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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과 해외선교
전 호 진(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선교학)
한국교회는 최근 21세기에는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일어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활기를 띠어 수적으로는 세계 7대 선교사 파송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교회 성장 면에서는 성장이 중지 혹은 정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기독교 질서는 이제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전하는 현실이다. 지난 5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복음화회의는 이것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본다. 천주교 신학자 월터 빌만은 과거와 미래의 기독교사를 분석하기를 첫 l천년간은 헬라문화의 동방 기독교가, 다음 1천년간은 라틴문화의 서구 기독교가 지배하였지만 앞으로 l천년간은 비서구 기독교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제 3세계 나라들 가운데 기독교가 비교적 강한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중요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l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한국교회를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이적인 교회 성장을 기록한 나라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풍요의 시대에 교회는 영적으로 빈곤하여 부흥과 성장이 중단상태에 있다. 최근 독일의 한 선교잡지에는 한국교회는 성장이 중단되었다는 요지의 글이 발표되어 우리를 적지않게 실망시킨다. 그 글의 요지는 이제 한국교회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자체의 Pull Factor도, 또한 사람들을 교회로 몰아넣는 Push Factor도 사라져 독일처럼 아름답고 큰 교회들은 곧 텅비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듣기에 좀 불쾌하지만 반성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과거에 한번 있었던 사건이 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부흥이 다시 가능한가? 한국교회의 침체현상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앞으로 선교에서도 중대한 차질을 예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해방 후 한국교회 성장의 어제와 오늘을 반성하고 새로운 부흥과 도약을 모색해야 할 때인 것이다.
1.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분석
1)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분석방향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최근 약간의 글들이 나왔는데, 이것은 대략 세 가지 방법으로 한국교회 성장을 진단한다. 첫째는 70년대 민중신학의 등장으로 사회학이 신학에뿐만 아니라 선교학 이론에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 성장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분석은 이미 1930년 국제선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1)가 미국 감리교 신학자 A. T. Wasson에게 한국교회 성장을 진단하도록 부탁하여 나온 책이 Church Growth in Korea이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을 하나님의 섭리와 더불어 네비우스 원리에 의한 선교전략과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열심 때문이라고 하였을 때, 그는 이와는 좀 다른 대담한 사회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교회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은 1970년대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교회에 다시 나타났다. 특히 두르카임의 사회학이 교회성장에 적용되었다. 두르카임에 의하면 사회가 아노미 현상일 때 사람들은 퇴폐풍조에 빠짐으로 더욱 타락하든지, 흑은 종교에서 탈출구를 모색하기 때문에 종교가 부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에 사회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진보적 신학자들이나 신자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사회학적 해석은,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초기에는 한국교회가 근대화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며 해방 후에는, 특히 7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인권운동과 민주화투쟁에 기여함으로 사회적 신뢰를 얻어 교회가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회 참여가 교회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당시 경제성장과 더불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났고 여기서 경제적 소외계층이 종교에서 영적 보상과 위로를 찾았기 때문에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순복음교회의 성장을 특히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둘째로 문화인류학적 해석이다. 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미국인 선교사 서명원의《한국교회성장사》(Wildfire : Church Growth in Korea)는 한국에서 시행된 네비우스 선교전략이 성장을 가져왔다는 이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적 문화 풍토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동질집단 원리와 복음에 대한 강한 수용성이 성장을 초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전세계적으로 기독교는 물활론(Animism)과 샤머니즘의 문화권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선교의 보편적인 상식이 되고 있다. 맥가브란의 문화인류학적 방법의 교회성장학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맥가브란의 동질집단과 집단개종의 이론은 언어 인종이 다양한 인도의 배경에서 나온 것인데도 사회 문화적 배경이 다른 미국과 심지어 동질집단 사회인 한국에도 적용되고 있다. 셋째로 토착화 이론에 의한 성장의 해석이다. 즉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기독교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전도의 준비(preparatio evangelica)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간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하는 것으로 이것은 완성설(fullfilment)이라고도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팔머교수는 저서 Korea and Christianity에서 한국 기독교 선교의 성공을 토착화 이론에 두었다. 선교사들이 성경의 신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 구약에 나오는 많은 의식과 풍속은 한국인의 문화적 정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물론 초기 선교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도 통용되는 이론이다. 특히 감리교의 신학자들은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가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감리교 신학자는 한국 교회의 성장의 이유는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물론 복음 자체에 그 성공의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를 배경으로 한 한국인의 심성이 기독교의 복음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준비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상의 설명은 결코 포괄적이고 완전한 것은 못되고 부분적인 타당성만 인정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실체(social reality)이지만 동시에 영적 실체(spiritual reality)이기 때문에 사회학적 이론이나 문화인류학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먼저 참여파의 사회학적 이론대로 하면 교회의 사회참여가 교회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인데, 하지만 실제로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사회봉사(social action)가 선교에 유리하게 작용할지언정, 결코 성장과는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인 결론이다. 선교는 어디서든지 의료.구제.교육 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이 모든 선교지에서 성장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교회의 정치 참여 역시 성장과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남미와 한국의 진보적 교회의 완만한 성장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 역시 한국은 동질집단의 사회이므로 인도의 상황을 적용한다는 자체가 무리이거니와 지방색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도리어 역작용으로 나타난다. 위의 두 이론을 따르면 사회가 안정된 나라나 사회는 교회나 다른 종교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후에 언급하겠지만 한국교회 성장은 70년대인데, 70년대는 일본을 위시하여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도 각 종교들이 부흥하는 시기이다. 그럼으로 이 이론의 일방적 적용은 무리이다. 마지막 토착화론 역시 현재 우리 사회가 너무 서구화되어 기독교를 서구종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샤머니즘이 전도의 준비가 되기보다도 기독교를 침식하는 것으로 더 우려한다. 따라서 교회성장은 단순한 사회학적 이론이나 문화인류학적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영적 신학적 사회적 전도 전략적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토착화 이론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적용이 가능하나 현대에도 이 이론의 적용은 역시 문제가 있다. 결국 교회성장은 단순분석이 가능한 것이 아닌 영적.문화적.사회적.신학적.목회적인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2) 해방 후 급성장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가 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천주교를 포함하여 기독교 인구가 20% 이상 되는 나라는 아시아에는 한국 외에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고난 속의 성장이다. 물론 성장 이면에는 경제성장이 거품성장이라고 자조하듯 한국교회 성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성장지향의 교회보다는 내적 성숙을 도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강하게 나타나는 실정이다. 최근 대형사고나 범죄에 기독교 신자가 연루된 데 더욱 많은 자극을 받아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비판적 시각으로 본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성장을 긍정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직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아닌 우리사회에서 기독교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지만 경제분야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려는 신자기업인이 있는가 하면 스포츠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국위를 선양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적인 면을 다 분석할 수 없으므로 우선 수적인 면에서 성장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통계는 신뢰성에 문제가 많이 있음을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통계의 신뢰성이 적다는 것 자체가 교회의 한 어두운 단면을 나타낸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동시에 굴곡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교회는 해방 후부터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완만한 성장과 급성장의 편차가 심하다는 점이다. 물론 동란을 전후하여서는 통계가 없지만 해방 전에 한국교회의 통계는 l920년대는 약 20만 신도였고, l925년에는 26만, l934년에는 33만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쟁 이후 l956년에는 신자 통계가 77만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6 25전쟁을 전후하여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60년대는 완만하게 성장하다가 70년대 거의 3배에 가까운 급성장을 한다. 마펫의 통계에 의하면 1969년 2,166,677명의 신자가 1980년에는 5,981,000명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문화공보부의 통계는 그보다 훨씬 많은 7,180,627명이다. 그래서 본 도표는 후자를 채택하였다. 해방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10년 단위로 도표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이하의 도표에서 1970년도까지의 통계는 사무엘 마펫의 것을 참조하였음).
10,312,813 | 1,000만 | | 900만 | | 800만 | | 7,180,627 700만 | | 600만 | | 500만 | | 400만 | 2,167,677 | 300만 | 1,257,428 | 200만 | 600,000 | 100만 | 372,000 167 |352 +------------------------------------------------------------------- 1910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1940년부터 90년까지의 매 10년마다 개신교 신자의 인구대비 비율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시기이면서도 경제가 성장하는 70년대에 성장하는데, 이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대교단의 교회들이 역시 이 시기에 교세확장에 주력함으로 성장하였고 동시에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오순절교회들이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짧은 시간에 세계최대의 교회로 급성장하였다. 여기서 장로교회 통합측과 감리교를 위주로 성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로교(통합) 감리교
여기서 형편상 모든 교단을 다 설명하지 못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어느 교단의 교회든지 1970년대가 성장의 전성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위의 도표에서 나타난 바대로 통합과 감리교의 통계는 이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기장과 고신은 이 기간동안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한국 장로교회 중에서 비교적 좌파에 속한다는 기장은 75년 216,000명의 신자였는데, 80년에는 불과 230,280명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하였고, 소위 극우파에 속한다는 고신은 74년 104,870명이었는데, 80년에 210,518명으로 성장하였다. 통합과 감리교의 성장에 비하면 대단히 저조한 편이다. 기성은 1952년 약 9만 명의 신자였으나 72년에는 155,499명, 1980년에는 416,378명으로 성장, 8년 동안 약 270% 성장, 연평균 성장률은 무려 33%를 기록한다. 성결교가 급성장한 것은 어느 교단보다도 십자군전도운동의 교회배가 운동이 크게 주효한 것으로 본다. 통합은 1977년에서 78년간의 1년 동안 성장률은 무려 11.2%를, 79년에서 80년 사이는 최고 치로서 15%를 기록한다. 그러나 80년대에는 연평균 성장률이 5%선에 머문다. 이러한 현상은 감리교도 거의 동일하다. 감리교 역시 76년-77년의 1년 동안에 20%를, 77-78년에 21%를, 79-80년의 1년간은 무려 22% 성장이라는 최고치를 기록하지만 80년대에 와서는 5% 미만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80년대에 와서는 완만한 성장을 하다가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체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으로 기독교 언론이 지적하였다(형편상 90년대 통계는 생략함). 그런데 한국교회 통계상의 문제점은 각 교단의 통계를 종합한 신자 숫자와 정부의 인구센서스의 통계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985년도 일부 교단이 신자통계를 보고하지 않은 것이 있지만 이들 교단의 통계도 다른 자료를 근거로 합산하면 적어도 800만은 넘는다. 그러나 85년도 정부의 인구센서스는 6,489,289명이다. 정부 센서스에 의한 개신교 인구의 비율은 13.6%이고 교회의 통계에 의하면 약20%나 된다. 90년도에 와서는 공식적인 신자가 10,312,813명으로 인구의 23,75%에 달하는데, 이것이 93년에 와서는 무려 1200만으로 늘어난다. 반면 역시 정부의 인구센서스에 의한 통계는 800만을 넘지 못한다. 90년대에 성장이 둔화된다고 탄식하는 형편에 이 숫자는 신뢰성을 결여한다. Drescher은 KNCC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92년 한국교회의 각교단이 보고한 숫자를 합하면 기독교 인구는 13,768,672명으로 무려 전인구의 36%가 신자이다. 그런데 1991년 정부가 실시한 인구조사 때 32,500가구를 대상으로 종교상황을 조사한 바 응답자의 18.6%가 개신교 신자로 응답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의 기독교 신자 통계는 믿을 수 없거니와 정부의 종교인구 통계도 전체 인구의 700만을 상회하기 때문에 신뢰성이 적다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은 우리를 너무나 부끄럽게 하기 때문에 자성을 요한다. 우리는 Drescher의 지적처럼 교회의 통계보다도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개신교 통계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증거를 지역별 통계조사를 통하여 입증하고자 한다. 먼저 서울의 기독교 인구를 표본적으로 살펴보면, 1991년 서울 송파구의 경우 총 인구 688,121명 중에서 개신교 신도가 118,895명으로 17.3%를 차지하였으며 교회 수는 546개였다. 양천구 목동1동을 실례로 들면 인구 19,400명중 교회당은 16개에 신자는 약 2,600명이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13.6%이다. 이것은 서울의 평균치에 좀 못 미치는 숫자라고 본다. 그러나 신흥 대교회가 많은 강남지역은 기독교 인구가 많아서 20에 달할 것으로 본다. 1984년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강남구의 기독교 인구는 15%를 넘었다. 그때보다 교회가 많이 성장하였다고 가정할 경우 20%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공무원 도시라는 과천의 경우 인구 7만 5천명 중 기독교 신자는 28교회에 신자 약 8,300명으로 10%를 조금 상회한다. 이것은 중산층이 사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개신교 신자가 적은 편이다. 경기도 용인군은 인구이동이 비교적 많은 지역으로 기독교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군내의 전 인구 23만 명중 교회206개에 신자는 약 16,000여명으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7.6%인데, 이것은 92년도 8.6%에 비하면 오히려 2년동안 1% 감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흥도시로서 급성장하는 부천시는 고정인구가 70만 명이고 유동인구가 적어도 10만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런데 부천시내에 개신교 교회당은 약 750개에 신자는 무려 18만 명으로 인구의 23%나 된다고 한다(1993년 10월 조사). 같은 경기도의 평택시는 인구 97,253명에 교회당 171개에 신자는 29,000명이다(95년 통계조사). 이것은 인구의 29%나 되는 높은 수치이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은 도시화 현상에서 교회성장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형편이 전혀 달라 기독교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부산과 경남은 개신교 인구가 10%에 불과하다. 경남의 두 지역인 김해와 진주시의 교세를 보면 김해시는 1992년 총 인구 139,832명 중에서 개신교 신자가 12,282명으로 8.4%에 불과하고 진주는 인구 33만명 중 개신교는 교회 약 150여개에 신자 16,000명으로 5%에 불과하다. 진주는 불교가 강하여 상대적으로 기독교 선교는 어려운 것으로 분석된다. 교회가 강한 지역으로 알려진 호남지방의 한 곳만 살펴보자.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의 경우 교회당이 한 개에 불과한데, 마을 인구 1,289명 중 신자는 140명이다. 따라서 신자인구는 11%를 조금 넘는다. 다음 대전의 경우 1991년 전체 인구 115만명 중 개신교 신자는 약 25만으로 대전시청은 발표한다. 이것은 개신교 인구가 무려 21.7%로서 부산이나 대구에 비하여 무려 배나 되는 셈이다. 대전은 부산이나 대구보다는 이동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대전처럼 기독교가 강한 곳은 드물다. 농촌이지만 교회가 비교적 강한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의 경우 총인구 1289명중 신자는 140명이 교회 출석함으로 11%를 넘는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25% 혹은 30% 신자 운운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고 본다. 6,489,282명이다. 이보다 앞선 1983년 정부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는 5,337,308명이다. 이것은 당시 인구의 13.45%가를 차지한다. 일부학자들은 1983년도 이후부터 한국의 기독교는 사실상 정체상태거나 침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얼마전 정부의 인구센서스에서는 개신교 신자를 약 800만이 못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발표한 통계는 개신교회는 35,776교회에 12,311,210명이다. 이렇게 정부의 통계와 교회의 통계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정부의 통계를 더 신뢰하는 것은 지역별 개신교 인구를 종합한 데 근거한다. 서울의 개신교 인구는 대략 2백만을 상회, 적어도 20%는 된다. 그러나 부산은 40만도 못되는데, 이것은 부산의 400만 인구의 10%도 못된다. 서울과 호남지역의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개신교 인구는 평균 10%도 못되고 농촌은 이보다 더 못하여 평균 6%이다. 이렇다면 전체 한국교회의 신자는 결코 20%는 못되고 대략 15%에서 18%로 보는 것이 정확성에 가깝다고 본다. 3) 해방 후 한국교회 성장의 특징
다음 이상의 통계에서 한국교회 성장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한국교회는 1950년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진통을 겪어 수적 성장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완만한 성장을 보인다. 60년부터 70년 사이는 75% 성장하지만 70년부터 80년 사이에는 3배가 넘는 326%나 증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80년도에서 90년 사이의 성장은 70년대에 비하여는 둔화되어 증가율은 46%이지만 실제로 개신교는 800만으로 볼 때 결코 성장이라고 볼 수 없다. 최근의 조사는 90년대에 와서는 한국교회는 4%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고 우려한다. 해방 후부터 한국교회의 성장은 두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는 해방 이후부터 l960년대 후반까지이며 다음 단계는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 초기까지이다. 먼저 해방 후에서 60년대 후반까지 한국교회는 교단분열과 각 교단의 신앙고백의 형성기로 정의할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시까지 한국교회는 혼란의 시기로서 교회는 정체상태였다. 그리고 동란 중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일제 때 신사참배 문제로 소위 복구파와 정화파간에 분열을 겪으면서 이합집산하였다. 이러한 분열의 상처 중에도 전쟁은 교회성장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으로 인하여 교회에서 안전을 찾으려고 하였다. 또한 해방 이후 지성인들은 유교.불교 등의 전통종교에 대하여는 비판적이었고 서구화의 영향으로 기독교에는 호의적이었다. 특히 기독교 국가인 우방국들의 원조는 교회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쟁 중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2차대전 중 세계적 추세였다. 둘째로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 신자들은 남한교회에 변화를 초래한다. 피난민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거니와 그 중에도 장로교회는 더욱 그러하다. 월남한 장로교회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신앙이 정열적이고도 보수적이었다. 이들이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에서 개척교회를 설립함으로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부산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자유당 정권 때의 신자들이 정치가로 참여한 것도 개신교에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 시대는 기독교는 근대화의 종교, 지성인의 종교로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데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자유당때 신자들의 정치참여는 사실상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셋째로 50년대와 60년대는 개신교의 각 교단이 진보와 보수로 분열하였고, 분열을 통하여 경쟁적으로 개척하고 전도함으로 오히려 교회가 성장하였다. 아울러 60년대 각 교단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신앙고백을 채택하거나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미 전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단종파와 60년대의 토착화와 사회참여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기독교, 특히 보수교회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기는 한국교회가 양적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70년대와 80년대 초기의 성장의 요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로, 70년대는 모든 교회들이 확장을 위한 전도운동과 교회개척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또한 연합을 통한 대전도 집회도 교회성장에 기여하였다. 일부 대교단 교회들은 교회와 신자증가의 목표를 설정하여 교단이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감리교.성결교 등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둘째로, 한국사회의 도시화는 교회성장에 큰 변화를 초래한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 집중화는 더욱 서울지역의 교회에 많은 성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전통적인 사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나 유교 등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종교보다는 개인 지향적이고 사회의식이 강한 기독교를 선택하게 한다. 따라서 농촌은 기독교가 약한 반면 도시는 교회가 성장하였다. 그 결과 특히 서울은 인구의 20% 정도가 신자인 반면 부산과 대구 등은 10%미만이고 경남지역의 진주 등은 기독교 인구가 4-5%에 불과하고 강원도와 충청도도 동일한 수준이다. 셋째로, 70년대에 와서 한국교회는 목사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목회전략이나 교회성장 전략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시대상황에 부응하는 목회가 많이 개발되었다. 철야 기도회, 성경공부, 제자훈련, 구역제도의 강화, 평신도 훈련 둥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이것은 자연히 평신도의 동원을 자극하여 질적 양적 성장에 기여한다. 그리고 70년대 한국교회는 군선교 경찰선교 병원선교 학원선교 산업선교 등 모든 분야에서 교회의 전도 영역을 확대하였다. 넷째로, 기독교 메시지의 현실 지향적으로의 축소화(down-to-earth)와 '성령운동'의 강화는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지만, 반면 이것은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70년대는 특히 오순절교회가 급성장한 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복음의 현세적 가치, 즉 축복과 성공에 기독교적 가치를 많이 두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본능을 최대한 고려한 것이다. 여기서 70년대는 기독교의 가치관이 시대의 가치관과 영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의 많은 강단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현실의 축복과 성공으로 축소함으로 교회의 변증적 사명은 외면하고, 여기서 교회는 이단의 준동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한다. 복음의 축소화 현상(down-to-earth)은 물론 소외된 자들을 고무하여 기독교 신앙이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이것은 자연히 이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이적에 대한 기대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보다는 신앙의 내면화가 우선시된다. 이점에서 세계 제일의 교회가 당시에 한국에서 등장하였지만 결코 즐거운 자랑만은 못되고 있다. 다섯째로 70년대 말 한국교회, 특히 보수적 장로교회는 많은 분열을 하였고, 분열은 무인가 신학교를 부채질하여 많은 교역자를 양산하였다. 교역자의 양산은 교회개척을, 교회개척은 한시적이나 경쟁에 의하여서 신자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 개척도 90년대에 와서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끝으로 70년 후반과 80년대 초기는 정치적으로 갈등과 혼란의 시대였다.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위기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성장하도록 섭리하셨다. 정치와 사회불안 심리는 자연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서 정신적 위안과 도피를 찾게 한다. 그러나 70년대의 성장을 지나치게 정치불안에서만 찾아서는 안된다. 70년대는 정치나 경제가 안정된 일본이나 미국에서 종교가 부흥하는 시대였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바로 70년대에 자기들의 전통종교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특히 원리주의자들이 활발하게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란의 회교혁명은 70년대 종교부흥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반드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손색이 없는 교회라는 보증은 없었다. 양적 성장 이면에는 또한 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아 성숙이냐 성장이냐는 논란도 제기되었다. 이것은 결국 다른 사회적 복합요인과 상승 작용하여 90년대 초기부터 성장의 한계를 드러냈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부단한 갱신과 자기변혁의 노력이 요구된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침체기로 보는데, 현재의 침체의 원인을 요약하면 외형적 성장에 치우쳤던 교회는 질적으로 미성숙을 드러내었고, 그 결과 사회적인 공신력을 상실하였다. 교회의 분열은 한때 경쟁을 통한 성장을 가져올 수도 있으나 결국은 교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킨다. 경제안정과 사회안정으로 레저문화의 발전은 서구교회처럼 교회성장을 둔화시킨다. 이것은 경제성장과 영적 성장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청년층 학생층 유년주일학교의 약화는 미래교회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외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부흥하는 타종교의 세력과 종교다원주의의 분위기는 서구의 퇴각과 더불어 기독교에 도전이 되는데, 최근 한국도 불교의 부흥은 교회성장에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고 본다.
2.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
1)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현재
다음 한국교회의 선교를 논하면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지만 선교사가 가장 많이 나간 때는 l980년대 후반이다. 따라서 해외선교의 역사는 아직도 짧은 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벌써 해외선교에서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공식적인 해외선교사는 약 3,500명이나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알려진 선교단체를 거치지 않고 나간 선교사의 숫자를 합하면 적어도 4,0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피선교국은 대부분 러시아 중국 필리핀 등 몇 나라로 집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특징을 분석하고 바람직한 선교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해외선교가 시작되었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에 진정한 회개와 영적 중생이 가능한지 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참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은 물론 한국교회의 영적인 힘은 곧 선교로 나타났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도 영적 부흥의 결과로 선교를 시작한 서구의 개신교와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l970년대에 본격적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할 때는 l907년의 부흥운동과 같은 부흥은 없었지만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가장 성장하는 때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선교에 있어서 영적 부흥과 더불어 양적 부흥도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초기는 물론 해방 후에도 교파선교로 시작하였고 아직까지도 교파선교 운동이 수적으로 단연 우세하다. 그러나 70년대 선교가 활발하지 못할 때는 초교파 선교운동이 한국교회 선교를 주도하였고, 현재도 창의적이고 특수한 분야는 초교파가 앞장서고 있다. 셋째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대체로 해외 교포 교회의 목회로 시작하였으나 점차적으로 타문화권 선교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개념과 정책에 혼선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며 일부 선교지에서는 타문화권 선교사와 교포교회의 목회자들 간에 약간의 거리가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넷째로, 한국교회는 선교운동으로 연합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서구교회도 선교가 교회연합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한국에도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7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교단은 신앙고백과 교리 면에서 서로 연합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선교운동과 국내의 전도운동은 이러한 장벽을 서서히 제거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미국 복음주의의 선교신학과 교회성장학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논하는 자들이 있으나 선교와 교회성장학이 신학적 콘센서스를 제공하는 장점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 러시아 중국 북한선교 등을 위하여 연합전선을 모색하는 것과 선교훈련을 공동으로 하게 된 것은 연합운동의 중요한 발전이라고 본다. 다섯째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목사선교사 파송의 선교에서 평신도 선교와 자비량 선교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이것은 평신도의 위치와 비중이 높아져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성직주의(clericalism)를 위협하는 것 같으나 불가피한 현상이다. 최근에는 여성선교사의 숫자도 점점 증가되어 여자가 남자를 수적으로 상회한다. 여섯째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국의 경제 정치적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과거 서구 선교가 식민주의와 함께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한국선교는 한국의 기업진출과 함께 하거니와 기업보다 먼저 간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경제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선교 역사에서 선교는 주로 문명이 앞선 나라가 후진의 나라에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유대에서 로마로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주 드문 예외의 경우이다. 특히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올림픽은 선교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한국교회는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영적 기초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일곱째로, 최근 한국선교는 서서히 영역을 동쪽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등 서남 아시아로 확대하고 있다. 이것은 공산권이나 회교권 등과 조우를 의미한다. 여덟째로. 한국 교회의 선교도 미전도 종족 선교에 박차를 가하여 국내에서 정보 교환 및 상호 협조를 강조하거니와 국제적인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다.
2) 한국선교 미래의 방향
21세기에는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현재의 선교에 대하여 자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 비기독교 종교들의 부흥, 특히 원리주의자들과 소수인종주의는 기독교 선교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 아시아는 종교적으로는 다원화 사회이다. 다원화 사회는 단일사상이나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더 포용적이라고 리차드 니버는 주장한다. 그리나 불행하게도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는 비타협적 비관용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외부로부터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유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회교권이나 일부 공산국가의 선교는 아직도 창의적 접근이 요구된다. 특히 현재 한국교회는 선교정책과 신학의 부재 및 돈 선교를 하며 선교가 경쟁적으로 되어간다는 비판도 듣는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적이면서도 동시에 선교지에 유익한 한국적 선교전략의 개발이 요청된다. 한국교회 선교의 바람직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선교지가 대부분 가난하므로 자립원리를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완전교회(ecclesia completa)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되었다. 다만 서구선교에 오랫동안 의존해 왔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자립의지가 결여된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둘째로 선교는 교회 대 교회, 흑은 선교회 대 교회나 선교회의 파트너쉽을 형성하고 기존교회의 강화를 선교의 목표로 하면서, 선교지의 복음화는 궁극적으로 원주민 지도자에 의존해야 한다. 선교는 조력자이다. 따라서 교회는 흥하고 선교는 쇠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 한다. 셋째로 선교를 위한 경제적 지원이나 물질 제공(공식적인 활동이나 사업)은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서 해야 한다. 선교비 후원으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선교비가 공식 루트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넷째로 선교는 궁극적으로 원주민에 의한 원주민 교회의 설립과 성장이므로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선교에 주력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고급인력의 선교사가 절실히 요망되며 선교지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한국에 초청, 훈련시키는 방법과 중간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신학교의 교수들이 가서 강의하는 것도 검토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한국교회는 '창의적 접근지역'의 선교를 위하여는 봉사와 개발의 평신도 선교를 계속 강화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 선교운동이 '성직주의'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보이나 선교를 해야 할 곳은 회교권 등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 사회이다. 따라서 개발과 봉사를 위한 선교가 불가피하며, 이것은 부득이 펑신도의 선교를 필요로 한다. 최근에는 비상주 선교도 이미 시도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여섯째로 한국교회는 선교지에서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지양하고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필리핀에서 장로교 신학교는 한국 장로교 선교의 협력의 작은 모델이 되고 있으며 최근 모스크바에 일부 장로교 선교회가 공동으로 신학교를 운영하도록 결정한 것은 바람직한 협력이다 일곱째로 현재 한국교회는 개교회 단위로서 선교회를 조직, 대규모로 선교를 하는 일이 많은데 이것이 물론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나 개교회 단독선교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부 교단선교가 정치화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선교훈련 및 정책의 일원화 등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한 선교지에서 같은 교단출신의 선교사들이 다른 선교 프로젝트에 의하여 달리 선교를 하며 경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교단선교가 개교회 선교를 흡수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여덟째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선교의 대상지역을 좀 더 구체화하여야 한다. 즉 국가단위의 선교지 개념에서 인종단위의 선교, 즉 미전도종족 전도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미전도 종족 선교운동은 일부 초교파 선교운동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아홉째로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위기는 선교이론이나 전략의 문제도 있지만 궁극적인 위기는 사람의 위기이다. 즉 적절한 사람(right person)을 적절한 장소(right place)에 보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원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임명제도 고려되어야 한다(행 l3:l-3). 여기에는 교회와 초교파 선교회간의 협력이 중요하다. 특히 초교파 선교회는 개교회의 인정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을 선발, 파송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결론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교회로 발전하여 21세기에는 기독교 질서가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세계적인 교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장보다는 내적 성숙에 힘써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성경에서도 선지자들은 항상 양적 성장보다는 언약의 교회로서 순수성과 책임성을 강조하였다. 경제성장과 교회성장은 함께 하기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적 부흥과 갱신을 통하여 성장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세계최고의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의 50개 대교회 중에서 23개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순수교회를 지향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아울러 선교도 경쟁과 돈 선교와 원리 없는 선교를 한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립원리와 협력정신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선교의 재정비가 요구된다.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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