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1:39-56
제목: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와 그의 찬양
본문
이 때에 마이라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세례 요한의 탄생 고지와 예수의 탄생고지는 그 내용 전개에 있어서 병행을 이룹니다. 천사의 나타남-두려움-천사의 고지-고지에 대한 표징의 요구-표징과 확신을 줌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병행을 이루는 것은 두 수태고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과 예수의 사역을 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지를 통하여 자식 없는 의인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구원이 임할 것임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한 집안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위로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직무를 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는 직무입니다.
반면 예수의 출생에 대한 고지를 통하여 비천한 계집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나타냄으로 비천한 자들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입은 은혜와 평강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는 무궁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수태 고지와 예수의 수태 고지가 병행을 이루어 설명이 되어도 세례 요한은 주 앞에 앞서 가서 예비하는 자이며, 예수는 그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이 1:39-56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기사에서 확인되고 연결되며 증거 됩니다.
천사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아이가 있으리라 하였을 때 마리아는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였고 천사는 그의 친족 엘리사벳도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인데 늙어서 아들을 배었다는 것을 표징으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였고 그 때에 산중에 가서 유대 동네 사가랴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엘리사벳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뛰논 후 그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여자 중에 마리아가 복이 있는 것은 그가 주의 모친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여자의 복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히 아이 낳음으로 그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 삼손의 어미, 사무엘의 어미 한나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식을 낳음 안에서 여호와의 기업과 생명의 복과 구원에 참여하여 복을 얻은 여인들입니다. 마리아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 낳음을 통하여 이제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복이 있습니다. 그 태중의 아이가 복된 이유는 그 아이가 영원히 야곱 집에 왕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약의 다윗 왕들과 다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에서부터 하나님에 의하여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잉태되며 다윗의 위에 앉아 영원토록 왕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 나라는 구약의 나라처럼 멸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요한이 복중에서 뛰어 논 것은 복 있는 주를 잉태한 주의 모친이 방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태중에서 기뻐한 것은 세례요한의 일은 주 앞서 가서 많은 이들을 주께로 돌이키는 일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를 섬기는 자로서 기뻐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이어서 말하기를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는 여자의 복에 대하여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믿음의 내용도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믿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구약의 자식 없는 여인들도 그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자녀 낳기를 소원하였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약속한 바를 이루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한 뒤에 마리아가 화답하여 찬송하였습니다. 이 찬양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46-47, 48-50, 51-53, 54-55가 그것입니다.
46-47은 찬양의 서론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녀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48-50은 마리아가 주를 찬양하고 주를 기뻐하는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도 반복하여 설명하는데 먼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나나 엘리사벳처럼 아직 결혼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자식 없음 자체가 비천함은 아닙니다. 비천함은 가난한고 비천한 자신의 신분과 관계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51-53에서 비천한 신분과 가난한 자들을 일으키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로는 만대에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제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되고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사벳이 확언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를 주의 모친으로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그 근거를 반복하여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능하신 이는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신데 특히 마리아처럼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성령을 입힘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도록 이루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능하신 분으로서 그의 이름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심으로 이루시기 때문에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비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경외함은 이 문맥에 흐름에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말한 것처럼 그것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도 그 복에 참여하여 긍휼과 자비를 얻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대대에 그러할 것입니다.
51-53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확장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내용은 마리아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저주와 함께 대비되어 언급됩니다. 그리고 대비된 두 부류는 일단 이 노래에서 온 민족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되어 노래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 이하에서 사용되는 시제는 과거형을 사용하는데 구약 히브리어의 완료형을 희랍어로 그대로 축자적으로 옮긴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즉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형으로서 하나님이 이미 그 일을 시작하였고 또한 그 구원의 일이 성취될 것을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먼저 51절은 이 단락의 서론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자비하심은 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원수를 그의 능하신 팔로 원수들을 심판하신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가지고 부요한 이들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과 대비됩니다. 이러한 대비는 구약의 의인과 악인 남은 자의 사상과 연관됩니다.(시75:7, 107:40-43, 113:7-9, 147:6) 그러한 자들을 흩어심은 뒤에서 설명되는 내리치시고 공수로 보내심의 의미입니다.
첫째 권력을 가진 높은 신분과 그렇지 아니한 비천한 신분을 대비하여 노래합니다. 능하신 하나님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한 문제는 뒤에서 설명하는 부한 자들과 함께 단순히 신분상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에 대한 것은 실제적인 부와 권세 그리고 그와 대비하여 실제적인 가난과 비천함이 대비되어 있지만, 그들의 대한 문제는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구약의 남은 자들과 대비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비천한 의인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시적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그들의 악한 행동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에서도 그러하며 예수님의 비유와 교훈에서도 부자들은 영혼을 제물에 의탁하는 자들이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아니한 자들로 표현됩니다.
만약 그런 것이 배제된 신분상의 문제만을 언급한다고 한다면 비천한 자들을 높인다는 것도 하나의 높은 신분과 관계되기 때문에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내리치시고 높이는 용어는 구약의 구원과 회복에 관계된 용어입니다. 구약 때 약속된 하나님의 복과 생명은 높은 권세와 그리고 가나안 땅의 풍성함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든 산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복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의인들은 악한 자들의 지배 아래서 학대를 받았고 이스라엘은 이방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지 못하였고 긍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능하신 한님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십니다.
두번째 내용은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비된 내용도 구약의 남은자와 의인과 악인의 사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복과 저주도 가나안 땅의 복과 저주와 관계된 내용들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의 복은 가나안 땅의 풍성함으로 자기 백성을 배불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들이 받는 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져서 악한 자들이 의인들처럼 부요하였으며 그들은 가난한 의인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의인들은 가난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약속대로 악한 부자들은 공수로 보내며 의롭고 주린 자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며 부요 하게 하십니다.
54-55은 위의 단락에서 설명된 내용을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확장하여 노래합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가난하고 비천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장자 백성이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백성으로 온 열국 중에 으뜸이 되어야 하고 가나안 땅의 부요함으로 이방인에게 꾸어주어 머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여 저주를 받아 이방의 압제 아래 있으며 꼬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더 나아가 주를 두려워하는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우사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 조상에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그 조상에게 약속한 약속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이 늙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을 위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 아들과 또 그 후손과 언약을 맺으사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도우심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이 그 약속을 따라 지금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도 마리아가 낳는 아들, 마리아에게 자식을 주심으로 마리아의 비천함과 돌아보아 긍휼히 여기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과 그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삭처럼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고 그로 말미암아 씨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케 되는 그런 긍휼이 아니라 이 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며 그 나라는 영원한 그런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통한 자비와 구원을 통하여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무궁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심으로 그에게서 아들을 출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아들을 잉태시키고 출생시킴으로 그를 비천으로부터 일으키셨을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자기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아들은 비천하게 출생하였으며 또한 비천한 자들의 구주로 오셔서 친히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비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임하였음을 선언하시고 증거하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주린 자가 배부르며 병든 자가 치료함을 받으며 종들이 놓임을 받는 은혜의 해입니다. 이것은 곧 조상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영원히 자비의 아버지가 되셔서 자기 백성에게 긍휼의 은혜를 나타내사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이 구원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는 이 구원을 하늘의 구원으로 완성하시고 무너지지 아니하는 긍휼과 자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 위한 것인데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며 자기 백성들로 하늘 지성소의 씻음과 죄사함과 나라를 상속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오른 팔로 예수를 살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비천함 가운데 있는 예수를 살리시고 높이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과 유대의 권세 자들은 교만하여 가난한 자들의 구주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뛰어난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높이시려고, 가난하고 비천한 자기 백성들을 높이시려고 권능의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보내었습니다. 이 높음은 가나안 땅의 권세와 부요함으로 높아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의 권능의 나라와 권세로 높아짐입니다. 하늘의 부요함으로 채우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권세와 부요함은 사라지는 것이요 죽음에 속한 것이요 썩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의 권세의 왕들은 온전한 권세가 아니었고 힘있는 이방의 권세에 의하여 무너졌으며 죽음의 권세에 무너졌습니다. 가나안 땅의 부요함도 이방의 부요함에 비하여 온전하지 못한 것이며 죽음의 권세에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신 하늘의 부요함과 권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어 그의 무궁한 나라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권세의 나라에 우리 같은 이방 백성들도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세우신 나라와 주께서 보내신 성령의 선물은 이방에까지 비추는 빛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죄사하는 회개의 세례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긍휼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난한 자들, 이스라엘 백성의 비천한 자들보다 더 자비와 긍휼이 없었던 백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비와 긍휼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얻고 세례를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 무너지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음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영영한 긍휼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가난이 무너뜨리지 못하며 또한 세상의 부요한 자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이 무너뜨리지 못하고 조롱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또한 이 나라는 세상의 부요함과 권세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나라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이제 가난한 자들이나 부요한 자들이나 권세가 있는 자들이나 그렇지 아니한 자들이나 동일한 형제 자매이며 자기의 신분과 부요함을 자랑함으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부요함으로 형제를 채움으로 평균케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함께 통용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께로부터 받은 자비와 긍휼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여기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찬송하는 것은 구약의 약속의 언어로 노래한 것이며 또한 예수의 지상 생애도 옛 약속의 성취자로 자기의 구원을 말씀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시고, 병든 자들, 비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치료하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내용이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의 구원으로 성취되어 누려집니다. 우리는 예수의 지상 생애의 기간 중에 살고 있는 백성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 나라의 권능과 능력의 선물인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한 자입니다. 우리는 권세 있는 백성입니다. 이 나라는 무너지지 아니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부요함을 자랑함으로 하나님의 복과 자비와 은혜를 증거 해야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세상의 먹고 마심의 부요함을 자랑하며 세상의 권세를 자랑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것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높아지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 앞에서 담대히 우리의 복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자랑해야겠습니다. 구약의 의인들처럼 탄식하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담대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권능과 나라와 권세와 부요함을 자랑하여 세상의 교만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무릎을 꿇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도들은 가난하였고 권세가 없었지만 유대의 지도자들과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권세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증거하였고 복음과 그들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흥왕하였고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주의 권세와 나라를 증거하면 세상의 교만하고 부요하고 권세 있는 자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며 자기들의 권세와 부요를 버리고 주께로 무릎을 꿇을 것이며 우리의 증거를 막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가난하고 병들고 비천하다고 하여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자비와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주를 믿는 믿음이 아니며 스스로 먹고 마심과 세상 권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그것이 부끄러움이며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의인들도 그것 자체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장차 있을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하며 인내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였던 복을 그것도 하늘의 나라의 권능을 성령의 선물로 받음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낙심하고 실망하고 부끄러워한다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이 여길 것이며 우리를 모르다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요함으로 세상의 머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가 되었고 권세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부요함과 권세의 선물인 성령을 힘입어 담대히 주의 나라를 전파하고 찬양하는 주의 백성으로 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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