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보다 진해라 조선여인의 향기
| 오죽헌-허난설헌 생가터, 익숙한 강릉의 낯선 여행 |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강릉. 이곳보다 더 익숙한 여행지가 또 있을까요. 동해를 찾는 이들이 먼저 가닿게 되는 바다가 바로 강릉의 바다입니다. 강릉에 닿고 난 뒤에야 ‘다 왔다’는 안도감 속에서 다음 목적지를 고르게 되지요. 목적지가 어디건 동해로 향하는 여정의 출발은 강릉입니다. 예컨대 양양이나 속초를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면 차로 강릉까지 가는 길은 ‘이동’일 뿐이고, 강릉에서부터 양양이나 속초로 향하는 길에 올라야 비로소 ‘여행’이 된다는 것이지요. 강릉의 명소는 익숙합니다. 경포대와 선교장, 오죽헌…. 사실 익숙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좀 낡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렇듯 잘 알려진 명소는 ‘우등생의 모범답안’과도 같습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정동진 일대를 빼놓는다면, 강릉의 명소들은 주로 단체여행객이나 중년 이후의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경포해수욕장은 밋밋하고, 선교장은 가보지 않았어도 다녀온 듯하고, 초당두부도 굳이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큼 특별하달 것이 없지요. 그럼에도 봄날의 강릉을 찾아갑니다. 하나둘 꽃송이를 틔운 벚나무를 만나기 위한 것도, 긴 여정을 앞둔 겨울 철새들이 마지막 깃털을 고르는 경포호의 정취를 보러 떠난 길도 아니었습니다. 눈길을 휘어잡는 절경보다는 그곳에 오롯이 깃든 정신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사실 강릉의 진면목은 빼어난 경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포호에 뜨는 다섯 개의 달과 같은 비유적인 흥취나, 그곳을 거쳐간 옛사람들의 은근한 향기가 으뜸인 것이지요. 강릉에는 조선시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여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한 곳은 신사임당의 오죽헌이고, 또 한 곳은 허난설헌의 생가터입니다. 두 곳 모두 순백의 자두꽃이며 분홍빛 벚꽃, 붉은 명자나무꽃이 만발해 있지만, 상춘의 나들이로 휙 스쳐 가기에는 아쉬운 곳들입니다. 먼저 들른 곳은 오죽헌입니다. 아들이 없는 친정에서 아들잡이를 하며 시집간 뒤에도 오죽헌에 머물던 신사임당은 이곳에서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았습니다. 오죽헌에는 사임당과 아들 율곡이 두고 보았다는 600년 된 홍매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때가 늦어 매화는 다 지고, 남은 꽃잎만 분분히 날리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매화가 400여년 전쯤 사임당이, 또 그의 딸 매창이 빠른 붓으로 탐스럽게 그려냈던 바로 그 매화입니다. 매화나무는 그때도 제법 아름드리였겠지요. 오죽헌의 매화나무 앞에 서면 시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이름난 오죽헌보다는 초당의 솔숲을 끼고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터가 더 발길을 오래 붙잡습니다.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사회의 모범적인 여인상이라면, 그 정반대 쪽에 허난설헌이 있습니다. 시대와 불화했으며 비극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던 허난설헌의 삶은 짧고도 강렬합니다. 그가 남긴 시구절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릿아릿하고, 또 핏빛처럼 선명합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최후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가터 안채에 꽃을 떨구고 있는 늙은 매화는 마치 고통스럽게 가지를 뒤틀고 서있고, 꽃망울을 하나둘 틔우고 있는 벚나무도 고목의 늙은 가지가 힘겨워 보였습니다. 강릉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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