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은 중종 17년(1522) 외가인 강릉에서 혼인했는데 부친 신명화(申命和)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르고 중종 19년(1524) 서울로 올라와 시어머니를 처음 만난다. 율곡은 모친이 그 뒤에도 친정에 가서 살다가 '신축년(1541)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셨다'고 썼다. 사임당이 혼인 19년 만에 시댁에 정착했다는 얘기다. 당시에는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친정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사임당의 모친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율곡은 외할머니에 대한 기록인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도 남겼다. 남편 신명화가 위독하자 왼손 중지 두 마디를 자르며 "원하건대 저의 몸으로 남편의 생명을 대신해주소서"라고 하늘에 빌어 신명화의 병이 나은 감천(感天)기록이다. 이 사실은 '중종실록'에도 실려 있고 이씨는 열녀로 선정된다. 그러나 이씨도 혼인 후 시댁으로 올라왔다가 모친 최씨가 병이 들자 외가인 강릉으로 내려가 시병(侍病)했다. 강릉으로 찾아온 남편에게 '당신은 서울로 올라가시고 저는 여기 남아서 각자 노모를 시봉하자'고 제안했다.
'이씨감천기'는 두 사람이 이렇게 각자 부모를 모신 지 16년이 됐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준다. 16년간 강릉과 서울을 오가던 신명화가 어느 날 병이 나 위독했다. 그러자 이씨는 외증조부 최치운(崔致雲)의 묘소로 달려가 빌면서 단지(斷指)했던 것이다. 사임당이나 그 모친 이씨는 시댁보다는 친정, 외가와 더 가까웠다.
율곡이 그린 '선비행장'의 마지막은 '평소 묵적(墨迹)이 뛰어났다'는 예술가의 이미지다. 그런 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전형이 된 것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그를 성리학의 대가인 송(宋)나라 정호(程顥:정자)의 모친과 비교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5만원권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가 아니라 '어려서 경전(經傳)에 통달한' 학자이자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다(선비행장)'는 예술가로 기려야 실제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