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장과 20장에 나오는 기브아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pts9228 2007.02.07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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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사사기 ①
부정한 여인을 첩으로 취한 레위인의 범죄(19장)
베냐민지파의 몰살 사건을 불러일으킨 주범이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이 성경 사사기에 은폐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진실은 단지파 이동 배경의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어... |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사사 시대가 있었다. BC 12~11세기에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분배 받은 가나안 땅에서 각기 지파대로 적당한 영토에 살았으며, 각각 다른 사정 아래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집권적인 기관이 없었고 왕도 없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동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지도자의 소임을 맡은 사람이 사사이다. 사사는 타민족으로부터 압박을 받거나 전쟁을 할 때에는 군사령관이기도 하였고, 평상시에는 판사의 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권능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신(神)의 심판’을 대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삿 3:10, 6:34, 11:29, 13:25, 14:19).
지금 이야기하는 시대적 배경은 천하장사 삼손이 미인계에 속아 잠복해 있던 블레셋 군인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며 쇠고랑을 찬 불행한 생활하다가 이교도의 제사에 희생제물로 받쳐질 때에 사당 기둥 두 개를 뽑아버리고 결국 지붕이 무너져 블레셋 고관 장수들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BC1075년)를 맞고, 삼손 장수를 잃은 단지파가 동북쪽으로 사라진 직후에 있었던 기브아 사건(BC1072)이다. 베냐민지파가 몰살당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부터 가나안은 더 이상 축복의 땅이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촛대는 단지파에 의해서 새롭게 건설되는 땅 끝 땅 모퉁이 한반도로 옮겨졌다(사41:1~9).
왜냐하면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지는 기적과 하늘 만나를 체험하고도 금송아지 우상숭배와 모세를 원망하는 범죄로 1세들은 다 죽고 2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과 같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기브아 사건에 연루된 베냐민 사람의 죄 유무를 실로에 계신 하나님께 여쭈지 않고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여 그릇된 판결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삿8:23)을 거슬려 사사에 의한 통치를 버리고 왕을 추대하는 범죄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성경 사사기 19장과 20장에 기록된 것을 면밀히 검토할수록 베냐민지파의 몰살 사건을 불러일으킨 주범이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본문의 주인공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레위인이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 근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로(Shiloh: 평화를 주는 자 또는 의로운 메시아라는 뜻)는 여호수아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언약궤와 성막이 있던 곳이다. 그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예배 중심지였다.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이 남쪽 30km 아래에 있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여 데리고 와서 살았다. 그 첩은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행을 한 후에 자기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 당시에 간음죄를 지으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다(레 20:10). 더구나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레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레위인이 이 같은 여인을 첩으로 맞은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 원어성경을 보면, 이 레위인은 부정한 여인을 첩으로 데리고 오기 전부터 음행에 중독된 제사장인 것 같다. 남편의 음행에 덩달아 부정한 이 여인도 다른 남자와 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남편보다 첩이 음행에 있어서 한 수 위이기에 남편은 짜증을 부리고 홀대하게 되었고 첩은 견디다 못해 불만을 품고 친정집으로 가버렸다. 원래 음행에 중독된 자는 분노와 살인 그리로 음흉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는 이 레위인이 사라진 첩을 연모하였다고 하나, 사실은 눈이 뒤집힌 상태의 분노상태에서 첩이 도망가서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미친 듯이 찾았던 것이다. 짐작대로 친정집에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녀가 사라진 지 4개월만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음란하고 교활한 레위인 제사장은 음흉한 계책(計策)을 세웠다.
먼저 그녀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녀와 그녀의 장인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위인은 하인 한명과 나귀 두 필을 끌고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첩장인의 집으로 갔다. 첩의 장인 집에 도착하여 나귀 두 필에서 풀어놓은 어마어마한 선물공세에 첩장인의 입이 찢어질듯 좋아하면서 레위인을 맞이했다. 사위의 꾐에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장인은 연일잔치를 베풀었다. 사위는 그녀를 하루속히 데리고 나와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뿐인 고로, 그녀를 바로 데려가려고 했다.
사위의 속내를 모르는 장인은 계속 유숙하면서 딸과 사위가 한방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사위의 다리 기운이 빠질까봐 떡도 바치면서 나흘 동안 레위인을 머물게 하였다. 첩장인의 집은 연일잔치를 베풀 정도로 부자였고, 레위인이 빨리 떠나겠다는 것을 저지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할 정도면 베들레헴의 유다족속 중에 권세 있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죽이더라고 직접 살해하지 않고 청부살인을 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처가댁에 머문 지 다섯 째 되는 날, 안장 지운 나귀에 첩을 태우고 레위인은 하인을 앞세워 떠났다. 여부스(예루살렘)에 가까웠을 때, 해가 지려하기에 하인이 주인에게 여기 성읍에서 유숙하자고 청했다. 그러나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의 노인을 매수하여 베들레헴에서 반나절 되는 지점에 있는 빈집을 얻어 대기하도록 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가 사는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자고 고집한다. 기브아에 있는 인적이 드문 집을 구할 때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에브라임 산지의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고 베냐민 사람인 것처럼 속였던 것이다.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는 진 까닭에 성읍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 모두 집에서 잠들었던 것이다. 거리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레위인은 첩과 하인에게 뒷간에서 잠시 볼일 보고 오겠다고 한 뒤, 얼른 노인이 있는 집에 달려가 저 번에 모의한 일들을 착수하라고 연락을 취하고 돌아온다.(계속)*
구약사사기 ②
이스라엘 총회의 잘못된 재판(20장)
선민 이스라엘을 말살시키려는 마귀의 음모를 간파한 하나님은 단지파를 해 돋는 극동 한국에 옮겨놓았다. 히브리 모국어조차 잊어버리게 역사하시고 구세주 출현(창:49:16)까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숨겨… |
부정한 여인을 첩으로 취한 레위인의 범죄(19장) - 지난호에 이어..
노인은 해질 무렵도 한참 지난 밤중에 밭에서 일하고 오는 것처럼 차림새를 하고 짐을 풀고 앉아서 쉬고 있는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오밤중에 노인이 나타난 것은 이상했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한 청년의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삿19:19)’라고 레위인은 말하면서 노인의 집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노인은 심히 가슴이 떨린 나머지,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삿19:20)’는 말을 쏟아냈지만, 아무도 그 말속에 흉계(凶計)가 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노인의 집으로 이끌러 들어갔지만 노인과 함께 사는 장정들은 보이지 않고 처녀 딸 혼자만 있을 뿐이다. 일행들은 피곤한 나머지 나귀에게 짚과 보리 먹이를 주고 자신들은 발을 씻고 곧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오밤중에 노인이 주책도 없이 큰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을 접대하겠다고 우긴다. 이상하게도 일행 가운데 주인 되는 레위인은 이런 환대에 동조하며 기꺼이 따른다. 먹고 마실 즈음에 불량한 장정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부셔버릴 듯이 ‘꽝꽝’ 두드리면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집주인 노인이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 둘 다 내어주겠다고 불량배들에게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레위인이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첩을 불량한 장정에게 내어주려고 하니, 불량배는 순순히 응한다. 불량배들이 여자 둘은 싫고 여자 하나만 택하자, 그 레위인의 첩은 그제야 자신이 남편에게 속은 것을 알고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남편의 힘센 양팔에 붙들려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바깥으로 내팽개쳤다.
원래 그녀는 음기가 강한 자인 고로 여러 장정이 돌아가면서 윤간을 해도 자지러져 죽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음행에 장정들이 당해내지 못할 것인즉, 결국 그녀는 욕보임을 당한 후 목조임으로 숨이 막혀 죽었던 것이다. 레위인은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산지의 집으로 가서 첩의 시체를 칼로 난도질하여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퍼져 있는 각 지파에게 보냈다. 그리고 레위인의 살인 교사에 동조한 노인은 집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 에브라임 산지로 숨어들었다.
이스라엘 총회의 잘못된 재판(20장)
기브아의 추행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였다. 미스바는 베냐민지파의 땅의 경내에 있는 곳으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기브아와 가까운 곳이다. 베냐민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에 다른 지파의 군대들이 집결한 것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브아의 베냐민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출애굽 당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엄청난 것이다. 물론 단지파는 1년 전(BC1073년)에 헬몬산 남쪽 기슭 단(라이스)지방에서 동쪽으로 떠났기 때문에 단지파의 군사 6만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총회에서 재판을 하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먼저 대규모의 군사를 집결했다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위였다. 죽은 첩의 남편이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신분이라는 점과 첩의 아버지가 유다지파의 권문세족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증언을 곧이 그대로 받아들인 각 지파의 지도자들은 사건의 겉모습에만 경악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총회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첩을 잃은 레위인 제사장을 불러서 사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듣기로 했지만, 이것은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에서 먼저 알고 있던 사실을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직접 듣게 함으로 오히려 더욱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총회 재판석에서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고 증언하고 또 자신이 첩을 몰인정하게 불량배들에게 내어 준 이야기는 숨기고 첩이 자발적으로 몸을 던져 희생한 것으로 미화했다. 게다가 죽은 첩의 아버지가 유다 베들레헴 사람으로서 자신의 딸이 틀림없다고 증언하니까, 총회는 더 이상 다른 심문을 하지 않고 기브아의 불량배, 베냐민 사람이 저지른 일로 속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베냐민지파의 사람도 같이 총회에 참여시켜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평등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냐민 사람을 제외시켰다는 것은 이성보다 분노의 감정을 앞세운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재판결과만 베냐민지파에게 통보하여 레위인의 첩을 죽인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인도하라고 요청하였다. 베냐민지파의 지도자들은 황당한 일을 당한 것이다. 불량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전혀 알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인 총회에 ‘그런 불량배는 우리에게 없다’고 전했다.
하지만 베냐민지파 쪽으로부터 이런 전갈을 받은 총회는 불량배들을 감싸고 오히려 죄를 옹호하는 것으로 크게 오해하고 만다. 그리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브아를 치기로 작정하고 총회를 위해 미스바에 모인 군대는 그대로 대기시키고, 제사장과 각 지파의 지도자는 미스바 북쪽 3km 지점에 있는 벧엘에 올라갔다. 벧엘은 BC13세기 초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성읍이 되었다. 그때 여호수아는 그 성읍을 베냐민지파 자손의 기업으로 물려준 바 있다.
그런데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들은 미스바 북쪽 10km 지점에 있는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옳았다. 실로에는 하나님의 법궤(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며, 제사장이 법궤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앞에 서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기도가 상달되는 실로를 제쳐놓고 제사장이 벧엘을 택한 것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레위인 제사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자신의 죄과가 드러날까 봐 심령을 관찰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계속)*
구약사사기 ③
하나님보다 법궤에 의존하는 이스라엘 총회(20장)
BC1050년에 이스라엘의 실로와 성소 파괴 이후 사사시대가 끝나고 유대왕조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는 창세기 49장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홀이 함께하는 데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예언대로 유다지파가 왕권(홀: 통치자의 지팡이)을 취하여 예수까지 이르지만, 끝 날에 단지파에서 구세주(실로: 메시아)가 출현함으로 유다후손은 왕 노릇을 그만 두게 되어 있어… |
<지난호에 이어>
심령을 관찰하는 여호와께 기도할 수 있는 성소와 법궤가 있는 실로를 제쳐두고, 첩의 살인을 교사한 레위인 제사장의 흉계를 알지 못하는 다른 제사장들은 벧엘에 올라가서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께서는 살해당한 여자의 아버지가 속한 유다지파를 지명하면서, ‘유다지파가 먼저 나가서 싸워라’하고 응답하였다. 그것은 베들레헴 유다 사람이 자신의 딸이 음행을 저질렀으면 돌로 해골을 까야 모세 율법에 합당하거늘 오히려 딸의 범죄를 감싸 제사장의 첩으로 시집보내고, 마침내 같은 이스라엘 족속끼리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몰아넣었기에 그 대가를 유다지파의 족속들이 받으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기브아에서 베냐민 자손과 싸운 유다지파의 군병들 이만 이천이 죽음으로써, 1차 전쟁은 이스라엘 총회의 패배로 끝났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진정 베냐민 자손들이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여쭈는 것이 온당했고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과 싸우게 될 역사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베냐민 자손의 죄 유무를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을 더 중시함으로써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1차 전쟁에서 패배를 맛보았으면 돌이켜 반성을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원망조로 울며불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또 여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철부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에 그냥 근성으로 ‘올라가서 치라’고 할 뿐이다. 결국 2차 전쟁도 어제 치른 패배와 같이 일만 팔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두 번이나 연이은 패배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반성해야 했다. 총회는 지금이라도 베냐민지파의 사람들이 ‘애당초 여자를 윤간하여 죽인 그런 불량배는 우리에겐 없다’고 호소하던 일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엉뚱하게도 이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하나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벧엘로 옮겨놓는 가증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총회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모세가 제작한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승리를 약속하는 언약궤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제 총회는 하나님보다 법궤에 더 의존하였다.
하나님께는 베냐민지파를 위해서 모든 이스라엘 족속을 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3차 전쟁에서는 아무리 용맹스런 베냐민지파 사람들일지라도 이스라엘 각 지파가 연합된 40만 군사와 싸운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베냐민 사람들은 몰살 당하고 광야로 도망쳐서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만 겨우 살았다. - 끝 -
[후기]
사사기 19장의 주인공이 되는 에브라임 산지의 제사장 레위인의 이름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레위인의 첩장인이 되는 유다 베들레헴의 사람의 이름을 성경기록에서 제한 것은 필시 유대왕족의 족보에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을 염려한 까닭이리라.
베냐민지파를 몰살시킨 후, 제사장들은 그들 자신이 어리석은 판단으로 속단하여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벧엘로 옮겨온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제자리 실로(Shiloh: 평화를 주는 자 또는 의로운 메시아라는 뜻)로 옮겨놓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뜻에 의해서 임의로 옮겨진 법궤는 얼마가지 못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는 수난을 겪게 된다. 그 실로는 여호수아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법궤와 성막이 있었던 곳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중요한 예배의 중심지였다. BC 1050년에 실로와 성소는 파괴되고 마는데, 그 원인은 희생물의 규례를 뒤바꾸도록 요구하고 심한 음란을 행하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은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가는 것을 묵과하여 죽임을 당하고 결국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한편 BC1075년에 블레셋 족속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은 이방인의 사당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육감으로 알아차리고, 그 사당의 기둥 두 개를 뽑아버리자 지붕이 무너져 블레셋 고관 장수들과 함께 압사를 당하였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삼손의 비보를 접한 단지파 자손들은 블레셋 민족을 몰아낼 전의를 잃었다. 그래서 단지파는 분배받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동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한반도에 도착하여 고조선을 세운 한민족의 뿌리가 되었다.
삼손이 죽자, 선지자 사무엘은 삼손을 이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된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라고 한 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기름부음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사사가 이어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지파에 속한 자이며 그의 조상 베냐민은 야곱의 본처 라헬이 낳은 자식이다. 라헬은 아들 세 명을 두었는데, 장자는 단(한민족 조상)이며 둘째가 요셉, 셋째가 베냐민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으로 지낸 것이나 베냐민의 후손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것은, 앞으로 심판자(Dan)라는 이름으로 오실 실로(메시아)의 표상이다. 즉 야곱의 장자 단의 후손 가운데 구세주가 출현할 것을 예표(豫表)한 것이다(창49: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단지파 민족만 가나안 땅에서 빼어내어 한반도로 이주시킨 것은 그 땅이 피로 얼룩졌고 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더 이상 축복의 땅이라고 할 수 없는, 오직 전쟁만 끊임없이 일어날 땅(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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