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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마태복음강해 7) 마3:11-17

은바리라이프 2008. 10. 26. 01:25

(마태복음강해 7) 마3:11-17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제가 청소년 시절에 친구 아버지 중의 한 분이 맹인이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분의 청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일년만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도 정확하게 제 이름을 부르면서 맞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태양이 떠올라도 태양은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나 차가 다니는 소리로 아침이 된 줄 알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놀라운 것은 사람의 한 생명의 탄생입니다. 지금도 병원 신생아실에 가보면 여러 명의 새로운 아기들이 태어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한 생명이 어떻게 태어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생명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또 신비로운 것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말씀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한 생명체가 대단히 신비로운 과정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지듯이 우리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새로운 변화가 생겨서 한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은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 반하여 어떤 사람은 전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영혼의 세계'라고 하면 우리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단히 신비로운 어떤 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아침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하여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은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영혼의 세계에서는 가장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환한 태양이 떠올라서 아침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증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지금 아침이 되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깨닫지 못하지만 지금 우리 가운데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두운 밤은 물러가고 환한 아침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이 그런 말만 하고 끝을 낸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게 하고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세례를 준 것입니다. 요즘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세례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례는 요한이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능력이 많으신데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세례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요한의 물 세례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 또는 불 세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1. 요한의 물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그가 물로 세례를 주는 의미와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세에 대하여 공개적인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11,12절,"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주는 의미를 두 가지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하나는 회개의 표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지금까지 죄짓는 생활을 하다가 말씀에 은혜를 받고서 이제는 더 이상 죄짓는 생활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면 이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라는 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원래 회개라는 말이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은 목사님이 '회개해야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말하면 '장부도 없는데 어떻게 회계를 합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회개라는 말은 장부 정리는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짓는 삶을 청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기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청산하겠고 하면 요한은 회개한 것으로 보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자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회개한 사람이라는 표시였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라톤을 하면 반환점을 지나가면 마라톤 관계자들이 도장을 하나씩 찍어 줍니다. 그것은 '이 사람은 분명히 반환점을 통과했습니다'라는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뒤의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 뒤에는 엄청난 권세를 가진 분이 오셔서 이 물세례를 받은 자에게 엄청난 세례를 주시는데 것은 성령의 세례요 불세례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로 표시를 해 놓으면 그 뒤에 천사와 와서 그 집은 구원하고 다른 집의 아이들은 다 멸망시키는 것처럼 요한의 물 세례를 받은 사람을 찾으셔서 성령으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는 물에 완전히 사람을 잠그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뿌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씻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죄의 삶을 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금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아온 삶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설교는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과거의 죄스러운 삶과 단절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단절되었다고만 해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다시 유혹에 빠져서 죄짓는 삶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완전히 불로 세례를 주셔서 그 사람 속에 있는 죄까지 완전히 녹여서 빼내어버립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자기 죄를 옆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을 때 정말 자기들이 지은 죄가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었던 그 모든 죄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들을 고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더러운 놈아, 너는 너의 여동생과 놀아났지?"
 "너는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너의 아기를 길에다 버렸지?"
 "너는 친구를 팔아먹고 그 상금으로 지금 부자가 되어 치부를 하고 있지?"   "너는 성직자가 되기 전에 매춘업을 했었지?"
 "너는 다른 여자와 놀아나기 위하여 너의 부인을 때려서 강제로 이혼을 시켰지?"
 "너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먹고 청부 살인을 했지? 시체를 저 강가에 묻어두었지?"
 요한의 설교는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자로 하여금 마치 영화 필름을 보듯이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제발 그만'하면서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양심이 고통스러운 나머지 실신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이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죄를 청산하고 싶은 사람은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곧 한 분이 오시는데 그가 불로 세례를 주셔서 여러 분 안에 있는 모든 죄와 죄의 기억을 용광로처럼 녹여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은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심하게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양심이 그 동안 줄곧 죽어 있다가 살아난 것 같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바로 옆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다닌 후에 갑자기 어떤 기회에 은혜를 받아서 이런 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다가 한번 타락한 후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이런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온 자신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이런 성령의 깨우침이 없는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심한 죄인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론 어렸을 때 부모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학급의 여학생을 괴롭히기는 하였지만 영원히 지옥에서 죽을 정도의 죄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양심적이고 남들보다는 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향을 말합니다.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나 다른 이성을 성적으로 추행하려고 하는 생각 같은 것들이 바로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업신여기고 판단하고 함부로 비난한 것이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할 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간음을 행했으며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을 그것도 몇번씩이나 죽였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속에 들어가본다면 그 추악하고 더러움에 경악을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할 죄들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전에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모두 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절망하고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고통의 기간이 6 개월씩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2년이나 3년 정도 가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자기 죄가 씻음 받았다는 것을 믿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의 세례가 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주는 의미는 물로 세례를 받았다거나 혹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떠나서 말씀으로 양심의 찔림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체 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요한이 말한 회개의 열매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양심이 찔림만 받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치료받지 않고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

 요한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그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서 요한은 자신과 곧 나타나실 분과의 관계를 주인과 신을 드는 노예로 비유했습니다. 당시 노예는 다 같은 것이 아니고 노예 안에서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의사들 세계에 레지던트 일년차 이년차 하는 식으로 노예 1년차 2년차 하는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 중에서 가장 낮은 노예가 주인의 신발 담당이었습니다. 주인이 신을 신으려고 하면 끈을 매어주고 신을 벗으려고 하면 끈을 푸는 담당이었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대대장 '따가리'와 비슷한 것입니다. 자기는 앞으로 오실 분에 비교하면 따까리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능력이 많으신데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논쟁하고 설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성령과 불'이라고 했는데 '성령'과 '불'을 따로 떼어서 설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주실 죄 용서의 은혜이며 불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의 '불'이 성령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특성이 불처럼 죄를 태워서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물도 깨끗하게 합니다. 손이나 그릇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물로 씻으면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물은 본질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불은 존재자체를 바꾸어 버립니다. 바위 안에 금이나 은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것은 물로 씻어서는 안되고 불로 태워야 합니다. 용광로 안에 넣어서 녹여야 순수한 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금을 녹일 때 사용하는 약품은 엄청난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흘러 나온 물에는 수십년이 지나고 물고기가 살지 못합니다. 불로 녹이고 맹독성의 약으로 또 녹여야 순수한 금이 만들어집니다. 불은 물처럼 외부만 씻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까지 철저하게 녹여서 철저하게 지꺼기를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당시 사람들 중에서 '성령의 세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런 일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단지 습관만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본성 안에서부터 죄를 거부하는 것이 생깁니다. 죄가 구역질날 정도로 싫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마음속에 죄의 기질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때때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절대로 죄가 그 사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은 정말 죄가 싫습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의 세례로 인류는 두 부류로 명확하게 나뉘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2절,"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지금까지 어느 농부의 타작마당에 타작을 끝내지 않고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가 뒤범벅이 되어서 도대체 뭐가 먼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타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알곡을 까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쭉정이는 다 날아가고 알곡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키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다 토하여 내고 완전히 예수님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키질을 견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도 인정도 하지 않고 죄가 있으면서도 감추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쭉정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한 환상을 보게 되는데 당시 벨사살 왕이 성전의 잔을 꺼내어 거기에 술을 붓고 교만하게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쓰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다니엘은 그 글을 읽는데 '메네 메네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벨사살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까 너무 가벼워서 오늘밤에 그를 버리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달아보십니다. 몸무게를 달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 사람이 신실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지 그의 저울로 달아보십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무게는 먼지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론 몸무게는 많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에는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나타날 거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 조그만 죄를 짓고서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토하여 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많이 나갈 것입니다.
 안에 성령이 계셔서 그의 말이나 행동을 통제하는 사람의 무게는 태산과 같습니다. 결국 인류는 자기 기질이 그를 통제하느냐 아니면 성령이 그를 통제하느냐로 두 부류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운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기질입니까? 아니면 성령이십니까? 하나님의 저울에 가벼운 사람은 영원히 불에 탈 것입니다. 우리 몸은 성령이 운전을 하셔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무면허 운전과 같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 하여도 무면허 운전은 지옥행입니다.

3.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세례를 줄 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13,14절,"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세례를 받으시기 전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신 후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이미 그가 누구신지 아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령의 명확한 증거를 받았다기 보다는 한편으로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간접적으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을 통하여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성령의 증거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세례와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의식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구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의 대표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주기를 거부하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저는 여기서 '의를 이룬다'는 말이 마태복음 전체의 요절일 뿐 아니라 복음서 전체의 대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의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죄인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다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의한 분 아니십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누명을 뒤집어 쓰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 모든 죄값을 지불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는 천사가 아니십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의 피를 모두 다 합쳐도 그의 피 한 방울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다면 그는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 인간을 만드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의라고 하는 것은 죄용서 받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모든 의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죄인의 대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지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의 속죄 사역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대제사장이 취임을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자신도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그 기름이 온 몸을 충만하게 적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모든 죄인의 대표의 자격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그의 위에 성령이 부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6절,"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대제사장의 대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대제사장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대관식을 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이제부터 그가 하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죄인의 죄를 속하는 공적인 일이며 구원을 일으키는 행위라는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가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임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는 성령님과 똑같은 신성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성령을 부으시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질이나 체험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더욱 더 욱 성령의 의지에 붙들린 바 되었으며 더욱 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성령님은 결코 비둘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비둘기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이 비둘기같은 형상으로 임하셨을까요? 오히려 세례 요한의 말대로 불같이 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사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시는 것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또 급한 바람 소리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청각적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 후에도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는 일은 많았지만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임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양으로 임하시는 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대개는 이 비둘기 모양이 성령의 부드럽고 온유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하나는 독수리 같은 새와의 차이입니다. 독수리는 어떻습니까? 먹이를 채어 가지고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독수리는 빼앗아 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생 조류이기 때문입니다. 매나 다른 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사람에게로 날아옵니다. 때로는 품으로 날아들기도 합니다. 날아와서는 오래 오래 함께 있습니다.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노아가 홍수 중에 물이 얼마나 줄었는가 알아보려고 까마귀를 내어 보내었더니 까마귀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셔서 떠나지 아니하심으로 보여주는데는 비둘기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 안에 오래 오래 거하십니다. 두 번째는 비둘기는 메신저입니다. 옛날에는 어떤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비둘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날아갔던 비둘기는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홍수가 끝나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제비가 돌아오면 봄이 온 줄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시냇가에 버들강아지가 생기면 봄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제비나 버들강아지는 모두 봄소식의 메신저입니다. 구약 성전에서 등대는 모두 살구꽃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살구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비둘기 형상의 임재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 동안 죄로 인하여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이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자유로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존귀함을 되찾고 죄를 강요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뜻을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육성으로 들렸습니다.
 17절,"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음성의 주인공은 분명히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는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왜 굳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들이 자기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것은 영광의 체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라는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부으심으로 아들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갈 때에 한번 아버지가 아들을 번쩍 안아 올리며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이야'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때 비로소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아무도 성령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시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성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지가 않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던 기름이 그의 온 옷을 적셨듯이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졌던 성령이 그의 온 몸과 팔과 다리에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성령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마치 하나님의 육성을 듣듯이 우리의 귀에 들리고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이 순간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체험적인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교파에서는 방언받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언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성령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 세례는 한번만 부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여러 차례 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성령이 역사하실 때 자기 안에 있는 죄를 토하여 낼 때를 성령 세례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 성령이 역사하실 때는 강한 죄의식이 동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 성령의 부으심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셔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오늘 예배가 바로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한 과정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 동안 거짓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정죄하면서부터 이 위대한 구원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불태워주셔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뱀같이 간악한 기질을 보게 하셔야 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나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둘기가 우리의 품으로 날아 들 듯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욕심으로 사는 자기 자신이 미워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