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소통부재와 문화적 소통
1. 소통부재의 사회
국어사전에는 ‘소통’을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이라고 설명한다. 영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서로의 의사가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통(通)하다.’이다. 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서로 통한다.”는 것은 단지 말과 생각만이 아니고 정서와 느낌, 취향과 행동양식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통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즐겁고 신이 난다.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훌륭한 명분과 대가가 있다 해도 즐겁거나 신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인격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도구화함으로써, 부버(Martin Buber)의 용어를 따른다면,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근대사회의 타자에 대한 폭력과 자본주의의 비인간화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은 근대의 합리성에 대해 재고한다. 하버마스(J. Harbermas)는 근대의 주체가 타자를 소외시키고 대상화함으로써 근대가 본래 추구하려했던 합리적 의사소통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특히 그는 현실세계로서의 문화적 영역이 구체화시키는 공론장의 형성과정에 주목하고 근대적 합리성이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근대의 공적 영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 간의 소통부재도 고통을 주지만 사회적 소통의 부재는 구성원의 연대를 허물고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어 공동의 목표설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단일한 목표, 단일한 담론을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다양한 가치와 질서가 공존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개진해나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상호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타자를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에만 몰두하여 타자를 제거하려고 하는지 이다.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전자와 같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하고, 국가권력은 빈약한 정치력으로 일방통행식의 법치만 내세우며, 남과 북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서로 으르렁거린다. 경제적 위기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하는 재계와 노동계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학계,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등 모두가 소통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약자들은 약자들대로 강자들은 강자들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고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라고 말한다면 너무 부정적인 면만 보는 것일까?
혹자는 이러한 상황이 민주주의가 성숙해져가는 과정이며 진보를 위한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0여 년 전 필자가 대학 시절에 경험한 혼란과 고통의 시절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우리가 진정 발전해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우리는 서로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인정하는가? 나와 다른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래서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시민교양의 기본기이다.
요즘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어느 누구도 양 극단을 이어주지 못한다. 어느 한 편을 지지해야 한다 하더라도 다른 한 편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여 설득하고 조정해 나갈 수 있는 지도층의 조정의 리더십이 아쉬운 때이다. 종교계나 교육계나 이러한 도덕성과 조정능력을 이미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사회통합까지는 몰라도, 갈등의 농도와 양 극단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는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2. ‘문화사회’와 새로운 소통방식
소통을 거부하는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다. 당장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동체 모두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 오늘 이러한 소통부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사회’의 이상을 공론화하고 싶다. 이미 90년 대 중반부터 한국의 문화주의자들로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한 이 논의는 민주화 이후 제시된 새로운 사회적 이상이었다. 이 논의는 한국의 사회문화적 다원화가 가속화되고, 이미 100만이 넘는 외국인 거주자들과 공존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의 공공 과제가 되었다. 즉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우리 혹은 나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공적인 논의를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시민 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제였다.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고, 문화산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 되었으며, 문화생활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높아졌다. 생산, 제작, 유통, 비평에 종사하는 문화사회의 주도세력들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문화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문화적 소통의 공적 실천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거리를 예술적으로 변화시킨다던가, 간판을 아름답게 교체한다던가, 공공디자인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던가, 각 지역의 축제가 활성화된다던가, 한국적 문화콘텐츠가 다양하게 개발된다던가 하는 등이 그러한 흔적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공적 영역에서 시민들의 소통 공간이 확대되고 서로 다른 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는 등의 일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사회’의 담론이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의 전유물처럼 사유화되거나, 국가주도의 관변 프로그램으로만 실천되면서 정작 시민 스스로 소통의 기술을 배우고 체험할 현실세계의 변화는 구체화되지 못했다. 타자와의 소통은 단지 공간의 재배치나 콘텐츠 다양화와 같은 형식적 시도만으로는 성숙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내기 원한다. 커피전문점은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이 되어버렸고, 어른들도 이제 극장을 자주 찾는다.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은 우리의 국토가 더 이상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이제 소통은 문화적으로 실천된다. 그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나타나고,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에 매력을 느끼며 기존의 것보다 창조적인 것을 선호한다.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인터넷에 자기만의 블러그와 UCC를 제작하고, 찜질방에서 모이고, 몸짱을 위해 운동을 하는 모든 행위가 개인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문화적인 소통방식이다. 일상생활이 정치적으로 구성되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다원적 현실인 것이다. 소비문화의 폐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정치논리나 이념 논쟁에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할 것은, 전통적 가치의 현대화 작업이 사회적 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소통과 문화사회의 다양한 소통방식을 풍요롭게 하려면 전통적인 가치나 문화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역의 축제나 다양한 행사들이 적극 권장되어 공동체적 소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그러한 행사들은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있고 상업화 되어 있어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주민이 없는 지역행사가 대부분이라 그 실효성이 의심된다.
필자는 최근 일본 동경의 아사쿠사 지역에서 열린 대규모 마쓰리(축제)를 참관했다.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무거운 가마를 가족마다 만들어 지고 다니는데, 여대생들과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정적으로 참여하더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힘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우리의 가치와 정서를 기성세대와 공유할 기회가 너무 적다. 세대마다 서로 다른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공유하는 가치와 문화적 형식이 있다는 것은 결코 그 다양성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풍부하게 할 자산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소통방식은, 일상적인 삶의 다양성이 공적 영역에서도 허용되는 문화사회의 확장을 통해서,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3.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역할: 문화적 소통에 힘 실어야 한다.
최근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때로 섬뜩할 정도다. 그들을 비판하고 탓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그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은『도시 심리학』(2009)에서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인 전도방식을 두고 오늘의 시대적 정서와는 전혀 다른 ‘역주행’이라고 표현한다. 또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엉뚱한, 분위기 망치는, 이기적인, 무례한, 비상식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들의 생각을 고쳐 놓겠다며 대처하는 방식도 역시 과감한 역주행일 때가 많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머리를 빡빡 밀거나, 큰소리를 치며 열을 내고, 교회의 재산과 소유권 분쟁으로 법정에 서며, 보란 듯이 세습을 감행하고, 개인적인 정치적 의견을 마치 신의 뜻인 양 강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소통이 불가능한 집단이라고 여긴다. 너무도 과격하고 공격적이어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권위적 태도를 가진 성직자들을 보면 지금 한국사회의 소통부재의 책임이 교회에 있지 않나 하는 자책도 생긴다. 물론 그 동안 한국사회를 위해 한국교회가 감당한 선한 일들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데,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 탓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위기는 교회에게는 또 다른 기회다. 무엇보다 절박한 것은 시민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기독교가 공공의 선을 풍요하게 하는 일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여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이 소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만연한 소통부재와 불신을 극복하는 통로가 될 수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오늘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고 선호하는 소통방식을 배워야 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문화적 방식’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공동체의 선을 위한 협력이 문화적으로 수행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시대이다.
선교 2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외래 종교로 인식된다. 기독교문화는 기독교 외부 사람들에게 너무도 이질적이고 일상화시키기 어렵다. 선교 초기 기독교가 정착하면서부터 내재된 반문화적 정서는 전통문화와 대중문화와의 소통에 대해 거부감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민족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와의 창조적 만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풀어낼 수 있어야 하고, 또 대중문화에 담겨있는 다양한 표현양식들과 담론들로부터 풍부한 소통방식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소통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과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음적 가치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희생하고 헌신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소통의 물꼬를 트는 도덕적 역할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우리와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문화적 소통방식이다.
[출처] 한국사회의 소통부재와 문화적 소통|작성자 새로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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