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성극선

마지막 증언-김종철 글

은바리라이프 2009. 6. 21. 21:34

마지막 증언-김종철 글

나오는 이들 : 어머니, 아들 , 지도원


무대가 밝아지면 두 사람이 제각기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흰머리가 제법 많이 보이는 빗질하지 않고 지저분한 채 초췌한 얼굴에 뭔가 중얼거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와, 그 반대편에는 금테 안경을 쓴 아들이 두려움과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다.  이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이때, 이들에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아들은 순간적으로 그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본다.  지도원이 손에 서류를 들고 뒷짐을 진 채 들어온다.  이들은 모두 북한 사회의 일정한 옷을 입고 있다.


아  들:  (지도원에게 애타는 듯) 이보시라요, 지도원 동지!

지도원:  말하기요, 동무

아  들:  분명히 조사해 보면 알갔지만 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없었습네다.

지도원:  (다소 차갑고 냉정하게) 그럼 동무는 그 시간에 어디 있었지?

아  들:  만경대 학습실입네다.

지도원:  거기서 뭘 했소?

아  들:  주석동지의 어록을 학습하고 있었습네다.

지도원:  누구하고?

아  들:  저 혼자 있었습네다.

지도원:  누구 본 사람 없었소?

아  들:  네?

지도원:  아, 동무가 그 시간에 만경대 학습실에 있었다는 걸 누가 확인해 줄 사람이 있는가 이 말이요.

아  들:  (머뭇거리며) 저…

지도원:  (노려보다가) 아무도 없었소?

아  들:  만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네다.

지도원:  흐음 … 기렇다믄 … 더 이상 …

아  들:  (애원하듯) 지도원동지! 사실입네다, 전 그때 집에 없었습네다.  사실이야요, 믿어 주시라요.

지도원:  (서류를 흔들며) 증거를 대기요 증거를 … 동무도 잘 알갔지만 이번 사건이 사실로 확인되기만 한다면 동무는 당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요.

아  들:  지도원 동지! 제 말을 믿어 주시기요.

지도원:  동무는 그 시간에 당신의 오마니와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아  들:  아닙네다, 지도원 동지 …

지도원:  (큰 소리로) 변명 집어치우기요.

아  들:  (역시 큰 소리로) 변명이 아닙네다.  전 결백합네다.

지도원:  (마음을 가라앉혀 차분한 목소리로)  동무!  동무의 인생이 정말로 아깝수다.  수령님의 은덕을 입고 당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당이 입혀주는 옷을 입고, 일본으로 유학까지 보내 공부를 시켰더니 성경책을 몰래 가지고 와서 그래도 같은 핏뎅이라고 즈이 오마니한테 선물로 줘?

아  들:  아닙네다.  지도원 동지 …

지도원:  아니면 어서 말을 하기요.

아  들:  말했지 않습네까, 내레 정말이지 성경책을 들여다본 적이 없시요.

지도원:  시끄럽수다.  내레 동무 말 못 믿갔시요.

아  들:  지도원 동지!

지도원:  사실을 밝혀 내고야 말갔소!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동무도 잘 알갔지. (돌아서서 나가 버린다)

아  들:  (지도원이 나간 쪽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로)  내래  성경책 들여 온 적도 없고 들여다 본 적도 없수다레.  내레 그런 적 없다는데 왜 자꾸 반동으로 모는 기야요.  (엎드린 채 흐느낀다)  난 반동이 아니야요.  반동이 아니란 말이야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향해) 오마니, 왜 한마디 말을 하지 않으셨시요,  오마니가 그때, 난 없었다고 왜 말 한마디 않으셨시요.

어머니: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미안하다. 나 때문에 …

아  들:  그런 말하지 마시라요.  내레 이렇게 될 줄 알았지요. 그놈의 성경책 진작에 불태워 없애 버려야 했을 것을 …

어머니:  (그제서야 아들을 바로 보며) 야, 그 성경책 내레 꼭 찾아야 한다.

아  들:  오마닌, 반동이야요.

어머니:  네가 말하는 그놈의 반동, 백번 해도 좋으니 제발 그 책만은 꼭 찾아야 한다.

아  들:  오마니, 제발 부탁이야요, 이 아들놈을 생각해 주시라요,  오마니.  내레 오직 이 나라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서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온 놈이야요.

어머니:  네 할아버진 목사님이셨다.

아  들:  출신성분 얘기만 나오면 기가 죽어야만 했던 내레 이 심정, 오마닌 헤아릴 수 있갔시오?

어머니:  빼앗긴 그 성경책도 할아버지께서 보시던 책이었어.

아  들:  오마니도 아시잖습네까.  그동안 우리 고생 많이 했시요.

어머니:  이 땅에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냐?

아  들:  영웅칭호를 받기는 그리 쉬운 게 아니야요.

어머니:  이 땅의 영웅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  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내게 말하시라요.

어머니:  (흠칫 놀라며) 병으로 돌아 가셨어!

아  들:  거짓말 마시라요.

어머니:  그 얘긴 이제 와서 꺼낼 필요가 없잖아

아  들:  언젠가 들통날 일, 내레 미리 막아 둬야 할 필요가 있시요.

어머니:  느이 할아버지는 당에게 속으셨어!

아  들:  당은 이제까지 인민들에게 속인 적이 없다고 배웠시요.

어머니:  배운 거 하곤 틀려!  이 땅엔 당이 가르치는 것과 하는 짓이 같은 게 하나도 없었어!

아  들:  그런 반동언사 그만두시라요.

어머니:  당이 느이 할아버지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셨다고 했지?

아  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야요.

어머니:  그래, 나중엔 그 말을 하면서 예배당을 못쓰게 했지.

아  들:  예수교는 양키 놈들이 많이 믿는 자본주의의 썩어 빠진 종교란 걸 오마닌 모르십네까?

어머니:  종교를 누가 믿건 그거이 문제가 아니야.

아  들:  종교래 인민들의 정신상태를 나태하게 만드는 벌레와 같은 독충이야요.

어머니:  느이 할아버진 하나님의 말씀을 이 나라 모든 인민들이 깨닫길 바랐던 거이야.

아  들:  남조선 해방을 위해 밤낮으로 피땀 흘리며 작업하고 노동하는 해방역군에게 말씀은 무슨 놈의 말씀이야요.

어머니:  신탁통치 하기 전,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당은 이 북조선 사회에도 좋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민들에게 교화해 달라고 하더니 삼팔선이 그어지고 영영 내려갈 수 없게 되자 예배를 못드리게 했지.

아  들:  지금도 우리의 용맹한 해방전선의 용사들이 내려와, 해방시켜 주기만을 남조선  인민들이 기다리고 있시요.

어머니:  느이 할아버지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신다.

아  들:  그런 소리하지 마시라요.

어머니:  (웃저고리를 벗어, 숨겨 두었던 실과 바늘을 꺼내, 저고리 안쪽으로 글씨를 수놓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느이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니?  (어느새 눈물이 글썽인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이 모여 있는 마을 한 복판에서 죽창으로 온 몸을 …

아  들:  (큰 소리로) 그만하시라요.  내래 누가 그런 소릴 들을까봐 두렵수다레

어머니:  느이 할아버진 순교하신 것이야.

아  들:  아닙네다.  우리 할아버진 위대한 용맹투사로 항일 유격대 대원으로 계실 때 전투하다 돌아가셨습네다.

어머니:  이놈아, 느이 할아버진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어!

아  들:  오마닌 이 아들 죽는 꼴보고 싶어서 그러는 기야요?

어머니:  차라리 죽자.  이렇게 살아가선 무얼 하갔니?

아  들:  오마닌 반동이야요,  노동적위대 제3대대 5소대 김간난.  내래 오마니 동무를 정식으로 고소 하갔시요.

어머니:  오로지 당과 주석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인륜을 저버리고, 인정사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

아  들:  오마니 … 내래 살아야 갔시요.  이 국가에서 영웅칭호를 한번 듣고 죽어야 갔시요.  우리 할아버지 동무가 출신성분이 목사라는 것, 아무도 모르고 있시요. 거저 위대하게 싸우다 돌아가신 영웅으로만 알고 있시요.  아무도 모르고 있는기야요. 오마니!  내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충성해서 김일성 대학 졸업하고 금년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거 오마니도 아시지요? 내레 일본에서 무얼 공부한지 아십네까?  오마니!  의술을 배워 왔시다래.  그래서 이 나라에 열심히 충성하려고 했시오.

그런데 이제와서 이렇게 반동으로 몰리면, 그리고 출신성분 얘기가 나오면, 내래 이 사회에서의 인생은 끝장이 나는 기야요.오마니!  부탁이야요.  제발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시라요. 내래 오마니 곁에서 성경책 보지 않았다고 말이야요.  오마니도 그렇게 말 하셨잖아요. 그 성경책이래 내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고…

어머니:  할아버지가 보던 것이라고?

아  들:  그러면 출신성분은 어떻게 되구요?  그냥 작업장에서 주운 거라고 말하시라요.

어머니:  그럼 작업장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조사를 받게 될텐데?<br>아  들:  오마니가 작업하는 곳에 일본서 온 북송동포래 있디요?  그 동무한테 뒤집어씌우면 되는 기야요.  오마니!  제발 이 놈 좀 살려 주시라            요.  내래 그 시간에 학습실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시킬 수만 있으면 내 혐의는 풀리는 기야요.   그런데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   이제 오마니와 나는 이 사회에서 영원히 회생할 수 없는 반동이 되어 아오지로 가는 기야요.

어머니:  가야지, 가야지.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  내래 느이 할아버지가 가신 그곳으로 가고 싶어야,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에 가고 싶어!  이젠 더 이상 살아서 무엇하갔어.  내래 가고 싶어야.  (이때, 또다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그 소리에 둘은 황급히 그쪽을 바라본다) (그 소리에 맞추어 들어오는 지도원)

지도원:  이 보기요 동무!  내래 직접 동무가 그 시간에 있었다는 그 학습실에 다녀왔는데 아무도 동무를 봤다는 사람이 없더구만 … 그리고 동무의 오마니가 성경책을 보다가 5호 담당원에게 발각 될 때, 동무가 그 자리에 같이 있다가 발각이 된게 아니야? 그렇지?

아  들:  지도원 동지!

지도원:  좋소, 얼마든지 말하기요.

아  들:  내래 학습실에서 학습을 하다가 집으로 갔더니 …

지도원:  집으로 갔더니 …

아  들:  그때, 오마니 혼자서 성경책을 보고 있었시오.

지도원:  끝까지 변명을 하려고 하는구만

아  들:  변명이 아니야요.

지도원:  계속 하기요.

아  들:  내레 그 광경을 보고 몹시 놀라고 있었는데

지도원:  (빈정대는 투로)  놀라긴?  그런 광경을 종종 봐 왔을 텐데 …

아  들:  그때, 5호 담당원이 들어온 거야요.

지도원:  그러니까 애매하게 동무는 한데 묶인 것이다. 이말이군?

아  들:  맞습네다.  지도원 동지 …

지도원:  흠… 동무가 그 학습실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이 된다면 일은 쉽게 해결이 되는데… 동무가 이렇게 주장하는 대로 누명 같은 것도 쉽게 해결될 거고 … 동무는 일본에서 무얼 공부했지?

아  들:  의학을 공부했습네다.

지도원:  의학?

아  들:  의학 중에서도 사람의 눈을 치료하는 학문입네다.

지도원:  사람의 눈을 치료하는 학문이라…?  (노려보며) 보통 당원이면 꿈도 못 꾸는 길인데 동무는 유학까지 했구만 … 그거이 다 누구의 은덕인줄 아시오?

아  들:  (갑자기 차렷 자세를 하며)  하늘의 태양보다 더 밝으시고, 인류 모든 문명 학문의 근본이 되시고, 이 세상의 모든 빛들보다도 더 반짝이며, 하늘과 땅, 산과 강물의 모든 통치권자이시며, 우리 모든 인민들의 영원한 아버지 김일성 수령 동지의 은덕입네다.

지도원:  흠 ….  알긴 아는구만   나도 동무래 미워하는 맘 조금도 없수다.   하지만 동무의 알리바이가 설명이 안되는 지금에야 내 어쩔 수 없수다.  이해하기요.   동무가 주장하는 것만 확인이 된다면 문제는 없소.  그러나 그거이 확인이 않되면…

아  들:  어떻게 되는 겁네까?

지도원:  그야 동무가 더 잘 알지 않가서?  이제까지 공부한 것, 유학까지 갔다 와서 이 조국을 위해 충성하려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 갔지, 동무의 인생이 요절이 난다 이말이야.

아  들:  지도원 동지 제발 부탁입네다.  날 살려주기요. 내래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온 목표는 바로 그겁네다.  오로지 당과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려고 살아온 겁네다.  내래 성경책을 들여다 본 적이 정말 없수다레

지도원:  동무래 아무리 기렇게 애원해도 소용없는 일이야.  증거가 있어야디, 증거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를 향해) 그리고 동무!  동무는 동무의 아들을 죽이려구 환장했구만, 죽으려면 혼자 죽던가 … 성경책을 읽다니…  동무는 더 볼 것도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오.   이 젊은 동무래 확인만 되면 그땐 모두 일이 끝날 거지만.  (나가면서) 노인네가 감히 겁도 없이…(퇴장한다)

아  들:  (혼자말로)  증거라… 증거라 어디 있나?  (골똘이 생각하다 이내 풀이 죽어서)  아무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내래 이제 죽는 기야요.  내 인생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당과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치려 했던 난 이제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당하는 일만 남은 기야요.

어머니:  (감추었던 저고리를 다시 꺼내 수를 놓는다)   얘야, 내가 왜 그렇게도 성경책을 소중히 여겼는지 아느냐?

아  들:  듣고 싶지 안수다!

어머니:  (아들에게 다가서며) 내래 왜 무서운 줄 모르고 성경책을 읽은 줄 아느냐?   곧 죽을 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아  들:  그만 하시라요.

어머니:  내래 하나님말씀 많이 알지는 못해도 말이야,   하나님이래 우리 인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아  들:  오마니!  자꾸 그런 식으로 반동언사 계속 랄 거야요?  내래 사상 학습시키려 하지 마시라요.

어머니:  사상 학습 아니야. 넌 이제까지 누굴 위해 살았냐?

아  들:  수령동지입네다.  내래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온 이유는 아바이 수령 동지만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야요.  당과 조국을 위해 말이야요.

어머니:  그래 당과 조국을 위해 살아온 너에게 과연 당과 조국은 무얼 주었느냐?  결국은 널 반동으로 몰아 곧 죽이려고 하지 않으냐 말이야.  당과 조국은 한 때 뿐이야.

아  들:  그거이 오마니가 반동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야요.

어머니:  당이 보기엔 반동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읽어야 하는 거이야.

아  들:  신은 없습네다.  신은 오로지 아버지 수령동지뿐입네다.

어머니:  내래 목숨을 걸고 믿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창조주야.   이 늙은이가 죽음 앞에서 뭐이 두려워 없는 소릴 하갔느냐?  이 목숨 죽기 전에 내래 너에게 꼭 만나게 해주고 싶은 분이 있어야.  북조선이 생긴 이후, 삼십 년이 넘게 오늘 이 순간까지 오로지 두손 모으고 내 목줄기에 힘줄이 서도록 살아온 힘이 무언지 알아?   내래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어!  난 오늘 죽어도 좋고, 지금 죽어도 좋아!  이렇게 죽음 앞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이 뭣 때문인지 알아?   내래 이 가슴속에 하나남이 있기 때문이야.  (하늘을 바라보며)   내래 천국이라 떠드는 이땅보다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지.   그곳은 하늘에 있는 고향이야.

아  들:  (큰 소리로) 오마닌 반동이야요!

어머니:  내래 반동이라도 좋다.

아  들:  (어머니에게 다가가) 오마니!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시라요.   오마닌 그렇게 죽으면 그만이지만 내래 어떻게 되는 겁네까?   오마니 때문에 내래 이제까지 공부 한 것 다 소용 없이 죽고 마는 기야요.  앞으로 당과 조국을 위해 충성을 해야 할 젊은 군사가 되고 싶은 거야요, 오마니.

어머니:  (눈물을 닦으며) 내래 이땅에 태어난게 잘못이지.  찬송가 소리가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지만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어 야.   요즘은 죽창에 찔려 돌아가신 느이 할아버지가 왜 그렇께 보고 싶은지…  내래 느이 할아버지 따라 하늘나라로 가고 싶어 죽갔어 야,   느이 할아버지가 불러주시던 찬송가 소리하고 성경말씀이 자꾸 귀에 어른거려…  요즘은 자꾸만 죽고 싶은 마음 뿐이야.  얘야, 내래 왜 이러는지 알아?

아  들:  오마니!   내래 출신 성분 속이면서 남들에게 발각날까봐 마음 졸이면서 공부하고,   코피흘리며 잠못자고 공부한 것도 …  오마니! 내래 일본에서 얼마나 공부 열심히 했는지 아십네까?    남들, 일본에서 놀러다니고 그럴 때, 난 입을 악물고 공부했읍네다.  왜 그랬는지 아십네까?  내래 왜 그랬는지 아십네까?  내래 한번 잘 살아 보고 싶었습네다.   고급당원이 되고, 영웅칭호를 받고 싶어서 그랬습네다.   그러면 오마닌 작업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나도 한번 고기국물 좀 실컷 먹어보고 싶어서 그랬시요. 그런데 오마닌 뭽니까?  이  아들녀석 반동으로 만드는 일밖에 더 했습네까?

어머니:  부질없는 짓이야.  당은 네가 죽도록 충성해 주기를 바래서 그랬던 것 뿐이야.   당이 공부를 시켜주고 당이 밥을 먹여주고…  이젠 넌 오로지 당을 위한 부속물일뿐이야.

아  들:  내래 당을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용맹한 군사야요.   보시기요, 내래 증거만 찾는다면 난 살 수 있는 기야요.

어머니:  (여전히 저고리에 수를 놓고 있다)

아  들:  (그 모습을 보고)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요.  (다가가서 저고리에 수를 놓는 것을 들여다본다)  생명줄 던져 … 구원해 … 주옵소서?  이거이 뭡네까?

어머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  들:  (저고리를 갑자기 홱 뺏아 던지며 큰소리로) 집어치우기요!

어머니:  (아들의 이런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우린 지금, 삶의 광야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피비린내 하는 살육의 밤을 어둠과 공허의 축제에 휩싸여 몸부림치고 있다.   이 어두운 밤을 밝게 할 오직 한분.

아  들:  (자리에 주저앉는다) …

어머니:  … (둘은 서로 한동안 말이 없다)

아  들:  (갑자기 무엇이 생각 난 듯) 어록? 그리고 통행증?

어머니:  (이런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들:  주석님의 교시가 수록되어 있는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기 때문에 …  그래 일정한 시간에만 빌려 볼 수가 있는 거이야.  내래 그 책을 봤지 …   제3장, 주석님께서 연두교시하는 대목이었어…   내래 그 내용도 기억하고 있어…(계속 골똘히 생각하며)   그런데 내가 그 책을 봤다는 증거이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없어, 그래 내가 그것을 책갈피에다가 … (오마니를 향해 몹시 기쁜 듯) 오마니!  찾았시오.    내래 그 시간에 학습실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시오.   내래 다음주에 청진으로 내려갈려고 오늘 날짜로 발급받은 통행증을 책갈피에다 끼워놓고 깜빡  잊고 그냥 온기야요. 이제 나는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네다.    내레 말 하갔시오.  (밖으로 향해 냅다 소리를 지른다)  이보기요 지도원 동지!  내래 증거를 찾았수다!   그 시간에 학습실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읍네다!    내래 이제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 주갔시오!    지도원 동지!  지도원 동지!  (밖에선 아무런 대답소리가 없다.  어머니에게)   오마니 난 이제 살았수다.  내래 이제 사는 기야요.

어머니:  (이러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지막히) 넌 살겠느냐?

아  들:  (이말에 다시 얼굴이 굳어지며 뒤로 물러난다) 그럼 … 오마닌 …

어머니:  내래 혼자 …죽어야디 (팽개쳤던 저고리를 다시 주워들고 수를 놓는다)    하나님은 내게 생명줄을 주실 것이야.  내래 기도 하는 게지.  그래, 넌 살거라.    네가 바랬던 대로 이 당과 나라에 충성해야지.  그렇게 살다가 부질없이 죽는 게야.   더 이상 바라갔니?  영원한 것도 없이 … 하지만 내 영혼이래 영원하디 …

아  들:  오마니! 영혼이래 영원하다니요?  그거이 무슨 소립네까?   죽지 않고 영원하단 소립네까?

어머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 하늘을 보며) 이땅에 영웅칭호를 듣고 훈장을 받으며 고급당원이 된들  오늘 저녁에 그 목숨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갔니?   하지만 내래 지금 반동으로 죽어도 마음이야 편하다.

아  들:  죽는데 어케 맘이 편하단 말입네까?

어머니: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   얘야… 이 오마니래 죽기 전에 마즈막 말이려니 생각하고 할테니 들어 보갔어?

아  들:  사상교육이래 하지 마시라요.

어머니:  한 분이 있었지…그분에겐 외아들이 있었어…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계야…

아  들:  사랑은 자본주의 국가에 썩어빠진 인민들이 하는 아편이야요.   사랑은 노동 가장 큰 저해요소이고 남조선을 해방하는 대과업에 필요없는 것입네다.

어머니:  그분의 사랑은 그런거이 아니야.

아  들:  그럼 뭡네까?

어머니: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어.  그 외아들도 우리를 사랑하셨지.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 돌아 가셨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

아  들:  예수?

어머니:  그래, 그분이 바로 예수야.

아  들:  오마닌 아편중독자가 된거나 마찬가지야요.

어머니:  내래 아편 중독자래도 좋고 뭐래도 좋아.   느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십년동안 내래 간직해온 성경책,  그리고 내 가슴에 한번 떠나간 적이 없는 하나님, 내래 하나님이 꼭 붙들고 계시는 거야.  그래서 난 이제 죽어도 영원히 사는 거이야.   느이 할아버지가 계신 저 하늘나라에서 말이야.

아  들:  오마니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고,  또 몇십년 동안 간직해 오도록 한 그 거이가 바로 하나님 때문이란 말이야요?

어머니:  그렇다.

아  들:  오마니가 가신다는 고향이 …

어머니:  하나님의 나라.  이땅에 있는 이 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좋은 곳이지.

아  들:  계급투쟁이 없읍네까?

어머니:  그곳엔 반동이라고 모는 것도 없고 진절머리가 나는 전쟁 준비도 없어.  넌 이해하기 힘든 세상이야.

아  들:  (큰 소리로)미친 소리 하지 마시라요!

어머니:  (역시 큰 소리로)미친 소리가 아니야!

아  들:  …

어머니:  … (둘은 한동안 말이 없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기분나쁘게 들려온다)

아  들:  오마닌 저 소리가 뭔지 아십네까?   오마니께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소리 입네다.  오마닌 무섭지도 않습네까?

어머니:  (수를 놓던 저고리를 아들에게 건네주며)  아들아!  내래 이제까지 내 보호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데 뭐이가 무섭다고 하갔어.  

아  들:  오마닌 옛날에 고생하던 생각 않납네까?    먹을 것이 없어 옥수수죽 먹고 그것도 서로 먹을려고 싸우곤 했었디요?

어머니:  그 옥수수 먹을 때도 수령아바이에게 감사하고 먹어야 했었지

아들:  밤이면 추워서 서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싸웠습네다.

어머니:  그 이불도 이젠 아무것도 부럽디 않디.  하늘에 가면 그 모든 것들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  들:  … 오마니!

어머니:  …

아  들:  내래 증거를 말하면 오마니 혼자 죽갔지요?

어머니:  혼자 죽으면 어떠냐?  넌 네 말대로 당과 조국을 위하여 더 충성을 한다면서…

아  들:  그거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셨디 않아요.

어머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때부터 은은한 찬송가 소리가 들 려온다)  내래 내 마음속에 항상 계신 분이 있어야.  하나님이디.   내래 힘들고 절망 속에 있을때도 그 분이 날 위로해 주셨디.  저 찬송가 소리 들리디?  그래, 얼마만에 들어보는 찬송가 소리냐?  내래 어렸을 적에 느이 할아버지께서 불러 주신 노래디.   너도 어렸을 적에 저 찬송가 소리를 듣고 자랐어야.

아  들:  오마니, 내래 저 음악 소리 어렴풋이 기억납네다.    오마니께서 작없갔다 밤늦게 오셔서 부르신 노래디요.

어머니:  그래 남이 들을까봐 아무도 몰래 불렀디

아  들:  그런데 저 음악소리가 왜 지금 들리는 겁네까?

어머니:  하나님께서 날 오라고 부르시는 것 같구나

아  들:  기렇다믄 저 음악소리가 찬송가 소리였읍네까?

어머니:  기렇단다.

아  들:  저 찬송가 소리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 아닙네까?

어머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어머니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고이지만 그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차 있다)

아  들:  (그 모습을 보고)  오마니!  내래 오마니 기뻐하는 얼굴 처음 보는 것 같습네다.

어머니: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내래 왜 이렇게 자꾸만 눈물이 나면서 기쁜지 모르갔구나.

아  들:  그거이 오마니가 그 믿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야요?

어머니: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이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둘은 잡았던 손을 놓으며 그쪽을 바라본다.  이윽고 지도원이 등장한다)

지도원:  이제까지 내래 동무의 알리바이를 찾느라 고생했수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이 찾지를 못했어.  이젠 더 이상 알아보지도 않을 것이고 동무와 동무의 오마니는 심판을 받게 될 거이야.    뭐 재판이라고 해봤자 보나마나지… 뻔한 것 아니겠소?   동무래 아직까지 증거가 될만한 거이 못 찾았소?   (아들은 이말을 듣고 고개를 떨구 더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만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이러기를 한참…)

아  들:  (다시 지도원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을 연다)  내래 그 시간에 오마니하고 함께 성경책을 보고 있었수다.  (이말에 어머니는 몹시 놀라고 지도원 역시 그랬구나 하는 듯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짓는다)

아  들:  내래 재판장으로 가겠수다.   (하는 말을 마치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한번 보고 지도원의 앞을 지나 밖으로 퇴장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에서 떨어진 저고리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이때 조금 전에 들려 나오던 찬송가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려 나오면서 무대가 점점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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