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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인터뷰] 이창동 감독이 파놓은 깊은 우물

은바리라이프 2008. 9. 22. 12:59

[부메랑 인터뷰] 이창동 감독이 파놓은 깊은 우물

기사입력 2007-05-21 10:21 |최종수정2007-05-21 10:21

 이창동 감독ⓒ 이동진닷컴 - 김현호
이창동 감독ⓒ 이동진닷컴 - 김현호

[이동진닷컴] (오늘의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을 만나는 '부메랑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이 인터뷰 시리즈는 모든 질문을 그 감독 영화들 속의 대사나 자막에서 빌어오는 형식으로 이뤄집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서 되울려오는 물음에 감독들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요.)

영화란 그저 볼거리일 뿐이라고, 2시간 짜리 오락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영화는 '거울'이고 '나침반'이며 '망치'이다. 이창동 감독은 '온 몸을 던져 세계와 대결하는 단독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전통적 예술가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감독이다. 누구나 쿨하게 취향과 스타일을 내세우는 이 시대에, 그는 고집스럽게도 '본질'과 '진실'을 말한다. 휘황한 테크놀로지와 방대한 참고목록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는 오로지 인간이라는 심연 속으로 깊숙이 잠수할 뿐이다.

여기 한국영화가 파놓은 깊고 깊은 우물들이 있다. 그가 내놓은 네 편의 작품('밀양' '오아시스' '박하사탕' '초록 물고기')은 한국영화가 리얼리즘 분야에서 지난 30년간 캐낸 가장 빛나는 열매들이다.

신작 '밀양'을 들고 5년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을 만났다. 인터뷰를 했던 그의 방 한 쪽 벽에는 커다란 밀양시 지도가 붙어 있었다. 이제 막 뚜껑을 연 '밀양'에 대해서 유독 묻고 싶은 말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가 아직 밀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던진 질문도 '밀양'에 대한 것이 많았다.

탁자 위 재떨이에는 이미 담배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하루에 담배를 3갑이나 피우는 그는 새로운 대답을 할 때마다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이창동 감독이 느릿느릿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저는 걱정 좀 했었는데, 잘 됐습니다."('밀양'에서 전도연과 함께 유괴범의 면회를 마치고 나오던 송강호가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 첫 시사회 직후부터 '밀양'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뚜껑을 열기 전에 걱정도 좀 하셨을텐데요.

"요즘 다들 한국영화의 위기를 짙게 느끼셔서, 이 영화를 응원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에 맞서서 할리우드와 비슷한 방식으로 승부하는 것에 대해 힘에 부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많죠. 그래서 다른 방식의 영화들, 다양하고 진지한 영화들이 선전해주길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게 뭐예요?" "상장 아입니꺼. 근사하지예?" "나 이런 거 받은 적 없어요." "받았어예. 받았다고 하입시다. 촌에 이런 거 하나 걸어놓으면 소문이 쫙 나가지고 얼라들 마이 올낍니더."('밀양'에서 밀양으로 이사온 전도연의 피아노학원 벽에 도와준답시고 만들어온 상장을 거는 송강호.)

- 제60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밀양'이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제가 개막하기 전부터 많은 분들이 수상에 기대를 걸고 계시더라구요. 황금종려상이나 여우주연상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요.

"이젠 한국사회가 꽤 성숙한 것 같습니다. 예전엔 국제영화제 진출 하나만으로도 대단하게 보셨잖아요. 상이라도 받으면 공항에 플래카드 들고 환영 나오시구요.(웃음) 하지만 요즘 관객은 그런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언론이나 영화인들에게 아직 그런 애국주의가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게 등수 매기고 상을 주고 할 성질의 것은 아니잖습니까. 영화제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꼭 필요하겠지만 말이예요. 그나저나 빨간 카펫 생각을 하니 참 민망하네요."

- 그래도 종종 겪으셨던 일 아닙니까.(웃음)

"저는 국내 행사장에서도 빨간 카펫이 깔려 있으면 가급적 뒤로 들어가려고 해요. 칸 영화제에서 나비넥타이 매고 빨간 카펫 위에서 사진 찍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 앞이 캄캄해져요.(웃음)"

"야, 이게 누구야. 김영호 아냐? 진짜 오랜만이다."('박하사탕'에서 야유회를 갖던 예전 직장 동료들이 갑자기 끼어들어 춤 추는 설경구를 알아보며.)

- '오아시스' 이후 5년만에 신작을 만드셨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수행하신 기간이 들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5년이란 시간은 창작자에게 너무 긴 공백기가 아닌가요.

"소위 말하는, 창작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겐 맹점이 하나 있어요. 일을 안 하고 있어도 스스론 하는 것 같이 착각한다는 거죠.(웃음) 저도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요."

- 공백기가 길었다고 느끼신 것은 언제입니까.

"촬영하면서 많이 느꼈죠. 감도 잘 안 오고 확신도 안 서고 해서 많이 헤맸으니까요. 현장에서 하도 헤매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 그런데, 늘 현장에서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으십니까.(웃음)

"저랑 이전에 작업했던 사람들은 '저 인간, 또 저러는 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처음 작업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게 뭐지?' 싶었을 거예요.(웃음)

"밀양 뜻 알아요?" "뜻이요? 뭔데예?"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지요?"('밀양'에서 밀양 사람인 송강호에게 서울에서 온 전도연이 밀양의 뜻을 설명하며)

- '밀양'이란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밀양이란 도시명이 주는 강렬한 느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이청준씨의 원작 '벌레 이야기'를 떠올리신 게 먼저입니까.

"원작은 이미 20년 전에 읽었으니 영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제 속에 있었던거지요. 그걸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갖지 못했지만, 그 소설이 제 안에 들어와서 계속 숨어 있었던 겁니다. 아마도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특정한 공간이 필요할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게 언제 밀양이 됐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 밀(密)이라는 한자는 무척 복합적이지 않습니까. 비밀스럽다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빽빽하다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비밀스러우니 손에 만져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다른 한 편으론 빽빽하니 어느 곳에서도 편재(遍在)하기에 늘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지요. 저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이 영화에서 신의 뜻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자로 '밀'이라는 글자의 뜻이 그런 것 같아요. 빽빽하다는 것도 알갱이가 아주 작고 미세한 걸 의미하잖아요? '밀교'에서도 밀이고 '밀회'에서도 밀이며 '밀집'에서도 밀인데, 거기에 본질적인 뭔가가 숨어 있는 듯 해요."

"해태우유 없어요?" "아, 우유는 다 똑같지. 해태우유라고 뭐 다르나?"('오아시스'에서 갓 출소해서 두부를 사먹는 설경구에게 가게 주인이 우유를 건네주자.)

- 그런데 '밀양'에서 밀양이란 특정한 공간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간일 수 있습니다. "밀양도 다른 데와 똑같다"는 대사가 종찬(송강호)의 입을 통해 두 차례나 반복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밀양은 그저 한국의 중소도시의 전형성을 띄고 있는 곳이니까요. 저는 그래서 종찬의 그 대사가 이 영화 속 신애(전도연)의 특수하고 예외적으로 보이는 비극을 인류 보편의 문제로 확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종류가 다르고 질이 달라서 그렇지, 누구나 다 신애고 어디나 다 밀양인 셈이니까요.

"제게는 당연히 밀양의 전형성이 더 필요했지요. 밀양은 보편적인 공간이고 하나의 세계이며 우주인 셈입니다. 신애의 비극이라는 것도 스스로에겐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 어떤 인간이든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경험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게 인간 조건의 한계입니다. 그런 고통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신애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일 수 있다는 거죠. 종찬의 말을 통해서 그런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었어요."

"만약 하나님 사랑이 크시다면 왜 우리 준이가 처참하게 죽도록 내버려뒀어요?"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거를 아셔야 돼요. 저기 저 햇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요." "여기 뭐가 있어요? 햇빛이예요, 햇빛. 아무 것도 없어요."('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전도연이 자신에게 전도하려는 이웃 기독교인에게.)

- 저는 이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해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해서 깊숙이 다루고 있기에 종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애는 무엇보다 고통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거지요. 예전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종교를 믿는 사람의 비율을 파악할 때 '당신은 종교가 있으십니까'라고 묻지 않고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믿으면 그 사람이 현실에서 종교를 갖든 그렇지 않든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견해였지요.

"충분히 그럴 수 있겠어요. 지적하신 대로 신애는 사실 의미 없는 것에 대해 절망하는 거지요.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의 절망감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존재가 아무런 의미나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무의미에 대해 절망적으로 저항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초월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 인식 자체,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종교적이죠. 인간의 삶이 이렇게 덧없을 수 있나 하는 탄식이랄까요. 비극을 겪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방식으로 고통에 접하죠. 인간의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되거나 치유되지 않으니까요."

 이창동 감독ⓒ 이동진닷컴 - 김현호
이창동 감독ⓒ 이동진닷컴 - 김현호

- 신앙에 의지하게 된 신애가 범인을 용서하는 과정에서 크게 낙심한 뒤 망가지는 과정을 저는 의미에서 무의미로의 회귀가 주는 고통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밀양'은 거대한 비극을 겪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 인간이 다시금 무의미로 돌아가면서 겪는 참극이라는 겁니다.

"글쎄요. 저는 '밀양'이 무의미에서 의미로 갔다가, 다시금 또 다른 의미로 향하는 영화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갔을 때, 그 첫번째 의미는 '신의 섭리'라는 의미였지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인간의 눈으로 보고 싶은 신이었다는 거죠. 후반부에 신애가 싸우는 대상은 바로 그런 '보고 싶은 신'이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살려주세요'를 외치면서 또다른 의미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게 신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알지 못하는 밀양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진짜 신을 만나는 것 같은 거지요. 자기 눈으로 보고자 했던 신이 아니라 진짜 신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 종반부가 무의미가 아니라 또다른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신애는 밀양에 살러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남편에게서 배신당했다는 과거를 인정하기 싫은 데서 온 자기 기만이었죠. 그래서 밀양이란 땅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고 밀양 사람들과 소통할 생각도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얼굴도 모르는 밀양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말하면서 비로소 밀양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는 거죠."

"내가 들어드려도 되겠지예?"('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혼자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전도연에게 다가가 거울로 비춰주며.)

- 감독님의 모든 영화는 위에서 아래로 땅을 비추면서 끝나지요. 게다가 그 장면들엔 늘 햇볕이 내려쪼이고 있습니다. '초록 물고기'에서는 텅 빈 마당을 크레인 부감 쇼트로 담습니다. '박하사탕'에선 강가에 누운 채 하늘을 보는 주인공의 얼굴을 내려 찍습니다. '오아시스'에선 방 청소를 하는 여주인공과 방바닥을 가만히 내려다 봅니다. 그리고 '밀양'에서는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뒷모습에서 천천히 카메라가 내려와 햇볕 내리 쬐는 마당을 비춥니다. 특히 '밀양'이 푸른 하늘을 올려찍는 쇼트에서 시작해 땅을 내려 찍는 쇼트로 끝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감독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시려는지 알 수 있지요. 이창동이라는 예술가는 결국 이 생생한 땅의 이야기를, 거기서 살아가는 징글징글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거죠."

"제 작품 엔딩의 공통점을 한 번도 생각 못했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웃음) 저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제 영화적 관심은 결국 현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인 셈이니까요. 그래서 제 영화는 늘 현실에서 끝이 납니다. '오아시스' 마지막 장면에서 공주(문소리)가 빗자루질을 할 때 먼지가 보이는데 그거 만들어내느라고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때 다들 왜 하필 먼지냐는 질문을 했는데, 일상의 먼지 같은 현실에 대해서 제가 집착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 마지막 장면들을 내려찍고 있다는 것에는 연민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요. 인물들이나 이야기를 바라보는 감독의 연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 장면에는 감독의 의도가 강하게 담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내 시선이라기보다는 관객이 바라봐주길 바라는 시선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어쨌든 관객은 마지막 시선의 느낌으로 극장 문을 나설 테니까요. 혹시 현실 속에서도 그 영화가 이어질 수 있다면 그 마지막 장면의 느낌이 다리의 역할을 하겠죠."

- 그렇다면 그 네 장면 모두에 햇빛이 비추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감독님 영화의 마지막에 드리운 햇빛은 어떤 의미입니까?

"'밀양'은 햇빛이 정말 중요한 작품이죠. 그걸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영화에서 무척 중요했어요. 그런데 다른 세 작품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오아시스'는 먼지가 우선이었어요. 먼지가 보여야 하니까 햇빛이 필요했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긴 하네요. 갈수록 심해지는 생각인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에서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제게 있다는 거죠."

-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자연광이 드러내는 사물의 모습이 제게 중요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그런 의미에서 햇빛이 제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르겠네요.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햇빛이 중요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보여? 잘 보이냐구"('밀양'에서 전도연이 극도로 위악적인 행동을 하면서 하늘을 향해.)

- 이창동 감독님의 작품은 종종 '문학적'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이번 영화도 그렇구요. 그런데 저는 그런 지적이 예전에 감독님이 소설가였다는 사실에 기댄 편견일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밀양'처럼 '영화적'인 작품도 드물겁니다. 이 영화는 "왜 그 형식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거의 매 순간 설득력 있게 답하는 드문 작품이라고 봤습니다. 단적인 예가 지금 거론한 장면이지요. 극단적인 심리 속에서 좌충우돌하던 신애가 위악적인 행동을 할 때 카메라가 직부감으로 신애를 내려 찍습니다. 더구나 그건 인물을 180도 거꾸로 잡은 클로즈업이었지요. 그런 형식적 특성이 그 장면의 의미를 절묘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봤습니다. 웬만해선 도드라지는 형식을 사용하지 않으시는데요,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실 때 형식의 원칙 같은 게 있다면 어떤 겁니까.

"무슨 원칙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인물에 충실하자는 것이죠. 그건 사실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촬영에서 조명과 색보정까지요. 시각적인 측면에서 제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얼굴색의 자연스러움이거든요. 흔히 영화는 표정이라고까지도 말하는데, 인물이 가장 중요하죠. 인물을 어떻게 드러내는 게 가장 정직한 방식인가를 늘 고민합니다. 종종 영화가 형식에 맞춰서 인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인물이 일종의 오브제가 되는 거죠. 저는 인물이 오브제가 되는 영화가 싫어요. 내 영화가 그렇게 될 때는 정말 소름 끼치죠."

- 클로즈업을 거의 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쓰실 때는 대단히 파워풀하게 쓰시죠. '초록 물고기'에서 막동(한석규)이 차 앞 유리창에 얼굴을 박고 죽을 때라든지 '박하사탕'의 초반부에 영호(설경구)가 달려 오는 기차 앞에 팔을 벌리고 절규할 때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지금 이야기하는 '밀양'의 그 장면도 그렇구요. 어쩌면 평소에 쓰지 않으시기에 클로즈업 쇼트가 그렇게 강력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클로즈업은 어쨌든 제 맘이 시킬 때만 쓸 수 있는 거죠. '밀양'의 그 장면에서 신애를 거꾸로 잡아 클로즈업한 것도 그냥 직감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장면은 크레인을 써서 찍어야 했는데, 그게 그때까지의 영화적 느낌과 사뭇 다른 낯선 느낌이어서 기술적으로 무척 힘들었어요."

"중대장님,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박하사탕'에서 군인들이 광주의 시위 현장에 투입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 감독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종종 어디로 갈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위의 장면 외에도 '박하사탕'에선 주인공이 경찰관으로 일할 때의 선배와 밥을 먹으러 나갈 때조차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리고 '밀양'의 첫 대사는 길을 잃은 뒤 전화로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어디서 왔냐구요? 글쎄, 어디서 왔더라?"라고 말하는 신애의 대사입니다. 바로 그런 게 인간이 처한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심하게 들리도록 슬쩍 집어넣은 대사인데, 제 의도를 딱 낚아채시네.(웃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불확실성과 함께 어쨌든 우리는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존재라는 사실도 그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밀양은 어떤 도시예요?" "밀양이 어떤 곳이냐구예? 아, 뭐라케야 되노? 경기가 엉망이고, 뭐,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서 가까워서 말씨도 부산 말씨고, 인구는 뭐, 마이 줄었고."('밀양'에서 밀양 사람 송강호가 밀양에 대해 설명하며.)

- 밀양을 설명하는 종찬의 코믹한 대사를 들으면서 전 좀 엉뚱한 부분에서 놀랐습니다. 그 대사가 밀양이라는 도시를 네 개의 특성으로 설명하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게 각각 밀양의 경제 정치 문화 사회를 설명한다는 거죠. 물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건 아닐 테지만, 저는 그 대사를 들으면서 감독님이 무척이나 논리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감독님의 영화는 논리적으로 대단히 정교하고 복선도 치밀합니다. 기하학적이라고까지 느껴질 만큼 구조가 꽉 짜여져 있어요.

"원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웃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분배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게 우리가 사는 곳을 규정하는 방식일 겁니다. 실제로 밀양에서 사는 데에 중요한 정보는 전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본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 때로는 영화적 아귀가 너무 잘 들어맞아서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웃음) 예를 들어 '박하사탕'에서 순임의 남편이 찾아와서 아내를 만나달라면서 새로 사 온 옷을 건넬 때, 도로 옆 비탈에서 영호가 옷을 전부 벗고서 갈아입는 쇼트가 있지요. 군산 술집 장면을 포함해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나체가 되는 것은 영화적으로 순수 혹은 고백을 상징하니까 그 장면에서 옷을 홀랑 벗는 것은 너무나 말이 됩니다. 망가진 영호가 마지막으로 순수한 시절의 영호로 돌아가서 순임을 만나게 되는 것을 뜻하니까요. 하지만 리얼리티의 문제를 따지자면, 실제로 도로 옆에서 팬티까지 벗어가며 옷을 갈아 입을까요? 새 옷을 사올 때 순임의 남편은 정말 팬티까지 사다 줄까요? 혹시 그런 묘사가 영화적으로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 리얼리티를 조금 희생시킨 결과인 건 아닌가요?

"저는 그게 리얼리티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호는 그 순간 옷을 다 벗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옷을 사주는 순임의 남편 입장에서도 팬티까지 몽땅 샀을 거라고 봅니다. 감독이 늘 연출적인 계산을 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우엔 그저 직관으로 선택합니다. 나는 특히 그래요. 사실, 기승전결의 방식이나 영화적 효과의 인과 관계는 오히려 잘 떠오르지 않는 편입니다. 왜 직감이 그렇게 작용했는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요. 제겐 그 장면이 무척 중요했어요. 한 인간이 일상의 어울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벌거벗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필요했습니다. 목욕탕 장면이나 베드신이 아닌 이상 벌거벗은 장면을 보긴 어려운 상황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 속 멀리서 벌거벗는 모습을 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순임이 남편이 너무 착한 사람이니까 우리와 좀 다르게 생각할 것 같아요. 영호를 찾아온 행위 자체가 상식적으로 어려운 결정이죠. 양복을 샀으면 팬티까지 다 샀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기도 잃어버린 거 있죠?"('초록 물고기'에서 심혜진이 한석규로부터 스카프를 돌려받고서.)

- 영화 감독 생활을 하느라 잃어버린 게 있으십니까. 벌써 10년인데요.

"글쎄요. 영화 감독을 하다가 잃어버린 거라면 다른 걸 해도 잃어버렸겠죠. 어쨌든 살면서 잃어버린 게 많긴 해요."

- 예를 들면 어떤 겁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의 시골 학교에서 선생을 할 때, 일요일 아침이면 아이들이 찾아와요. '고기 잡으러 가입시더' 그러면서요. 평일엔 수업이 끝나면 선생들끼리 둘러앉아서 학교 이야기나 아이들 이야기를 나눠요. 그런 순간들엔 일종의 충일감이 있었죠.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충일감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햇빛도 가까이 느꼈죠.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공을 차면서 느낀 것도 있었고. 그런 것들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죠.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무척 중요한 것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걸 마음으로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됩니다."

"이제 내가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너 정말 네 일기에 쓴 대로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해?"('박하사탕'에서 형사인 설경구가 오랜 고문을 마치면서 고문받던 대학생에게.)

- 저도 여쭙겠습니다.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삶은 아름답죠. 이러이러하기에 아름답다고 설명하기 이전에,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워야만 하구요.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는 게 문제일텐데, 그 아름다움이 모든 이가 쉽게 받아들이고 동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근데 '박하사탕'에서 삶은 아름답다고 일기에 적은 사람이 수배 대학생인데, 형사인 영호 입장에선 아마도 신기했을 거예요. 멀쩡하게 잘 사는 놈의 일기장이 아닌,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체제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친구의 일기장이니까요. 전혀 삶이 아름답지 않을 것 같은 친구가 그 말을 썼으니 꼭 묻고 싶었을 거라구요. 그건 자신에게 하는 질문과도 같은 거죠. 사실 그 대학생이 그렇게 쓴 것은 삶이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일 겁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면 싸움도 못하고 현재도 견딜 수 없는 거니까요. 누구든 삶이 아름답다는 믿음 그 자체가 없으면 살기 어렵죠. 삶이 이러저러해서 아름답다고 말하면 바로 배반 당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다워요."

(이 기사의 후반부는 22일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연이어 게재됩니다.)

이동진 닷컴 기사목록|기사제공 : 이동진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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