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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은바리라이프 2009. 2. 21. 23:55

워낭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리뷰] 우리네 세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의 이야기 <워낭소리>
  허진무 (riverrun88)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경제주의에 찌든 세상에 부드럽게 죽비를 내리치고 있다. 노인 부부와 소가 더불어 사는 삶은 비경제적, 비자본적, 비실용적이며 무엇보다 따스하다.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하도 거리에 소문과 칭찬이 자자하다. 이제 관객 백만을 바라보고 있다니까 십만 넘기면 '대박'이라는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그야말로 '왕박' 수준인 셈이다. 지금껏 독립영화 하나 볼라치면 머나먼 거리를 달려 서울에 딱 하나 있는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워낭소리>는 독립영화라는 작은 덩치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멀티플렉스 상영관까지 발을 들였으니 대단한 일이다. 거기다 다큐멘터리라는 딱딱한 모양새 때문에 아무래도 꺼림칙하기 마련인데 많은 사람들이 흡사 수도꼭지 튼 것처럼 눈물 줄줄 흘렸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 조그만 영화관에 이명박 대통령까지 납시었겠는가. 새 정부를 꾸리면서 독립영화 홍보 지원금을 없앴는데 이제와 몸소 독립영화를 찾아보시다니 참으로 속모를 행보라. 하여튼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마력적인 힘이 있을 테다. 끝내 나에게도 기회가 닿아 <워낭소리>의 화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화면에는 어느 시골 농촌의 풍경이 담겨 있다. 거기는 마치 딴 행성인 듯 고즈넉한 흙의 세계다. 참 애틋하지만 한편으로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화면에 비치는 풍경은 낯선 것이 당연하다. 겉모습만 낯선 것이 아니다.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제 우리네 곁에 없는 것들이 거기에는 질기게 살아있다. 내가 보는 <워낭소리>는 사라져가는, 혹은 벌써 사라진 것들에 관한 영화다. 온통 산업화되고 자본화된 대한민국 땅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이 영화를 재미나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워낭을 딸랑딸랑 울리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황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비실용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최원균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 그리고 소의 삶은 티 없이 솔직하여 순박하다 못해 미련하게 보일 지경이다.

 

한평생 흙과 더불어 노동하신 할아버지가 사는 방식은 범상하지 않다.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해하는 일 없이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일구었다. 기적에 가까운 그 과정을 사십 년 동안 소가 곁에 있었고 함께 늙었다. 늙은 소는 비단 할아버지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헌신적인 노동으로 끝내 키워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소는 친구이며, 부모이며, 자식이다. 할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영감은 소만 중하지 나는 중하게 안 여긴다"고 영화 내내 하염없이 팔자를 한탄하는 할머니의 신세타령은 익살맞다. 그러나 말로는 소를 미워하는 듯싶어도 할머니 역시 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사십 년을 함께한 최원균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무척 끈끈하다.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축생이 아니라 삶을 나누고자 하는 가족이다.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구부러진 뿔이 서글픈 소가 달구지를 슬슬 끌고 가면 고단한 노인은 달구지 위에서 까무룩 잠이 든다. 할아버지는 목숨을 맡긴 셈인데 과연 소는 도로변 자동차도 알아서 피해 가는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 노인 부부와 소의 끈끈한 관계는 가히 가족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전통적인 시골 정서라면 고기를 취할 테지만, 기꺼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절까지 하는 모습이 그래서 가슴을 울린다.

 

한데 왜 할아버지는 기계가 아니라 소를 고집할까? <워낭소리>의 정서는 쭈욱 똑같지만 특히 중요한 장면이 있다. 화면이 논두렁을 가운데 두고 분할되어 있는데 저편에서는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있지만, 이편에서는 할아버지가 낑낑 힘들여 소와 함께 논을 갈고 있다. 한눈에도 무척 힘들어 보인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 기계를 쓰라고 권해도 꼭 소를 고집한다. 첨단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경제인의 눈으로 보면 되게 미련한 모습이다. 트랙터로 일하면 더 적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모를 심고 더 많은 벼를 수확할 수 있다. 무엇하러 짐승과 밀고 당기며 힘을 쓸까?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할아버지의 비경제적, 비자본적, 비실용적 노동이 이야기하는 바는 소를 단순한 대체노동력의 제공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필요 없으면 팔거나 도살하는 축생이 아니라는 거다. 이는 소와 함께 땀 흘려 노동하고 삶을 나누고자 하는 가족의 태도다. 돈벌이가 지고의 가치가 된 지금에서는 농촌에서도 드문 모습이 되었다.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버는가가 중요한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행복, 노동의 보람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트랙터를 쓰시라 권해도 굳이 할아버지는 소와 함께 일하기를 고집한다. 그런 모습에서 더불어 사는 행복과 노동의 보람이 엿보인다.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일찍이 마르크스는 기계에 '일반지성'이란 말을 붙였다. 생산 공정을 다 알아서 하는 기계가 사실상 생각하는 존재이고, 다만 옆에서 기계를 조작하고 관리할 뿐인 사람은 오히려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랄한 폭언이었다. 이른바 기계에 종속된 노동이다. 그런데 한없이 비실용적인 할아버지의 노동은 최소한 자유롭다. 이런 자유로운 노동 또한 사람을 '인적 자원'로 취급하는 세상에서는 하찮은 것이 되었음은 물론이라 하겠다. 할아버지가 트랙터를 쓰기 싫어하는 이유가 또 있다. 트랙터로 수확하면 낱알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물론 낱알이 많이 떨어져 봤자 트랙터 써서 씨를 더 많이 뿌리고 벼를 더 많이 거두면 그만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화를 낸다. 경제 수익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낱알이 돈과 바꾸는 교환가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낱알은 고귀한 노동의 결실이며 자연이 베푸는 은혜다.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낭비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결코 과도하게 다가가는 법이 없다. 그냥 노인 둘과 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가는 오만가지 것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돈벌이를 위해 요람부터 무덤까지 싸우는 경제주의 세상에서 이는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사실을 돌이켜보길 바라는데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다. 그것도 감독의 개입을 최소화시켜 찍은 현실의 이야기다. 똑똑히 살아있는 현실의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되게 보이냐는 것이, 때로는 역으로 우리네 삶이 얼마나 허황되냐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애끓다 죽어가고 세상의 온기는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당장 일상에서 느껴야 할 따스한 온기를 애써 극장을 찾아가 느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희극이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