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서론 [ 구약주석 ]
2006/02/03 23:17 http://blog.naver.com/godrsm1/20021289938 |
1. 이사야와 시대적 배경
이사야는 옛 예루살렘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새 예루살렘을 고대했다. 그는 아마 예루사렘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결혼하여(8:3), 적어도 두 아들(스알야숩과 마할살랄하스바스)을 낳았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주전 740-700)를 살면서 사역을 했다.
이사야의 사역은 다음과 같이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사회 비판 시기(주전 740-734년)(사 2-5장)
2) 수리아-에브라임 전쟁 시기(주전 734-732년)(사 7-9장)
3) 반 앗시리아 모반 시기(주전 713711년)(사 10-23장)
4) 반 앗시리아 모반과 예루살렘 포위 시기(주전 705-701년)(사 28-32, 36-39장)
(사 1:1)에 이사야서 저자는 이사야의 사역을 4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유다 왕 웃시야(주전 740년에 사망)와/ 요담(주전750-731년)과/ 아하스(주전 735-715년)와/
히스기야(주전 729-686년)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사 1:1)"
1. 웃시야
이사야 사역의 시작은 웃시야의 사망과 일치한다(6:1).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역은 주전 740년 경에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다는 웃시야 치하에서 괄목할만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으며(대하 26:6-15), 정치적 강국으로서의 재기를 도모했다.
2. 요담
요담은 주전 750년에서 731년까지 유다를 다스렸다. 그는 처음에 부친 웃시야와 공동으로 섭정을 했고, 말년에는 그의 아들 아하스와 공동으로 섭정을 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신앙과 가치관은 부패한 유다를 물려받았다. 이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과 유다 내의 부정과 탐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앗시리아는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왕하 15:19에서 "불"로 언급됨) 때에 니느웨에서 다메섹(주전 732년)에 이르는 도시들을 정복했다. 요담이 죽은 후에 폭풍우의 구름은 유다 지평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유다 역시 곧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서 결국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3. 아하스(여호아하스(1))
주전 735년-715년에는 악한 왕 아하스가 유다를 통치했다(왕하 16:3). 역대기 저자는 아하스가 제도화 한 좋지못한 관습들을 열거하고, 이로 인해 그가 국제적인 곤란을 겪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대하 28:2-4). 아하스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보다 정치적인 해결에 더 의존했다. 앗시리아의 영토 확장 야욕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협했다. 그 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유다도 이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그때에 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앗수르를 두려워하여 아람-이스라엘 동맹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아람과 이스라엘은 군사 동맹을 맺고 유다를 공격했다. 그들은 동맹에 참여하지 않는 아하스를 폐위하고 그들에게 동조할 사람을 왕으로 세울 계획을 세웠다. 아람-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게된 아하스 왕은 크게 당황했다(왕하 16:5, 사 7:5-6).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왕에게 보내셨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아람-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만을 의지하도록 권면했다(사 7:8-10). 그러나 아하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원군을 요청했다(왕하 16:7). 디글랏 빌레셀은 아람-이스라엘 동맹이 서부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도록 신속히 대처했다. 그들은 베니게를 지나 블레셋까지 진군하면서(주전 734년),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멸망시키고(주전 732년), 계속해서 이스라엘도 정복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원군을 요청했던 유다도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었다(왕하 15:29, 16:7-9, 대하 28:19, 사 8:7-8).
후에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앗시리아에 반기를 들고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살만에셀(주전 727-722년)은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진군하여 그 성을 파괴하고 거민들을 사로잡아 갔다. 이때에 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으며, 앗수르만을 믿고 따랐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살멘에셀 5세와 사르곤 2세가 앗수르를 통치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4. 히스기야
아하스의 뒤를 이은 왕은 히스기야(주전 729-686년)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아하스와는 대조되는 선한 왕이었다. 그는 주전 715년부터 686년까지 독자적으로 유다를 통치했으며. 국가적, 개인적으로 비극을 맞았을 때에 선지자 이사야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부패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과감한 종교개혁을 시도했다(왕하 18:4,22). 그는 호전적인 강국 앗시리아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앗시리아 왕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는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동쪽(엘람, 바벨론)과 서쪽(수리아-에브라임)의 여러 나라를 비롯해서, 유다 남서부 국경에 접한 와디엘 아리쉬까지 정복했다(주전 715년).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영토 확장 정책에 적절히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나라를 개혁하고 유다의 이익을 증진시켜 나갔다. 그는 유월절 행사에 북왕국의 남은 자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주전 712년에 앗수르 왕 사르곤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히스기야에게 공물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르곤이 죽은 후에(주전 705년)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앗수르의 왕이 되었다. 산헤립은 이집트와 블레셋과 유다의 연합 세력에 강하게 맞서 싸웠다(왕하 18:7). 그는 그 전쟁에서 46개나 되는 도시를 점령했다(사 10;28-32, 미 1:10-16에 나열된 도시들은 그 일부로 보인다). 마침내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고, 히스기야는 성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에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했다(주전 701년).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 밤에 천사들을 보내서 앗수르 군대를 치셨다. 이로 인해 산헤립은 거의 대부분의 군사들을 잃고 빈 손으로 퇴각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구원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왕하 19:35-36).
그 후에 히스기야는 병이 들고 말았다. 그는 병이 낫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해 주셨다(왕하 20:1-19, 대하 32:24-26, 사 38:1-22).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유다를 번영케 하셨고, 히스기야는 장차 있을 지도 모르는 앗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했다(대하 32:27-29). 그러나 이 기간은 큰 문제점을 안은 기간이기도 햇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대한 승리에 우쭐했다. 그래서 그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그가 가진 모든 보물과 무기고들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장차 유다가 바벨론에게 점령당하고, 그가 보여준 모든 보물을 빼앗길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사 39:6). 그러나 이사야는 장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로 잡혀갔다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다시 귀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이사야 40-48장).
2. 문학형식과 내용 요약
2-1. 문학형식
선지자 이사야는 히브리어의 대가였다. 그는 풍부한 어휘와 비유적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수많은 낱말과 표현들을 사용했다. 특히 이사야서에 나오는 전쟁(63:1-6), 사회생활(3:1-17), 그리고 전원생활(5:1-7)과 같은 비유적 표현은 이사야서를 탁월한 책으로 만들기게 충분하다. 그는 해와 달(24:23), 사막(35:1), 산과 나무(44:23, 55:12)등과 같은 자연을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일에 익숙했다. 또한 그는 조롱(14:4-23), 묵시적인 비유(24-27장), 풍자(44:9-20), 의인화, 은유, 재담, 두운, 유음 등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가 히브리어의 대가였다는 것을 분병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는 히브리어가 지닌 풍부함을 효과있게 나타낸 재능있는 설교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사야는 정신적인 귀족이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왕자처럼 다녔다. 그는 지존하신 분의 사자에 걸맞는 위엄과 도덕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그는 가장 훌륭한 유대 문화의 산물이었다."
이사야의 시적 상상력과 메시지는 반작용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의 예언은 동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응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건한 자들은 그의 메시지에 대해 두려움과 경배로 반응했으며, 불경건한 자들은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책 전체에 나타난 어휘와 주제의 유사성과 반복에 근거해서, 이 책은 처음부터 한 권으로 된 책이며, 이사야가 단독으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평주의 학자들은 서로 다른 주제들을 가지고 구절을 분리하여, 이 책을 몇 개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을 여러 개로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간이 갈수록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주제라고 주장했던 주제들은 점점 더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학자들은 점점 더 이사야서 전체가 통일된 구조를 가지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기여한 학자는 아크로이드, 이튼, 죠셉 젠센 등이 있다. 특히 조셉 젠센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계획이란 주제가 아치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이사야서에서 심판과 구원의 통일적인 메시지를 밝히는 길을 열어주었다.
2-2. 내용 요약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1-12장).
2.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여호와의 날(13-23장)
3. 소묵시록(24-27장)
4. 심판과 구원(28-35장)
5. 이사야와 히스기야(36-39장)
6. 영광스러운 하나님 왕국(40-48장)
7. 회복을 위한 사역(49-55장)
8. 영광스러운 왕국과 이에 대한 책임(56-6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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