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말씀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던 유태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약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사이비라고 말을 한다면 그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진리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우리만의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 오류라고 지적하는 것에 대한 증명이 없이 무조건 진리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억지’입니다.
희귀하게 생긴 돌이 신기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으며 그 돌 앞에 손을 모으고 비는 것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오직 예수’라는 믿음은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의 차이와 상반된 메시지에 대한 필연성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만일 진리라는 범위를 벗어난 해석을 적용하여 증명작업을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경이 오류임을 증명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진리란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옳은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에 성경적 진리가 따로 있고, 학문적 진리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둘 다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람의 학문도 하나님의 창조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며, 전도를 하는 것도 그 창조된 세상 위에 사는 이성적, 논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므로 성경적 진리와 학문적 진리는 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진리라고 주장을 하는데 그 진리가 전도의 대상인 사람의 학문적 진리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가 그들에게는 진리가 아니고 역시 ‘억지’가 됩니다.
진리란 ‘논리의 법칙에 맞으며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어도 옳은 것’입니다. 학문적 논리로 진리는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 혹은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써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렵게 말하나 쉽게 말하나 뜻은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누구에게 적용이 되어도 반드시 옳은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객관적, 논리적 기준에 부합해야 하며, 공관복음을 이해하는 우리의 이해 또한 이것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비 진리’의 바탕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바탕 위에서 서야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진리를 기준으로 공관복음의 차이와 상반된 내용의 필연성을 증명해 가겠습니다.
공관복음의 메시지는 거의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공관복음에 기록된 미묘한 차이의 필연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1. 먼저 비유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2. 또 비유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비유에 사용된 용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3. 그 용어의 뜻을 반드시 성경의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4. 그렇게 풀어진 비유를 다시 다른 복음서의 말씀들과 비교하여 필연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적 개념 안에서 서술하고 있지 않고 공간적 개념 안에서 동시성을 가지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1부 2부 3부 ... 로 나누어져 순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1부이고 2부는 없습니다. 보통은 노아이전과 모세율법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편지로 진행되는 과정이 서술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은 66권 전체가 서로 상관성을 가지고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상 7장 17절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위 기록은 성전의 모형의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인데 머리란 그리스도를 말하며, 바둑판과 그물과 사슬이라는 것이 성경의 ‘논리구조’를 묘사한 말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에 제시한 1,2,3,4 의 순서로 증명도 해야 하고 또 이해도 해야 합니다. 본 서에서 증명하는 모든 용어의 뜻과 설명과 증거가 되는 기록은 제시한 3, 4번 항목의 규칙을 따른 것입니다.
성경은 자체적으로 완전한 계시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4 복음의 구조
네 권의 복음서는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구성하는 논리가 일렬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가 메시지를 서로 논리적으로 엮어가며 메시지를 전하고, 그 결론으로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공관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이어서 해제를 게재하였습니다.)
* 비유의 분포를 보면 네 가지 경우로 분류가 됩니다.
1. 세 권에 중복된 비유
2. 마태, 누가에만 중복 된 비유
3. 마태에만 나오는 비유
4. 누가에만 나오는 비유
* 중복과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유
1. 공관복음은 각각 메시지를 전달받는 대상이 다릅니다.
마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대상이며,
마가는 성경에 대하여 잘 모르던 사람들이 대상이고,
누가는 멸절 당하는 이전 공의에 속해 있는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그래서 세권에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가르침은 각각 그 대상을 달리합니다.
2. 마가 - 마태 나, 마태 - 누가의 순서로 두 책에만 기록된 비유는 마가에서 전한 메시지를 마태에서 심화하거나
보충하여 설명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의 메시지를 누가에서 심화한 것인데,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전지식의 정도차이에 따라 메시지를 심화하거나 보충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무른 말씀과 딱딱한 말씀, 젖과 밥의 차이이며,
아이가 들어야하는 내용과 어른이 들어야하는 내용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3. 단독으로 기록된 비유 중에 누가에만 나오는 비유는 멸절당 할 이전공의에 속한 사람들을 힐책하는 내용이며,
마태에만 나오는 비유는 만민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4. 마가에만 나오는 비유가 특별히 이렇다 하게 없는 것은 마가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사전 지식의 결여로
비유로 표현할 메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는 성경의 내용을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인데,
그들은 성경을 모르니 비유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에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초 메시지 전달은 비유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비유를 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모든 풍자는 바탕 사건을 이해하고 있을 때에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각 비유와 메시지를 풀이하며 본 뜻을 헤아리는 것과 차이의 필연성을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본문은 쉬운 이해를 위하여 모두 오늘날 쓰는 어법으로 고쳐 쓰겠습니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마가 4장 3-9절: 들으십시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일부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흙이 깊지 않은 연유로 곧 싹은 나왔으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일부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게 되어 결실치 못하였고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습니다. 그 결실은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유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마태 13장 3-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일부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흙이 깊지 않은 연유로 곧 싹이 나왔으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일부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져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져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누가 8장 5-8절: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습니다.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일부는 바위 위에 떨어져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일부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져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돌밭과 바위의 차이
마가와 마태에는 돌밭에 떨어진다고 표현되어 있으나 누가에는 바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위는 이전 공의에 속한 자들에게 반석이 되는 모세율법이며, 돌은 그 바위를 조각낸 바리새인 같은 율법을 관장하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결국 돌밭이란 바위를 조각내 놓은 바리새인들이 ‘그릇되게 가르쳐 놓은 말이 많이 들어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해지면 그 마음이 처음에는 일단 수긍을 합니다. 또 수긍을 하기 싫어도 이성적 논리로 설명을 하는 것이므로 맞는 말일 수밖에 없기에 인정은 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성을 배제하고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누가는 선민에게 베푸는 비유입니다. 바위 위에 떨어 졌다고 하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본 나라 백성에게로 왔다는 뜻입니다.
❧ 해
마태와 마가에는 해가 돋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누가에는 없습니다. 해란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하나님의 공의, 즉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모세율법이 있을 때에는 모세율법하의 사람들에게 그 율법이 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성령의 법이 또한 해가 됩니다. 멸함의 대상인 이전 공의에 속한 자들인 유대인들에게는 그 성령의 법의 해가 돋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에는 해가 돋지 않는 것이므로 그 말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는 성령의 법은 거룩함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낮아짐과 비움을 실천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높음과 채움의 방향과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성령의 법이 완성되고 그 성령의 가르침이 전달이 되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 해가 되는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타는 것입니다.
❧ 흙
흙이 깊지 않다는 것에서 흙이란 말씀이 뿌려질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깊고 얕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뜻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뿌리가 없어 마른다”는 표현이 있는데 하나님께 그 마음이 닿아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육신의 아버지가 본래 나를 만든 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나를 만드시고 땅에 내려놓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바위 위에 내리는 이슬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그 이슬을 거부하고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슬이란 하늘의 보물이라고 묘사가 되는 용어입니다. 본 1번 항목의 끝부분의 <하늘의 보물>에 이 이슬에 관하여 신명기 내용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 가시떨기
가시떨기의 경우는 마가는 ‘떨기에’, 마태는 ‘위에’, 누가는 ‘속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가시란 본 비유를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재물에 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그 이외의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말씀을 잃게 되는 요인입니다.
마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 자체가 이미 세상에 속한 가시떨기가 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그대로 ‘가시떨기에’ 말씀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태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이 가시 떨기가 된 것이므로 그들 ‘위에’ 임하신 것이 됩니다.
누가를 받는 유대인들은 역시 마태처럼 가시떨기가 스스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땅에서 나신 것이므로 그들 ‘속에’ 오신 것입니다.
❧ 가시
마가는 가시의 기운이 막아 ‘결실치’ 못했고, 마태는 ‘막았으나‘ 아직 ‘결실치 못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의 경우는 차후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자기를 부인하라”는 가르침이 맞는다는 것은 알지만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 ‘따름’은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나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훼방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달려 공의를 실현하고 행위의 법을 마음의 법으로 변형시킨 성령의 법이 완성되면 그때는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말씀과 함께 가시도 “함께 자라” 기운을 막았습니다. 이 가시도 함께 자란 사람은 가롯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세상 것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께 와서 “형의 재산을 내게 나누어 주게 해 달라”고 부탁하던 사람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 누가에만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밟히며’ 입니다. 이 밟는 것은 자기의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밟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바로 밟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밟음은 성경의 논리적 밟음이 아니라 ‘억지’와 ‘비이성적 무지’를 동원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밟힌다고 표현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그 밟는 ‘발’은 인생길, 세상길을 가는 사람의 ‘사고’를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 발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발이 주석 같다”든가 “발로 서서” 혹은 “네 발이” 등이 그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의 ‘자기 이익의 추구’가 그들의 ‘발’이므로 그 발에 그리스도께서 밟히는 것입니다.
❧ ‘삼십 배’와 ‘혹 삼십 배’와 ‘백 배’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마가는 삼십, 육십, 백이고, 마태는 백, 육십, 삼십이며, 누가는 그냥 백입니다. 이것을 따져 보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어째서 육십 다음에 구십이 아니고 백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백이란 천이나 만과 같이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백이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씨를 뿌려 얻은 수확을 말합니다. 백 배의 수확을 했습니다. 성경 안에서 ‘만’은 하나님의 범위를, ‘천’은 그리스도의 범위를, ‘백’은 인생의 범위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래서 백 배란 사람이 씨를 뿌려 온전하게 거둘 수 있는 수확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명령을 따라 전도를 하려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말씀을 구하여 깨달음을 받은 뒤에 전도하여 그들 중에 몇 명이 되었든지 혹은 한 명일지라도 전도에 성공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백 배를 얻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십 배가 아니고 백 배인 것입니다.
삼십은 성전에 놓이는 금 그릇의 수이기도 하며 숫자적 의미로 ‘삼’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선택을 해주시는 경우가 이 수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사방으로 ‘세 문’이 나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세상에 놓여 있는 만민을 위한 좁은 문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이란 계획의 수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을 나타낼 때, 혹은 사단의 계획을 나타낼 때도 십이라는 수가 사용됩니다. 결국 삼십이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라는 뜻이 됩니다.
육십 배에서 육은 부정한 ‘세상’을 나타내는 수이고, 그 부정한 자들이 부정함을 씻을 수 있게 하신 것이 제사법이므로 하나님이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할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이 육십이 됩니다. 결국 자기를 ‘산 제사’ 드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수가 육십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수나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는 사실상 모두 같은 뜻이 됩니다. 어떤 선택을 받은 한 사람은 육십 배도 돼야 하고, 삼십 배도 돼야 하며, 백 배도 돼야 하는 것입니다.
# 마가는 삼십에서 시작해서 백으로 끝나는데 마태는 거꾸로 백에서 삼십으로 끝납니다. 이방인은 선택이 먼저 되어야 자기를 부인하여 산 제사를 드릴 수가 있고, 또 그 길로 가다가 백 배인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삼십부터, 즉 선택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택을 받은 뒤에 자기를 산 제사(육십)드려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 뒤에 그 다음 열매(백)를 맺는 것입니다.
마태는 백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간 제자들은 이삭이 씨를 뿌려 백 배를 얻듯이 백 배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은 바로 이 백 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백은 백인데 ‘혹’이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한 강도나 그리스도의 달리심을 슬퍼한 사람들은 ‘혹 백 배’가 된 자들이고,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실족하여 세상으로 돌아갔다가 사도들의 전함을 받고 다시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들어간 유대인은 ‘혹 육십 배’가 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일을 모르다가 선택을 입은 유대인은 ‘혹 삼십 배’가 된 것입니다.
누가의 ‘백 배’는 하나님의 본 백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바로 백 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차후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있던 120인이 바로 백 배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유대인들은 육십이나 삼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이유는 뒤의 ‘거지 나사로 비유’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부여되는 기회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여하지 않음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받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결국 이 수의 표현의 차이는 누구를 대상으로 전하는 것이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묘사를 한 것이 됩니다. 모든 문장에 사용된 용어들은 그저 연결구로 무의미하게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 끝말입니다. 마가는 “또 일러” 주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고, 마태는 바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며, 누가는 “외치”십니다.
마가는 가르치시는 다짐이고, 마태는 순종하는 자들이며 이미 알고 있으므로 바로 가르치시는 것이며, 누가는 알고 있으나 듣지 않으므로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란 듣든지 안 듣든지 의 여부가 ‘너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 여부를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말씀 안에서 개인적으로 선택을 확인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막연하게 ‘믿음으로’ 가 아니라 분명하게 명문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여부 확인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생각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영의 생각을 따를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 < 하늘의 보물 >
신명기 33장 13-17절
요셉에 대하여 말하기를“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옛 산의 상품 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하게 될 것이다.”
하늘의 보물인 이슬은 광야에서 내리던 만나와 같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것은 하루 중에 밤이 지나 아침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전 공의를 관장하던 자들의 그릇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빛이 사라지게 됨으로 어두워졌고, 그 다음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다시 떠 아침이 올 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선포 되었는데 그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기간에 들려진 말이 곧 유대인들에게 이슬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이슬을 이슬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습기가 없는 것이 되어 그 씨를 마르게 한 것입니다.
또 ‘땅 아래 저장한 물’이란 성경 안에 사람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논리가 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이전의 사람의 지적 능력과 모세 이후와 그리스도 이후와 그로부터 천 년 뒤와 이천 년 뒤인 오늘날의 경우가 각각 다릅니다. 교육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천 년 전과 오늘날만 비교를 해도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렇게 지적능력의 발단 단계에 따라 오고 가는 각각의 세대들에게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를 보여 주시고 그것으로 각각의 세대가 구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본 복음서의 필연성 증명이 2000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다가 오늘에야 해결이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를 모두 읽고 나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므로 이 정도에서 멈추겠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각각의 세대에게 맞는 논리를 끄집어내어 보여 주시는 것이 성경 안에 있는 물, 즉 ‘땅 아래 저장되어 있는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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