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먼저 떠오른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해 가는 생의 의미이며 가치관이다. 물론 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가족, 건강, 자녀, 집, 마련, 승진, 성공, 명예...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느님을 내 인생의 중심에 둠을 의미한다. 종교적 의무감으로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어찌 의무감만으로 소중한 삶을 결정짓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생의 중심에 두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고 실속 있는 선택임을 깨달은 때문이다. 계산을 해보자. 부모의 삶은 대개 자녀에게 집중된다. 그런데 아무리 자녀를 위해 노심초사한다 한들, 그래서 1초도 눈에서 떼지 않고 그를 보호한다 한들 순간에 찾아오는 재앙이나 질병에서 아이를 보호할 수는 없다. 철통같은 인맥과 전략으로 무장한 대기업 총수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은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 힘에는 한계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것(만일 자녀라면)을 지키기 위해 안달하는 것보다 그 소중한 존재가 언제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 있도록 그 아이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임을 깨달은 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당시 왕들은 자국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 강대국의 힘을 빌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처세를 통해 명분을 유지해 나갔다. 그래서 한 번은 이 나라와 국제 정세가 바뀌면 다시 저 나라와 동맹을 맺기에 급급했는데, 이사야는 기득권층의 이러한 인간적 처세에 결연히 맞선다. 그들이 의지해야 할 곳은 강대국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이시며,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구원의 길임을 선포한 것이다.
1. 개관 우리는 지금까지 히브리 성경의 전기예언서(=신명기계 역사서)를 살펴보았고, 이제 후기예언서에 해당되는 네 개의 두루마리(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예언서)를 살펴볼 순서이다. 12예언서를 하나의 두루마리로 간주하는 이유는 12권을 다 합해도 다른 예언서 한 권 분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후기예언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책은 이사야서다. 이사야서는 시편과 함께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책으로, 히브리 문학의 진수로 간주되고 있고, 이러한 문학적-신학적 가치 때문에 매우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책으로 추정된다. 18세기경 이사야서 연구는 획기적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되더라인(J.C.Doederlein)과 아이히호른(J.G.Eichhorn)등에 의하여 이 책이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과 문체, 사상이 담긴 전승들의 연합(이사 1-9/40-66장)임이 밝혀졌다. 그러다 19세기 말, 둠(B.Duhm)은 이사야서 안에 공존하고 있던 3개의 다른 전승을 가려냄으로써 제1,2,3이사야를 구별해 내었다. 제1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예언자에게서 기원하고, 제2이사야 는 그보다 200년 정도 뒤인 6세기(유배 중)의 작품이며, 제3이사야는 그보다 더 후대인 귀환 무렵(5세기경)에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2이사야나 제3이사야가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이샤야라는 이름 아래 귀속된 이유는 이들 모두 제1이사야의 신학과 의식을 추종하는 이사야학파에 속한 이들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2. 제1이사야의 시대적인 배경 ①초기 활동(742-734년경) 이사야는 우찌야 왕이 죽은 해(742년) 소명을 받는데, 우찌야와 요담의 치세는 비교적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정되게 보이는 사회일수록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는 난무하기 마련이어서,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이사야도 남유다 기득권층의 교만과 탐닉을 고발한다. 이 무렵 북이스라엘의 임금은 므나헴이었는데, 그는 강대해지는 아시리아에게 자청하여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2열왕 15, 19-20) 자신과 아들 프카흐야가 입지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이를 위한 과도한 세금징수로 민중의 원성을 샀고, 결국 737년 페카의 쿠데타(프카흐야 암살)로 왕좌는 교체된다. 이전의 친아시리아적 입장을 접고 아시리아를 견제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했던 페카는 동병상련의 입장에 있던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의 르친과 공모하여 반아시리아 세력을 구축하는 ‘시로-에프라임 동맹’을 결성한다. 페카는 이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유다 왕 아하즈에게 합류를 강요하고 유다를 공격하지만, 이 동맹에 승산이 없음을 계산한 아하즈는 역으로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한다. 결국 남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시로-에프라임 동맹에 가담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응징을 받게 된다. 이 무렵 이사야는 아하즈의 이러한 정치적 노선을 비난하며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자세가 살 길임을 강조하는 임마누엘 신탁을 발한다(8장). * 아하즈와 대립 이사야 신탁의 대부분은 아하즈와의 극단적인 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세력을 확장해 가는 아시리아를 의식할 수밖에 없던 아하즈는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못했을 것이다. 시로-에프라임 동맹에 합세하여 시리아와 이스라엘에 항복하자니 왕위를 상실하고도 언젠가는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고, 아시리아에게 운명을 맡기자니 속국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후자를 선택한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왕에게 성전의 보물을 상납하면서 도움을 청한다. 다마스쿠스에서 르친이 살해되었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 땅 대부분이 아시리아에 점령되었을 때도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왕에게 축하의 사신을 보내고, 아시리아의 제단 모형을 예루살렘 성전에 그대로 설치하여(2열왕 16,10-18)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치기까지 한다(2역대 28장). ② 두 번째 시기(734-715년경) 아하즈가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자 이사야는 잠시 대외적 활동을 접은 듯하다. 이때 봉인하라는 명령으로 증거의 책(8,16-18참조)이 제작된다. 그러던 중 북이스라엘의 임금 호세아가 다시 반아시리아 노선을 취하자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5세는 사마리아를 멸망시킨다(722년). 북왕국의 수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남유다를 극도의 위기감에 빠지게 했고 이사야는 다시 예언활동을 재개한다. 이때 다른 신탁들(9,7-10,4 ; 17,1- -11 ; 28,1-4등)이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③ 세 번째 시기 (715-705년경) 이 시기는 히즈키야 치세 때이다. 아시리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집트는 필리스티아에 있던 국가들을 부추기어 다시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고, 이를 괘씸히 여긴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블레셋의 요지였던 아스돗을 파멸시킨다. 이때 이사야는 벌거벗은 몸으로 다니면서 포로로 잡혀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임을 선포하는데(20장), 이는 반아시리아 노선에 히즈키야가 가담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다윗 가문에서 나오게 될 메시아에 대한 신탁(9,1-16 ; 11,1-9)은 이 시기에 등장한다. ④ 마지막 시기(705-701년경) 705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죽자, 이사야의 신탁을 받아들이지 않던 히즈키야는 기어코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한다. 이사야는 바빌론이나 이집트도 믿을 것이 못 되고 이들과의 동맹은 ‘죽음의 계약’(28,15)임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30,1-5)만이 이스라엘의 살 길임을 설파한다. 결국 701년 유다는 산헤립의 침공을 받게 되고, 히즈키야는 감금되는 처지가 된다.
3. 제1이사야의 신학 ① 유다의 죄 왕국 멸망의 근본적 이유는 기득권자들의 무차별적인 부와 권력 추구와 권리 침해에 있었다. 남북 왕국의 멸망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야훼의 규범에 대한 ‘내부적 외면’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도덕적 죄들이 난무하게 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하느님 없이 자존(自存)하려는 인간의 교만’이었다. 하느님을 소외시키고 그분께 의탁하지 못하는 통치권의 오만이 가장 큰 죄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사야는 하느님의 속성을 ‘거룩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유명한 장면은 6장의 소명사화인데, 거룩함을 세 번 외치는 모습을 통해 거룩함의 극대치(히브리어법의 최상급 표현)가 표현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부각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속됨’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죄’이다. 곧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군사력과 정치력(동맹)을 쫓는 왕들의 ‘불신’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이다. ③ 힘에 의존하는 인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이사야 특유의 신학은 ‘임마누엘 신탁’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강조하는 신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듯이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에 실패한 지도자들을 경고한다. 사실 시로-에프라임 전쟁을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막고자 했고, 산헤립의 침공 때 히즈키야는 이집트의 힘을 빌려 이를 막고자 했다. 이렇게 동맹과 군사력에 의존했던 태도를 철저히 비판한 이샤야는 가시적 힘에만 의지하여 비가시적 존재인 하느님을 외면한 유다의 왕들에게 야훼 하느님이야말로 ‘만군의 주’이심을 역설한다. ④ 다윗 왕조와 메시아 여기서 자연히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으로 등장한 이는 다윗이었다. 철저한 신앙으로 광활한 영토와 국가적 위상을 주도했던 다윗을 그리워하며 이사야는 왕국의 생존은 다윗처럼 하느님께 의탁할 때만 가능한 것임을 설파한다(31,4-5). 더불어 이사야는 장차 다윗의 후예가 등장할 것임을 선포하는데,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남은 자들’ 안에서 다윗의 후예, 곧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며, 그렇게 다윗 왕조는 영원할 것임이 예고된다.
이사야의 신학은 ‘두려워 말고 야훼 하느님께 의지하여라’는 선포로 요약된다(8,12-13참조). ‘하느님을 믿지 못하면 정녕 서 있지 못하기’(7,9) 때문이다. 구원은 정치술이나 힘에 의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에게서 온다는 입장은 예언자의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사야라는 이름(히브리식 발음은 예샤야후)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삶을 배워가는 여정 중에 그 모든 혼란을 함께해 오신 임마누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을 조금이라도 덜 복잡하게 살고 싶다면 묘안은 없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그분께 얼른 눈을 돌리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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