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차원의 세계 누가복음 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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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였습니다. 언제 돌아 갈 계획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 다시 왔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새로운 세계를 개척 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이민을 갔다가 몇 해동안 고생만 하다가 이제 다시 역이민을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머문 동안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보려는 마음 갖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피곤과 좌절에 휩싸일 뿐 생각한대로의 결실을 못 맺고 돌아온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나의 계획 나의 판단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채 실의만을 안겨주는 때가 우리의 삶 속에서 허다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베드로를 비롯한 그 동료들이 인간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험을 겪은 다음에 제 2의 인생길을 걷게 되는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 호숫가였습니다. 이 호수를 일컫는 이름은 ‘디베랴 바다’, ‘게네사렛 호수’ 등등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 북서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이었으며, 우리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 전도의 거점으로 이용하셨던 장소이기도 합니다.(마 14:34, 막 6:53) 바로 그 지점의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의 크기는 대단합니다. 남북의 길이가 20.8km로서 50리가 더 되고, 동서의 폭은 12.8km로서 30리가 넘습니다. 호수의 깊이는 228m에 이릅니다. 그 날도 많은 무리들은 호숫가에 서 있는 예수님을 에워싸고 말씀 듣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고기잡이를 끝내고 호숫가에 돌아와 그 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에게 이 배를 해변에서 좀 떨어지게 해 줄 수 없겠는지 어렵게 부탁을 하시면서 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 배를 설교단으로 삼고 말씀을 전하시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에 어부들과 아무런 사전 대화도 없이 그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물을 싣고 다시 노를 저어 나아가라 그리고 깊은 곳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 이 때 배의 주인이었던 베드로는 ‘선생님!’ 하고 부릅니다. 이 때의 선생님은 다른 곳에서처럼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선생, didaskalos라는 이름이 아니라 선장이나 감독관등을 부르는 것과 같은 epistates라는 특수한 이름을 사용하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저희가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밤새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단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노를 저어 저 깊은 곳에 나아가 그물을 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더 이상 말이 없으신 채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곧 발생하게 될 결과를 앞에 놓고 주시하고 계시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걸려들었고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어부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손에 쥐고 계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몇 차례 뵈었지만 진리의 주인이심을 드디어 깨닫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을 포기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 주십시오 주님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고기잡이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의 대열로 오게 하는 선교의 주역이 되리라 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와 그 동료 야고보와 요한은 그렇게도 아끼던 배와 그물도, 이미 잡은 고기도, 정들었던 삶의 터전도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석가들은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복음의 확장을 위한 초청과 제자들의 응답의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사는데는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생기가 흐르는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세계를 늘 추구합니다. 새로운 삶의 추구, 제 2의 출발, 새로운 개척 등등의 어휘는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말들입니다. 구태의연했던 과거를 벗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활기를 가지고 삶을 살아갑니다. 누구나 좌절과 침몰과 파괴의 세계를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장에서 행복의 함성을 지르고 싶어 합니다. 오늘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제 2의 출발, 새로운 세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실직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서면서 제2의 출발을 하겠다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제2의 출발이 아니고 가정의 파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바꾸면서 나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의 변화이지 진정한 삶의 변화는 아닙니다. 18세기에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쉴러(schiller, 1759-1805)는 그의 ‘이상주의’에서 ‘새로운 세계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란 언제나 한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세계는 어떤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새로운 세계의 주인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을 초월하고 계시는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심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는 그 분을 발견하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길이 새로운 세계의 진입임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즈음 우리 교회는 이 사회 앞에 부끄러운 얼굴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이 나라의 부정부패의 사건마다 거론된 그 주역들은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고급 의상실의 수백만 원의 옷을 주고받은 사건을 비롯하여 각종 부정과 부패가 얽히고설킨 사건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었다는 보도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교회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이 눈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히 한 차원 높은 믿음의 세계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들은 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세계에 머물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한 인간의 허탈한 고백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저희가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밤새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단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왔습니다 그 날 아침 갈릴리의 어부들은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선조 때부터 익혀온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판단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밤을 지냈습니다. 거대한 갈릴리 호수는 헤르몬 산과 레바논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깨끗한 물로 가득한 바다와 같은 호수입니다. 그곳에서는 20여종이 넘는 고기들이 많이 있어 어업 활동이 매우 활발했습니다. 잡은 물고기들은 소금에 절여 가공한 후 멀리 로마나 스페인까지 수출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어부들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고기 잡는 기술이 먹혀들지 않는 삶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쏟은 자신들의 수고가 허사였음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일의 출어를 위하여 그물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열심히 씻으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부들의 현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의미 깊은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것은 인생이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에 의하여 척척 일들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모두가 승리감에 도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계획한대로 출세와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귀가 열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이 뜨이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를 마음이 열리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실패의 쓴잔을 마실 때 드디어 주위 사람들의 말이 소중하게 들립니다. 작은 사건도 눈여겨보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에 계신 우리 모두도 마치한가지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총명으로 승승장구의 길을 달릴 때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고 오직 나의 권세와 명예와 물질만이 보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IMF와 같은 뜻밖의 어려운 시대를 맞아 실패와 좌절과 낭패와 슬픔의 늪을 거닐면서, 이제야 자신이 밤이 세도록 땀 흘려 수고했으나 결국 오늘 나는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가련한 어부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 즉 기적의 주인을 만나 뵈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바탕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경청하고 따를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준비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이 현장의 허탈감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어떻게 해야 우리들은 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세계에 머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그 두 번째의 방안으로 어부들의 대답처럼 무조건의 순종이 필요함을 보여 주십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노를 저어가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치겠습니다 고기잡이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어부들의 원래 생각이 맞습니다. 고기를 잡는 시간은 낮이 아니라 밤이었습니다. 밤에 먹이를 찾아 나서는 얕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았기에 깊은 곳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또 지난밤에 안 잡힌 고기가 다음날 대낮에 잡힌다는 것은 갈릴리 어부들의 상식과 경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어부의 입에서는 상상을 벗어난 말을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노를 저어가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치겠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쌓은 수십 년 간의 경험과 상식을 포기한 결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와 판단을 꺾어버리고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믿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달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어부들의 무조건적인 순종의 결단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는 너무 많은 조건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다음과 같이 하겠습니다.’ 조건을 붙인 기도가 너무 많습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고 기도하고 조건이 충족되었으니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입니다.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조건을 내걸고 기도하고 따른다는 것은 위험한 신앙의 형태입니다. 조건이 이룩되지 않으면 안하겠다는 미숙한 신앙입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의 사고의 틀에 맞추어서 따르고 해석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예를 들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말씀을 들을 때 현대인들은 ‘주님 먼저 평강의 쉼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주께 가리다.’고 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29)” 하면 현대인들은 ‘주님 나의 마음에 쉼을 먼저 얻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께서 배우리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을 한 후에 주시는 대로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자신들의 모든 이성적인 판단과, 심지어는 육체적인 고달픔도 외면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했을 때,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주인들로 들어 써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갈릴리의 어부들처럼 우리 자신의 열심과 경험과 지식이 아무리 깊고 훌륭하더라도, 우리들이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입에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따르겠습니다.’하는 고백과 순종이 있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주십니다. 셋째로, 어떻게 해야 우리들은 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세계에 머물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깊은 세계를 향한 또 한번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한 번 더 노를 저어가라 그물을 깊은 데로 던져라 갈릴리 어부들이 겪었던 그 밤은 실패의 밤이었습니다. 허탈감에 피곤만을 더하게 하는 밤이었습니다. 잠 한숨 자지 못한 피곤한 육체의 이마에 오직 땀을 흘리게 하는 밤이었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좌절의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당장 하고 싶고 기다리는 것은 밤새 바다 속에서 더러워진 그물을 씻어 내일을 위한 준비를 속히 완료하고 잠을 자는 일이었습니다. 밤새껏 아무 재미를 보지 못한 채 그 물을 씻고 있던 그들의 육체와 정신상태는 이미 피곤의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어부들의 경험도 지식도 지혜도 의욕도 다 지쳐버린 때였습니다. 침묵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어부들은 주님에게 피곤으로부터 쉬고 싶다거나 고기를 잡게 해 달라는 부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 계시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그 배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어부들에게 명령 하십니다. 씻고 있던 그물을 다시 배에 싣고 저 깊은 곳으로 향하여 다시 노를 저어 나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물을 칠 것을 명령했습니다. 어부들은 수 천 수만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차원이 다른 분이 자신들의 배에 동승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노를 저어 도전의 기회를 명령하실 때 새롭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노를 저어 깊은 데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내렸습니다. 드디어 새로운 차원의 세계의 주인을 발견하고 생의 대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실패와 좌절에 헤매는 사람들을 그대로 외면하시지 아니합니다. 어제까지 씩씩하게 살던 사람이 오늘 고개를 숙이고 우울하게 사는 모습을 외면하시지 아니합니다. 지금껏 평화와 질서를 지켜온 가정과 일터에서 상처를 입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버리시지 아니합니다. 어제까지 풍요로운 물질에 도취되어 방향을 모르고 살다가 빈손이 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시지 아니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는 말씀과 함께 찾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삶 속에서 여러분은 피곤하십니까? 포기하셨습니까? 절망하셨습니까? 허탈감 속에 빠져 헤매고 계십니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힘없이 그물만을 씻고 있으십니까? 일어서십시오. 다시 용기를 갖추십시오. 그 실패의 배에 함께 동승하신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그물을 챙겨 싣고 한 번 더 노를 저어 가라 이 얕은 물가를 벗어나 저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그물을 치라’ 이러한 진리를 이미 깨닫고 있었던 사도 바울을 통하여 동일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고후 4장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노라”말씀합니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골은 그의 '노년'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가진 것만큼의 힘을 사용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어도 하나님은 아직 우리에게 살아있는 호흡을 남겨 두셨습니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남겨 두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강인한 믿음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물을 다시 챙기고 노를 다시 저어 갈 힘을 남겨 두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사용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 정치 현실이 불안정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도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인식과 삶의 구조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경제의 안정이 불투명합니다. 교회는 이단들이 극심합니다. 이럴 때마다 나타난 현상은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받게 되는 갈등과 상처와 실패와 절망 등입니다. 바로 이 때가 찾아오신 주님을 바르게 모실 때입니다. 그 앞에서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보이고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나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나의 경험과 지식과 판단만을 의지하던 과거의 삶의 양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교만으로 가득하였던 삶의 청산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오늘 우리의 입에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노를 저어가 말씀하신 곳에 그물을 치겠습니다.’ 조건 없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현대는 땀 흘려 다시 노를 저어가지 않고, 깊은 세계를 향하여 나의 정렬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큰 돈이 큰 명예가 굴러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명심보감의 성심(省心)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무고이득천금(無故而得千金)이면 불유대복(不有大福)이라 필유대화(必有大禍)니라.’ 까닭 없이 천금을 얻으면 큰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 화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두 척의 어선이 가라앉을 정도로 가득히 잡은 고기에 깊은 관심을 두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오히려 그 보다 앞서서 좌절의 어부인 나를 찾아 와 주시고 나의 배에 승선해 주신 주님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에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이 노를 다시 저어 나아가라면 저어 나아가고, 그물을 대 낮에 깊은 곳에 던지라면 던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의 정든 생업도 재산도 눈앞에 잡아 놓은 모든 고기도 포기하고 따라 나서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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