피적 대응은 리더십의 한계를 가져올 뿐이다. 특히 변화를 이끌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이미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개미에게서 배운 근면과 모듬살이의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텔레코즘(telecosm)시대의 유비티즌(ubitizen)을 위한 거미형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단12:4).탈진상태에서는 자기 관리가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안일한 매너리즘, 역사의식과 위기의식의 결여는 온갖 성인병의 적신호이다.
2. 처방 /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시다
(1) 크리스천 지도자는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크리스천 지도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꿈(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선한 도구이다. 이것이 넌 크리스천의 리더십과 구별되는 본질이다(렘 18:6, 마 20:8, 눅 1:26-37, 눅 5:1-11, 롬 9:21, 엡 2:10, 딛 1:7-9, 벧전 4:10). 그러므로 크리스천 지도자는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는 인본주의나, 조직에 의존하는 권력지상주의나, 물량에 의존하는 물신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현상적 성과를 측정하려는 허상의 누각에서 시급히 탈출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며, 늘 깨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며, 그분께서 세우신 목적에 귀히 쓰임 받는 선한 도구가 되도록 충성해야 한다(롬 12:2, 엡 4:11-12). 크리스천 리더의 완전한 모델이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전히 쓰임 받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선한 도구이시다(신 18:15, 요 7:16-19, 13:13-15,28-29, 엡 5:1).
(2) 텍스트에 정통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한결 같이 성서에 정통한 지도자들이었다. 성서에 근거하여 왕과 백성들을 감시하고 경고했다(삼상 13:13, 삼하 12:7-12, 시 1:1-4). 지도자는 성서에 근거해서 사회를 해석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누구나 성서를 상고한다. 문제는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시각으로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눅24:37, 요 5:39). 이 신학적 큰 흐름을 놓치고 성서를 제한할 때 위험하다. 즉, 성서를 부분적으로 토막을 낼 때, 성서는 한낱 이스라엘의 민족사에 불과하다. 영웅열전, 윤리독본으로 전락하게 된다. 위인 이야기나 도덕 교본은 성서 외에도 허다하다. 역사속의 위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성서에 겸허하게 다가가서 성서에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지도자 자신이 변해야 한다. 성서를 바꿀 수는 없다. 오직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3)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미래사회의 변화의 물결은 엄청난 힘으로 몰려온다. 그 도전에 지혜로운 응전은 지도자 자신이 그 변화를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지식 정보의 폭발적인 확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다원화의 물결에 밀려드는 혼합주의의 파고는 어떻게 넘을 것인가. 대체종교의 등장을 부추기는 첨단 과학의 발달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 앞에서 능동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소를 운영해야 하고, 건전한 비평을 수용할 성숙한 자세가 되어야 한다(잠 29:1, 전 7:5, 계 3:19).
우선 지도자 양성기관부터 달라져야 한다. 2백여 년 전의 서구 기독교에서 만든 신학교육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신학교육을 진단해 봐야 한다. 미디어를 통해서 검색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은 더 이상 다루지 말아야 한다. 그런 스타일은 서구학문의 유통업에 종사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제도에 묶인 신학도 문제다. 신학자들로 하여금 학생들과 함께 성서 중심, 교회 중심, 생명 중심의 신학을 창조해 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고, 그들의 실험적 창의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제도권의 눈치나 보는 복지부동의 신학자들은 시급히 변해야 미래가 있다.
(4) 솔로에서 합창으로
한국 교회 포스트플레이 시대는 지났다. 조직체의 수장을 중심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스타일은 이미 낡았다. 그것은 전제군주시대나 군사독재시절의 패턴이다. 피라미드 구조의 리더십에서 네트워크 구조의 리더십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하드웨어(hard power)에서 소프트웨어(soft power, smart power)로, 점에서 선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솔로에서 합창으로의 리더십은 역할분담을 말한다. 그것은 곧 연합과 일치의 유기적인 생명공동체를 말한다(롬 12:4-5, 고전 12:12-27, 엡 4:25, 5:30). 연합과 일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지도자는 통섭(consilience)의 마인드가 필수다.
3. 전망 / 주어를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장밋빛인가 아니면 암울한 잿빛인가. 이 물음의 정답은“If”용법으로 가능하다. 즉, 지도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빛깔은 달라진다(신 28:1-68, 막 13:33, 요 15:1-17, 빌 3:13-14).
우선 조심스런 미래 예측이 선행되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리더십 스타일이 등장한다는 것도 전재해야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의 리더십, 다문화 다 종족 사회의 리더십, 가변적 세계질서 속의 선교 리더십, 다원화 영역의 데스크 리더십, 확대되는 평신도 리더십 등의 복합적 요인이 예측 불허의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플라톤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장이 노쇠해서 눈멀고 귀 어두워졌다. 판단력도 흐려졌다. 선원들은 그 선장이 어서 죽기만을 고대한다. 그래야 한 단계씩 진급되기 때문이다.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천문학과 지리학, 그리고 통솔력을 길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은 그저 늙은 선장이 죽기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그 공동체의 위기다.
필자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크리스천 지도자를 언급했다. 역사의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행위가 리더십이다.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주어를 바꿔야 미래가 보인다.
에필로그 / 새 아침이 오는 창가에서
아침은 빛이다.
빛을 주신 그 분께 감사드린다.
맨 처음 빛이 있으라 하신 그분께.
아침은 생명이다.
생명을 일으키신 그분께 찬양 드린다.
오늘도 다시 일어서는 호흡을 주신 그분께.
누가 새 아침을 오게 할 것인가,
사람은 할 수 없는 그것, 오직 그 분께서, 그 분의 때에,
그 분의 방법으로 여실 것이다.
그 분께서 여시는 새 아침,
그것은 어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아니다.
아, 눈부신 미래의 빛이여!
미래가 오는 이 창가에서,
나의 노래는, 우리의 노래가 되게 하소서.
다시 우리의 노래는, 새 아침의 찬가이게 하소서.
《주제 2》
종교 개혁과 한국 교회
-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의 시각에서 본 한국 교회의 평가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총장,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장)
1984년 한국 교회 선교 100주년을 기점으로 지난 25년 동안, 한국 교회의 자화상을 평가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교계의 신문과 잡지들은 한국 교회의 목회와 교회 성장의 공과(功過)를 여러 각도로 평가했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을 보면서, 더러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했지만, 대개는 매섭게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것을 다시 논하는 것은 다소 진부한 이야기가 될 듯싶으나, 다시 점검코자 한다.
1. 한국 교회의 현주소
캐나다의 프람스마(Praamsma) 박사의 지적대로, 오늘의 세계는 세속주의, 유물주의, 무신론주의, 과학만능주의 등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데, 미래는 그것이 더욱 심화될 것이며, 사람들의 성적,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해서 말세적 현상이 더욱 확산되리라고 전망했다. 결국 교회도 이런 시대적 풍조에 휘말리면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 올 것으로 내다보았다.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려면 철저한 자기반성과 회개가 필요한데,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논의는 주로 <月刊牧會>가 주축이 되어 기획시리즈나 기고자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제기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80년대의 회고와 90년대의 전망> <한국 교회와 여성 신도> <부흥 운동과 부흥 성장> <한국 교회의 신학을 진단 한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 <교회의 물량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목회 윤리 그 현장을 본다> <목회자의 권위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등등 수없이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한국 교회의 문제들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첫째, 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한 자기반성이 그 대종을 이루었다. 한국 교회의 목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마다 평신도나 교역자 할 것 없이 교회의 성장에 따른 성숙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서로 엇갈린 반응이 있는데, 어떤 이는 한국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예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은 한국 교회가 무리한 성장 위주로 가다보니 엄청난 문제점과 부작용이 일어났음을 비판하는 시각이다.
둘째, 이른바 거룩한 실용주의가 아무런 신학적인 정리가 없이 한국 교회에 침투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즉 잘 먹혀들어가는 방법인 실용주의와 목적이 수단을 신성시 한다는 반기독교 사고방식이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교회는 사회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최근까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실을 비판할 때마다 단골로 지적되는 것은, 그동안 한국 교회는 개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만 치우친 나머지 사회 여러 분야의 구조 악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넷째, 한국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윤리적 이완 현상, 탈 현세적이고 기복주의 형태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구체적 개혁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내어 놓지 못했다.
2.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금년은 때마침 칼빈이 탄생한지 500주년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칼빈은 종교 개혁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개혁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 서양에서 종교란 곧 로마가톨릭이었음으로 종교 개혁이란 말이 타당하겠지만,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많이 나와서 종교와 기독교를 같이 보려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굳이 칼빈을 교회의 개혁자로 부르려고 한다. 그러면 교회의 개혁자로서 요한 칼빈 목사의 개혁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사도적 교회는 환란 가운데서도 이단과 싸우면서 순수한 성경적 교회를 지켜 왔고 교리 체계를 세워왔다. 교부 시대는 어거스틴, 터틀리안, 암부로스, 아타나시우스, 크리소스톰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서 역사적 기독교를 지켜 왔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즉 신앙의 자유를 찾은 후, 로마의 고급 관리와 고급 장교들 그리고 지성인들이 교회에 몰려오자, 변화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보다는 새로운 대중들에게 아부하기 시작하고, 서서히 세속화되어 의식적, 형식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즉 정권을 이기기 위해서 교황제도를 만들고, 교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성경적인 것을 거리낌 없이 시행했다. 그래서 온갖 인본주의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이교들의 예배의식과 미신을 아무 통제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가톨릭교회가 되어 혼합주의적 종교, 비성경적 교회가 되어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권사수에 모든 정치력을 동원하게 된다. 이러한 세속화의 과정이 천년이 넘도록 이루어졌으니, 로마 가톨릭은 전혀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니고 일종의 유사기독교, 변종기독교, 가짜기독교로 전락했다. 그래서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른바 95개조를 비텐베르그 정문에 붙이고 종교 개혁의 불길을 지폈다. 그러나 루터는 제대로 된 교회의 개혁을 마무리 하지 못 했고, 왕권에 복종함으로 결국 그의 영향력은 독일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불란서 출신의 요한 칼빈(John Calvin)은 1536년 그의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를 출판한 이후에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조직신학자, 성경 주석가, 목회자, 교육자, 교회의 개혁자로서 오늘 우리가 믿는 개혁주의 신학을 성경적,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조직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모토가 그러했듯이,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칼빈의 교회 개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 안에 실현했으면 좋겠다.
3.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의 교회 개혁의 방법
오늘 한국 교회의 식자들은 대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교회의 세속화를 탄식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개혁을 위한 구체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당시 교회 개혁의 기준은 무엇이며, 또 그 원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한국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칼빈 탄생 500 주년을 맞아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① 칼빈의 교회 개혁은 성경에 기초했다.
당시 개혁자들의 정신이 그러하듯 칼빈의 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이방 종교와 미신에 감염되어 있던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는 교황의 칙령이나 전승(Tradition)에 매여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초로 하지 않는 교회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세속화 할 수밖에 없고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다.
칼빈 목사는 천년동안 잊어졌던 성경을 대중들에게 자세하게 강해하였다. 칼빈은 위대한 조직 신학자이자 성경 주석가였지만 그는 목사로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 칼빈은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 표준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오리겐 이후 당대에까지 유행하던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을 버리고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되,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연속 강해 설교를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칼빈의 교회 개혁과는 사뭇 멀어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평신도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 목회자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것은 강단의 문제이다. 한마디로 오늘의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성경의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다. 많은 설교자들이 신학의 빈곤으로 자의적 설교에 매여 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바로 성경의 재발견이며 강단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도 바로 강단의 회복 없이는 한국 교회가 새롭게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목회자치고 자기 설교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의 강단은 엔터테인먼트식 설교, 자기 선전, 대중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는 이른바 강단 꾼(Pulpiteer)들이 교회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아 모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개혁의 대상이다. 한국 교회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웅장한 계획이 성경이며, 그 성경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설교를 할 때 교회는 바로 되리라고 본다.
② 칼빈의 교회 개혁은 철저히 오직 믿음(Sola Fide)의 진리를 붙잡은 것이다.
종교 개혁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의 공로나 의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숭상하고 그것이 복을 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성자숭배, 성물숭배를 했다. 즉 공적을 많이 쌓으면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구원과 복을 받는 줄 알았다.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보상 개념이 지배하던 시절에 루터와 칼빈과 개혁자들은 성경으로부터 오직 믿음로만 의롭게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는 루터가 오기 전 100년 전에 존 후스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진리를 설교하다가 순교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은연중에 비뚤어진 축복관을 설교해서 인간의 노력과 헌신 여하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듯이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구원은 내 하기 나름이란 사상을 주입시키므로 헌신과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는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한국 교회는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성경적인 신앙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신앙보다는 자기중심적 신앙, 축복을 전제로 한 조건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교도나 미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계시한데로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다.
③ 칼빈의 교회 개혁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진리를 붙잡았다.
오직 은혜 즉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는 칼빈 신학의 핵심인 동시에 개혁 신학의 핵심이다. 또 성경의 핵심이요, 바울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칼빈은 당시 어거스틴 이후 천년 이상 잠자던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진리를 힘 있게 증거함으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도리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오직 은혜의 진리를 버리고 있다. 강단은 어느새 프로이드의 사상이 들어와서 심리적인 방법이 설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결국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고 설교되고 있다.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개발하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등으로 설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인본주의적이며, 유물주의 세계관이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이런 종류의 설교들은 다 미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목회 성공자들의 메시지라고 한다. 하지만 대중들이 듣기에 좋은 것이 결코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이야 말로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진리를 힘 있게 붙잡을 때이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음을 힘 있게 가르쳐야 한국 교회가 바로 갈 수 있을 것이다.
④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a Deo Gloria)을 목표했다.
칼빈은 교회의 개혁자로서 목회자로서, 엄청난 도전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았고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끝까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만 영광이란 목표를 가지고 싸워서 오늘 우리가 믿는 신앙체계를 세웠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늘 겸손하고 진실하고 자기를 숨기었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칼빈은 20년의 연구와 준비 끝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으나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하지 않고 10년이나 후배인 데오도르 베자를 학장에 임명하고, 자신은 평교수로 일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로서 말하기를 「목사를 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야심>이다」라고 경고했다. 즉 야심을 갖고 일하는 목회자는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역자가 야심을 가지면 목회에 실패하고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교역자의 야심이다. 주의 일은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야심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요즈음 한국 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복음 그 자체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꿈과 비전이란 명분으로 <야심>을 가지고 일하는데 이는 성경에 맞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세상적으로 성공을 못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순위로 살아가면서 목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 될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정착될 때 한국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⑤ 칼빈은 건강한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은혜를 은혜 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하였다.
칼빈 목사는 제네바를 개혁해 나가는 중에 제네바의 셍 삐에레 교회에서 평생 설교하면서 교육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즉 어린이 교육, 청년 교육 그리고 신학 교육이 그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20년의 준비 끝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다. 그런데 이 제네바 대학은 신학 교육의 센터이자 전 유럽을 향한 선교 센터이기도 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목회자와 신학자만을 교육한 것이 아니고, 개혁의 신앙을 가진 건실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해서 성공적인 교회 개혁을 이룩했다.
우리가 칼빈에게 배우는 것은 신학 교육을 철저히 시킬 뿐 아니라, 진실한 평신도 지도자를 동시에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전혀 신학적 체계가 없는 사람이 허영으로 신학교를 세워서 야심을 갖는 것도 문제려니와, 전혀 준비되지 않아서 교역자가 되지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교역자로 나서는 것도 문제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부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신학교를 너도 나도 세워서 마치 새로 가게를 차리듯 하고 본인도 신학 이해가 없는 무자격한 사람이 속성으로 키워낸 목사들은, 지금 갈 곳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바르고 철저히 준비되고 소명 있는 영적 지도자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각계 전문 분야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평신도 지도자를 키워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칼빈과 오늘의 한국 교회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았다. 결국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처럼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한국 교회도 칼빈 탄생 500 주년을 기념해서, 그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삶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 교회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해 가야 하리라 본다.
《주제 3》
이방·이단 종교를 넘어야
이만석 선교사(4HIM 대표)
교회에 특혜가 있는가?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내부의 모순과 오류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적들의 공격에 대해서 바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교회가 사회로 부터 존경받는 본연의 위치를 회복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며 민족복음화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다른 종교보다도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며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겨루며 선진국대열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교회가 빈민퇴치운동 및 한글전용운동, 사회봉사운동, 애국애족운동, 교육의료봉사운동 등을 펼쳐서 조국을 무지와 빈곤에서 탈출시키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사실이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지금 칭찬과 존경을 받기는커녕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한국 교회 때문에 발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심한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작심하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안티 기독교 세력들까지 생긴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통령이 기독교인이기에 무슨 정치적 특혜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종교편향의 의혹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혜라면 불타버린 종교시설물을 정부 재정으로 재건해주며, 깊은 산중의 절까지 포장도로를 건설해주는 것도 부족해서 유명사찰들을 문화재로 지정해 유지 관리 보수비용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것 뿐 아니라, 입장료까지 받아 챙기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특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편 통일교에서 상수도원으로 지정된 가평에 900만평이란 땅을 개발하여 종교타운으로 시설을 건축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특별한 혜택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타종교에 대한 특혜들이 한국 교회에 위기감을 조성할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 교회는 이슬람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에 대해서 바르게 알려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보통은 목회자들조차 이에 대해서 무관심한 실정이다. 그런데 굳이 김선일 씨 참수사건이라든가 샘물교회 납치사건 혹은 예멘 한국관광객 폭사 사건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슬람의 정체를 알고 보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과연 어떤 종교인가? 이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뿌리를 이용해서 일어났지만 기독교와 유대교를 짓밟고 대적하는 종교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슬람의 위장(Taqiyah) 교리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가를 알려고 하면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에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이슬람 이맘(학자 혹은 성직자로서 예배를 주관하고 설교하는 사람)을 초청해서 이슬람 교리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위장(Taqiyah)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 신앙을 위해서는 거짓말을 죄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이슬람화를 위한 하나의 필수전략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MBC에서 방영하는 “시선집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서 전주 이슬람 사원을 취재한 것이 방영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국에 온지 20년 가까이 되어 이슬람에 대한 책도 30권 정도나 썼다는 외국인 이맘은 “이슬람에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경전인 꾸란에서 이혼은 두 번까지(Q2:229)허락된다고 하며 꾸란 65장은 이혼의 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이혼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아내 바꾸기도 허락하고 있다.(Q4:20) 이슬람의 지도자가 꾸란을 읽어 보지 않았거나 몰라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서에 설마 성직자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고 한국인들은 이혼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을 좋게 보이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이슬람에서 교리적으로 허용된 것이므로 누구든지 이슬람을 바르게 알기 원한다면 무슬림 성직자나 학자들에게서는 바른 정보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교리는 사회 생활을 할 때나 방송을 통해서나 인터뷰나 글이나 책을 쓸 때나 심지어는 꾸란을 번역할 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기독교를 존중한다는 이슬람의 주장
이슬람측의 주장을 그대로 들어보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Allah)는 천지를 창조한 전능하신 유일신으로서 같은 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 뿐이며 이슬람에서도 신구약 성경을 진리로 인정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의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고 모든 무슬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꾸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훌륭한 선지자 5명 중에 한 사람으로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교리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도 아니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목적으로 오신 분도 아니요,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도 아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은 더욱 아니다. 다만 종말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뒤에 아흐맏(여기서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파생됨)이라는 분이 오실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오셨던 알라의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리얌(마리아)의 아들 이싸(예수)가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실로 나는 너희에게 보내어진 선지자로서 내 앞에 온 구약과 내 후에 올 아흐맏(무함마드)이란 이름을 가진 한 선지자의 복음을 확증하노라...(꾸란 61:6) 위의 글을 읽으면 이슬람이란 종교가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직접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구약을 확증하고 앞으로 아흐맏이란 이름의 선지자가 올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것은 무함마드가 혼자서 알라(Allah)가 보낸 지브리일(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만든 종교를 말하는 것이며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슬람은 어떤 교리를 가르칠까?
그들이 말하는 교리는 단순하다. “6신(六信)과 오행(五行)”이라는 것이 있다.
알라, 천사, 꾸란, 선지자, 심판과 내세, 정해진 운명 등을 믿는다. 이것을 여섯 가지 교리를 믿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섯 가지를 믿는 사람 무슬림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다섯 가지 행위가 있다. 이것을 오행이라고 하는데 이는 1.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다고 하는 신앙고백 2. 하루에 다섯 번씩 하는 의례적 기도 3. 일 년에 한 달(이슬람력 9월 라마단 달)동안 해 있을 동안만 금식하는 것 4. 수입의 40분의 1을 구제하는 것 5. 평생에 한 번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꾸란에서는 가장 중요한 무슬림들의 의무가 지하드(聖戰:Holy War)이며 이를 행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Q49:15) 이것은 너무 혐오스럽기에 일반적으로 교리를 가르칠 때는 제외된다. 그러나 충성된 무슬림들을 가르칠 때는 9.11 사건을 자행한 사람들을 왜 테러범이라고 부르냐고 비난하며 그들은 진정 모든 무슬림들이 본 받아야 할 영웅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꾸란은 어떤 책인가?
그런데 이들의 주장과 교리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꾸란이라는 책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교리이고 보면 먼저 꾸란이 어떤 책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AD 610년 부터 633년의 23년 동안 알라가 보낸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던 것을 기록한 것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들의 주장은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인 꾸란은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교리를 살피기 전에 무함마드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증해 보아야 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가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8:2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예레미야 14:14)
꾸란은 예언과 성취가 없는 책
성경 말씀 신명기 18장 22절을 보면 그가 정말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선지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언과 성취를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그 예언들이 성취됨을 통해서 그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을 꾸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무함마드가 장래의 일을 예언한 것은 알라를 위해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충성을 다한 자에게는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많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과 알라를 배신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끓는 물을 마시게 하며 영원한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위협을 한 것 등이 있으나 이 일이 성취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할 길이 없다.
기적으로 선지자임을 증명받지 못한 사람이 계시 받았다고 주장하는 책
또한 선지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도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라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했으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그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증명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임을 증명할만한 기적을 행한 일이 없다.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하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했으나 무함마드의 대답은 꾸란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진리임을 입증할 수 없는 책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연속성이 있어서 이전의 선지자들의 말씀들과 이후의 선지자들의 말씀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 진리인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며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기에 구약의 설계도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 신약이라는 자연스런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꾸란은 전혀 신구약 성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무슬림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구약 성경과 조화를 이루며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 꾸란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주장을 했었지만 도저히 같은 신의 계시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내용상의 차이가 많이 발생하자 신구약 성경은 변질되었으며 꾸란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구약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쿰란 동굴에서 1947년에 발견된 사해 사본은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성경이 변질 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음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꾸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은 없다. 오직 무함마드가 혼자 진리라고 주장하는 단독 선포자이면서 단독 증인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성경 자체만도 40여명의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있고 그 외에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름같은 증인들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다.
취소할 수 있는 계시인 꾸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변치 않는 진리(마태복음 5:18)이지만 꾸란은 수시로 취소하고 새로운 계시를 준다고 한다.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상식을 적용해 보더라도 꾸란은 스스로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전에 계시한 계시를 취소하였거나 혹은 망각하게 했을 경우에, 그 이상 또는 그와 동등한 것을 주려하고 있다. 알라가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느냐? (꾸란2:106)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영인 알라(Allah)
결론적으로 꾸란은 진리가 아니며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다른 영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들이 믿는 알라(Allah)는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임을 꾸란이 증거하고 있다.
유태교도나 기독교도는 그대가 그들의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라. “알라의 인도만이 진실한 인도이다”라고. 만약 그대가 지식을 얻은 다음에도 그들의 욕망에 따른다면 알라로부터 떨어져 그대를 보호할 자도 도울 자도 없다.(꾸란2:120)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알라의 인도만이 진실한 인도이다”라고 말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이슬람의 알라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어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다(꾸란4:157)”고 말씀하시겠는가? 성령께서 어찌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아내를 넷까지 얻어도 좋다(꾸란4:3)고 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혼은 두 번까지 가능하다(꾸란2:229)고 하시겠는가?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는 알라(Allah)라는 신은 우리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며, 그는 메카의 카바 신전 안에 있던 360개 우상들 중의 하나였던 꾸라이쉬 종족의 종족신이었으며,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꾸란은 성령과는 전혀 다른 영의 계시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이슬람의 침투 전략
1) 이슬람을 평화로운 종교로 위장한다.(타끼야 교리)
2)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이기에, 한국 정부가 산유국들에게 약하므로, 정부 공직자들의 권력을 이용한다.
3) 자신들의 국가에서는 교회를 못 세우게 하면서, 여기서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완벽한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이용하여 포교한다.
4) 대학가의 캠퍼스에 침투하여 교수, 대학생 등 지식층들을 설득하여 아랍어과 및 중동문화연구 등의 과목을 만들어 이슬람을 확산시킨다.
5) 근로자 신분으로 위장하여 한국에 들어와 불법체류하면서 포교하되 합법적 체류자격을 얻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 여인들과 결혼하는 전략을 이용한다. 꾸란의 일부다처 교리를 이용하여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만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6) 한 아랍 소사이어티, 중동학회 등 기관을 만들어 정부 지원을 받아가며 이슬람을 확산시킨다.
7) 무슬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사는 지역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정부와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내세워 타협한다.
8) 한국에 문맹자가 거의 없으므로 이슬람 홍보용 책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서점가에 뿌린다.
9) 산유국들의 오일달러를 이용하여 대형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지분을 늘여감으로 경제적으로 사회를 점령하여 이슬람의 발언권을 높인다.
10) 이슬람 금융이 한국에 정착하면 이슬람 포교를 위한 무이자 융자를 받아 최고급 시설과 교사진들을 갖춘 초·중·고등학교 교육시설을 설립 운영함으로 이슬람인구 저변확대를 노린다.
11)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을 보급한다.
12) 이슬람 대학이나 모스크들을 건립하여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한다.
서양의 이슬람을 보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가 기독교인 출신들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목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가 깨어있지 않으면 영국이나 서양처럼 이슬람화되어 갈 것이다. 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이미 세계최대의 단일 종교로 올라섰다. 이슬람은 최고의 인구성장률을 자랑한다. 1부4처에 교리적으로 낙태 및 산아제한을 금한다. 기독교 가정들은 일부일처에 가능하면 1-2명의 자녀만 두는 것이 보통이다. 자연 성장률만 봐도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
영국은 이미 유럽 최초로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영국 국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법으로 공인하여 이슬람법으로 재판하는 법정이 런던, 맨체스타, 버밍햄, 브라드포트, 글라스고우, 에딘버러 등 여러 대도시에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맺는 말
지금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유럽의 전철을 밟고 있다. 1000명 교인 규모의 교회는 아동부가 100여명에 그친다. 10% 정도다. 그들이 그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부모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방해받다가 대학생이 되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노인들 몇 명이 큰 교회건물을 지키고 있는 유럽교회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현상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이단이나 타종교들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하여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지만, 이슬람 외의 종교들은 적어도 폭력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슬람은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면 자체 테러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슬람 확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테러를 가한다. 이것은 꾸란에서 명령하고 있는 방법이기에(꾸란 8장12절)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 때문에 유럽 뿐 아니라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민족복음화를 원하며 우리 후손들에게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물려주기 원한다면 이슬람의 확산을 막아야 할 것이다. (2009. 5. 16. 코람데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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