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구원, <밀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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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주목할 만한 이유 최은 : <밀양>은 대중영화에서는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다루고 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사람의 아들> 등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기독교를 진지하게 다룬 영화가 드물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밀양>이 단지 기독교를 소재로 차용했을 뿐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와 ‘구원’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은 개봉 전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저 전도연과 송강호가 출연한 멜로드라마로만 언급되었는데, 이는 배급 전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인식은 흥행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영화, 그러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최은 : 불편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고통과 구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불편하다. 즉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더욱이 자신과 타인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불편한 것이 당연한 문제 아니겠는가. 더욱이 이 영화는 신애의 고통 자체가 너무 가혹하고 부당해 보이도록, 따라서 신애의 분노와 같은 감정의 변화가 나름대로 타당해 보이도록 구축하고 있다. 전도연의 뛰어난 연기 덕에 우리는 ‘무고한’ 신애의 고통을 마치 내가 당한 양,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교회의 현실 성찰하게 하는 영화 이광하 : <밀양>은 현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신애가 고통당할 때 교회에 의지하지만 결국 교회 안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신애는 항상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종찬에게 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신애의 삶에 생명을 불어 넣는 존재는 치근덕거리는 종찬과 밀양 지역의 이웃들이다. 최은 :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 한 것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신애 주변에서 신애를 보살펴주는 구역 식구들을 보자. 신애를 위한 기도회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우리 삶의 현실에서 누군가 한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철야기도하는 모임을 찾아보기 쉬운가. 신애가 하나님에 저항하고 분노할 때의 행동도 여느 교회에서는 쉽게 ‘사탄적’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만한 종류의 것들 아니던가. 정작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과 관용이 고통 받는 신애에게 진짜로 도움이 되었는지의 차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비판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 그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종교사회학적인 문제로부터 신학적인 문제로 논점을 옮겨가기 때문이다. <밀양>에 비친 교회의 모습이 진지하다 최은 : 교회에 대해서는 영화가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그간 기독교인은 두 가지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첫째, 위선자, 둘째, 광신도. <투캅스>의 부패 형사나 <친절한 금자씨>에 등장하는 목사처럼 대부분 냉소적이거나 극단적으로 희화한 모습으로 나온다. 한국 영화에서 기독교는 필요할 때 대단히 편리하게 차용하고 소비해온 하나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비열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나쁜 짓을 저지른 후 어깻죽지에 성경을 끼고 새벽기도에 나서는 것을 보여주면 되었다. 영화 <밀양>에서 감독은 종교 영화 혹은 종교 비판적인 영화로 통칭되면서 영화의 진짜 주제가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점은 비판적 시각을 떠나 긍정하고 싶은 부분이다. 기독교에 대한 표면적이고 상투적인 접근을 넘어 진지한 고민과 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원작 <벌레이야기>와의 관계
최은 : 소설과 달리 <밀양>이 보이고 있는 화해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덧붙여 나는 <밀양>의 신애도 철저하게 저항했음에 주목하고 싶다. 자살이란, 피조물이 생명을 주신 창조주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 아닌가. <벌레이야기>의 경우 믿음의 출발점이 다르다고 본다. 아내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이가 사라진 후부터 시신이 발굴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기복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내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빌기’ 시작했고, 사건이 종료된 후에도 아이가 천국에서 영면하도록 계속 헌금을 하고 교회에 나간다. <밀양>에서 철저한 절망 끝에 붙들게 된 신애의 믿음에는 처절한 고뇌가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던 신애는 후반에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하늘의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분노의 눈빛을 보낸다. 이 부분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더 이상 신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통치방식’이다. 소설이 신이나 제도에 의해 발생한 폭력적인 상황과 그에 비한 개인의 무력함에 대해 비중을 싣고 생각하도록 한다면, <밀양>은 좀더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된 구원과 용서의 길은 무엇일까 이광하 : 기독교의 구원과 용서에 관한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서 문제제기한다. 신애가 유괴범을 용서하러 갔을 때, 유괴범은 성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주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고 말한다. 신애는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미 용서 받은 유괴범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과연 참된 구원과 용서의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 하는 장면이었다. 구원을 말할 때, 은혜와 용서는 강조하면서 진정한 참회의 과정이 없다면, 진실한 것인가. 구원이 값없는 은혜이지만, 내 편에서는 진정한 참회의 과정이다. 본회퍼가 값싼 은혜라고 말했듯이, 용서가 고통과 죄를 명백하게 하지 않고 용서 받아야 할 죄를 덮어버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닌가. 최은 : ‘값싼 구원’보다는 ‘값없는 구원’에 대해 생각했다. 로마서가 말하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형수의 평온함 자체를 문제 삼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고 그것은 신애에게도 마찬가지다. 단, 신애의 고통을 생각하면 사형수가 좀더 신중했어야 했을 수는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배려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웃음).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태도의 문제이지 본질은 아니다. 신애를 분노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용서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피조물의 무력감 혹은 그것조차 가로채버린 신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신애로서는 모든 것을 잃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최대한의 ‘베풂’이 용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애 편에서는 “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주권의 문제다. 내가 믿기로 선택하고 용서했기 때문에, 혹은 그 후에 하나님이 용서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가. 이광하 : <밀양>은 어떤 점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애는 용서하지 못했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선언하고 미쳐가는데, 실질적으로는 이 과정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가는 과정이다. 기독교가 통념으로 제시하는 것이 깨지면서 그는 진정한 용서의 과정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밀양은 무엇인가?
영화와 소설에서 햇볕은 종종 실존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지는 것 같다. 카뮈의 <이방인>은 왜 사람을 쏘았느냐는 질문에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라고 답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유정도 ‘아침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약을 삼켰다고, 자살 시도 동기를 밝힌다. 늘 곁에 있지만 신비로우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햇볕에는 있는 것 같다. 이광하 : 밀양을 숨은 빛으로 볼 수 있다. 영화에는 태양 자체가 아니라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이 자주 나오는데, 영성신학에서 빛은 영적 각성과 관련이 있다. 중세 수도자의 책 중에 <무지의 구름>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진정한 하나님 체험은 이성과 감정으로 알고 느끼는 차원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이성과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한 믿음으로 보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순수한 믿음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 <밀양>의 비밀스럽게 숨은 빛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체험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길이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다. 안셀름 그륀은 두 가지 종류의 영성을 말한다.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 위로부터의 영성은 이상적인 것을 추구한다.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영성 어두운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발견하는 영성이다. 한국교회는 위로부터의 영성을 강조했다. 가령, 성공과 승리의 길을 추구한다. 그런 한국교회를 향해서 <밀양>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요청한다고 본다. 외면하려고 하는 고통과 어두운 것들 속에서 숨은 빛(밀양)을 보라는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구원 최은 : <밀양>은 하늘의 이미지로 시작하고 있다. 고장 난 차 안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하늘.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땅이다. 마당의 흙 위로 신애가 손수 자르는 머리카락이 햇살과 함께 흩어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햇볕이란, 그리고 구원이란 결국 하늘에서 땅으로, 부어지는 것임을 신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광하 : 문학평론가 김현 씨는 소설 <벌레이야기>에 담긴 세계관을 비극적 현실주의라고 했다. 비극적 현실주의는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신애의 삶은 의미가 없다. 구원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초월적인 세계에 있다. 그러나 구원이 있는 다른 곳이 결국은 이곳이라는 인식이 비극적 현실주의라고 한 거다. <밀양>이 가진 세계관을 비극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스런 현실과의 화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통한다고 본다. 신애는 나름대로 밀양에 새로운 기약을 하면서 찾아갔다가 버림받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신애가 그 밀양과 화해하는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세계와의 화해를 구원이라고 볼 수 도 있지 않은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고통스런 현실을 수락하는 용기로 나타나야 한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 비교할 때
비슷한 문제들을 즐겨 다루어왔던 감독들로 박찬욱, 김기덕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주로 잔인함과 시니컬한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김기덕은 그야말로 잔혹한 이미지들로 문제를 파고들고 박찬욱은 거기에 한 술 더 떠 유머를 가미한다. 그 점이 김기덕보다는 박찬욱이 환영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창동은 그에 비하면 사변적이고 우직한 방식으로 고민거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용서의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은 신명기에서 제목을 빌어 왔다지만, 복수는 신에게 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개인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극단으로 유괴라는 소재가 종종 차용되는데, 박찬욱은 이에 대해 결국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행하는 대항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정은 그나마 신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마저도 ‘거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유정은 엄마를 용서하러 가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용서하겠다고, 그러니 저 사람만은 꼭 살려주라고 기도한다. 그 역시 구원에 있어서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김기덕은 구원을 여성과 성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멀쩡한 여성을 창녀로 만들어놓고 성녀라고 우기는데, <사마리아>에 이르면 주인공 아이는 스스로 성녀가 되어 구원과 용서를 베풀고 다닌다. 분명한 것은 확실히 이 시대가 해결하지 못하는 분노와 상처를 안고 무언가 해답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역사적인 차원이든. 하지만 <밀양>은 냉소와 비웃음만이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한 해결책인 양 다루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진득하고 묵직한 고민을 만났다는 반가움을 전해준 작품이었다. <밀양>, 기독교 영화? 이광하 : 영화를 보고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생각났다. 도올은 기독교를 보편적인 언어로 제시하려고 한다. 교회 안에서는 논란이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의 말이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한국교회를 향해서 교회가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얘기하기를 바라고 있는 방증이라고 본다. 그동안의 기독교가 자기강화를 위해서 일했다면 이제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사회를 위하는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밀양>을 기독교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최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본다. 구원과 복음은 쉽게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부분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은 다 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서 벌어질 대로 벌어진 간극을 메워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화를 통해 본질적인 일치와 합의를 이룰 수 없을지 모르지만 화두를 던지는 작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거기서부터 제기된 문제들을 가지고 대화를 시도하면 된다. <밀양>은 그러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고통이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비밀’ 아닌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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