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론] 보이지 않는 태양, 당신은 누구시기에 | ||||||||||||||||||||||||||||||||||||||||||||||||||||||||||||
|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밀양>…삶에 대한 깊고 진지한 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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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과 밀양으로의 이주라는 영화의 발단은 죽은 남편의 꿈을 살아남은 아내가 이룬다는 의미에서 매우 전형적인 멜로영화의 이야기 도입 방식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애당초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외도행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그녀가 구축했던 ‘단란한 가정 속 행복한 30대 주부’라는 환상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직 다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이주하는 이유는 이미 균열된 환상을 봉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속사정을 모르는 낯선 장소에서, 죽은 남편을 열렬히 사랑하는 아내로 남편의 분신과 같은 어린 아들과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면 깊은 곳에서 남편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죽음과 함께 드러난 견딜 수 없이 참혹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밀양에서의 삶은 기워 맞춘 환상의 삶이 될 것이었다. 그 환상은 기워진 것이기에,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것이 가리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불쑥불쑥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를 그림자처럼 지키는 종찬(송강호)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 영화에서 종찬의 역할은 텍스트적으로 매우 기능적이다. 다시 말해 종찬이라는 존재는 영화 속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보다는 영화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의미하는 방식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선은 신애의 특별한 인생을 일반화하는 독특한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를 통해 신애의 인생 역정은 기구한 여성의 별다른 그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간을 공유하는 모든 존재의 그것이 된다. 그는 아마도 단편 <벌레이야기>의 화자, 곧 이청준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 여성의 남편이 변신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청준의 화자와 이창동의 종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청준의 화자는 주인공의 남편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종합하는 객관적 시점을 견지하는 비인간적 존재인 반면, 이창동의 카센터 주인 종찬은 영화적 현실 속의 한 인물, 곧 결코 정보를 종합하지도, 신애의 속내를 들여다보거나 주변 인물들의 됨됨이를 평가하지도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와 같은 소설 속 인물의 영화적 변신은 영화가 결코 소설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종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편화한 신애의 특별한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 주인공 신애가 겪는 지독한 비극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을까? 신학적 문제에 빠져든 영화
그런데, 진실과 대면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환상을 구축하는 그녀의 노력이 다시 참혹한 진실을 불러들인다. 그녀에게 참혹한 진실을 일깨우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구축한 환상에 말려든 자다. 그녀를 돈 많은 미망인이라고 오인한 주변인 가운데 하나가 그녀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부터 급격히 신학적인 문제에 빠져든다. 이른바 신정론(神政論)의 문제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가혹한 비극이 발생하는가?
주인공들을 통해 본 내 자신
그녀는 신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영화 속의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배신한 자는 그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의 복수가 서슬이 퍼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력하고 심지어는 희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며, 따라서 절망적으로 저항할 뿐이다.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자살 시도가 철저한 절망의 표현으로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영화에서 그녀의 자살 시도는 상징적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 위해 죽어야 했다. 자살 시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고 돌아온 날 그녀는 미장원에 들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를 잘라줄 미용사는 다름 아닌 살인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신이 그녀를 끝까지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자르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스스로 가위를 들고 제 머리를 자른다. 그녀의 하느님이 끝까지 방해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의 욕망에 맡기는 주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의 진실에 터하여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신애가 종찬에게 거울을 맡기고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미장아빔’(mise en abyme), 곧 영화가 말하는 모든 의미가 누적되어 있는 요약적 장면이다. 그녀는 이제 ‘전혀 그녀의 타입이 아니’었던 종찬에게 거울을 들게 하고 자신을 본다. 그녀의 삶은 이제 폐쇄적인 환상 밖으로 열려졌다. 그녀는 환상을 가로지른 것이다. 이때 환상을 가로지른 그녀의 의지는 그녀를 밀양으로 이끈 운명, 혹은 미지의 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전적인 자유가 바로 절대적인 존재에의 복종이 되는 자유의지라는 신학적 개념이 하나의 장면에서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한편 관객은 종찬이 든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본다. 그녀는 관객의 거울 이미지가 된다. 물론 영화는 관객과 신애 사이의 상상적이며 자기애적인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관객들은 종찬이 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극적인 진실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누더기 같은 환상 안에서 실제로는 얼마나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종찬은 프리즘 같은 존재다. 종찬과 신애에게서 우리 자신을 본다. 영화는 새파란 창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당에 고인 지저분한 개숫물을 포착하며 끝난다. 추상적이며 신앙적인 하늘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이며 신 없는 현실로 돌아온 걸까? 그렇지 않다. 개숫물이 반짝이는 건 바로 태양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
사족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그리스도교 재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영화는 어떻게 이렇게 냉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가 경악스러울 만치 사실적이다. 영화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애와 하느님 사이를 매개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신애와 마찬가지로 미망 속의 군상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그들을 그들의 진실에 충실한 자로 그릴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정도로만 그려졌다는 게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객관적 시선에 드러나면 어딘지 어색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양식만 있어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상상적으로 오해하는 한계 속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자인(自認)이라는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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