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례 요한의 수태 고지-1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안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 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매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성취된 말씀인데 누가는 그 말씀에 대하여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 데오빌로가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 기록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것은 성취 된 말씀의 구약 약속부터 살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구약의 약속된 말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취는 특별히 자기 백성을 향한 긍휼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잉태 그리고 출생과 예수의 생애에서 이루어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이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이뤄집니다. 누가는 이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기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누가의 기록이 다른 기록에 대하여 예수의 사역에 대하여 역사적 순서로 기록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근원부터 자세히 다시 말해서 구약의 약속부터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기록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는 이에 따라 구원 역사를 구약-예수 시대-교회 시대로 나눕니다. 구약은 말씀의 약속의 시대이며, 예수의 시대에선 그 말씀의 성취의 시대이고 교회 시대에선 성취된 말씀이 확장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약속되었으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었으며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그 말씀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사역은 약속의 말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이제 성취되고 완성되었음을 선언하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역이며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침도 선교자로 부르심과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제사장의 나라 선지자의 나라입니다. 그는 다윗의 위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으로 그러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옛 구약 때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선언하는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의 은혜의 때가 임하였고 선언되는데, 이제 그를 통하여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인 성령이 임하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되는 시대가 임하고 그러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출발은 성소에서 한 선지자의 출생 약속과 함께 시작되며 마지막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지자적 사명을 위임하고 제자들이 성전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림으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1:5-80 세상 왕의 배경과 함께 세례요한의 잉태, 예수의 잉태, 그리고 세례 요한의 탄생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 합니다.
1:5-25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5절 상반절은 역사적 배경, 5절 하반절-7은 세례 요한의 부모에 대한 소개, 8-23은 천사의 수태고지와 사가랴의 반응 그리고 표적, 24-25은 엘리사벳의 수태와 엘리사벳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유대 왕 헤롯 때입니다. 이 배경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 역사의 배경을 말함으로 그 사실의 신빙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가 역사적 배경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 역사의 배경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유대 왕이 헤롯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의 왕입니다. 본래 하나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그 후손을 아들 삼으시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멸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비천하게 되었으며 긍휼함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저주처럼 가나안 땅의 저주를 받아 가난하게 되었으며, 모든 질병과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열국의 꼬리가 되었고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나타남은 이방의 지배 아래 비천함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나타나는 시기는 이방 왕국이 지배 하는 이 세상의 끝에 나타나는 것으로 선지서에서는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지배하는 열국은 심판을 받고 하나님이 메시야를 통한 자기 백성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며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다니엘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이방 왕국에 사로잡혀 있는 다니엘을 통하여 이 세상나라는 멸하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는 여호와와 성도들의 나라가 되리라고 말한 것이 그 주제입니다. 특히 느브갓네살 왕이 본 한상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본 것은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으로 된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신상이 부숴져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상징합니다. 곧 세상 나라는 멸망하지만 하늘의 하나님이 세우시는 이 나라는 망하지도 아니하며 영원히 서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다니엘이 꿈을 꾸어 이상을 보았는데 네 짐승에 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사자와 같고 둘째는 곰과 같고 셋째는 표범과 같고 넷째는 열 뿔을 가진 놀랍고 무서운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짐승은 하늘에 게신 분, 보좌에 앉으신 분에 의하여 심판을 당합니다. 특히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을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그 권세와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며 이 나라는 성민들이 상속받습니다.
이어서 다니엘은 수양과 수염소에 대한 이상과 작은 뿔에 대한 이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시는 대가 마친 후에 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향한 진노를 마치시고 이방 왕국을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마지막 정한 때에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다니엘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 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여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곧 칠십이레가 차면 정한 때에 지극히 거룩한 자가 나타나 열국을 심판하고 나라를 세울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남방 왕과 북방 왕에 관한 이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 그리고 승리한 북방 왕이 성전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할 것이지만 정한 때가 되면 결국 그도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 후에 이스라엘의 천사 미가엘이 나타나 책에 기록된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죽은 사람의 다수가 부활하여 영생을 얻은 자와 수치를 당할 자의 구별이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서는 세상 왕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끝에 메시야 나라가 일어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세상 나라는 멸하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선지서에서도 그러한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더 나아가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세상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대비가 깔려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세번에 걸쳐 다른 복음서와 달리 세상 왕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함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심문 받으심에서도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친구가 되어 예수를 심문 한 것이나 헤롯이 예수를 업신여기며 조롱한 내용들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와 세상 왕들과 관원들의 핍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흥왕함에 대하여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1:5에서 유대 왕 헤롯 때를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세상 역사의 배경을 말함으로 복음의 진실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임하는 구원 역사적 배경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는 다윗 왕조가 아니라 헤롯 왕이 왕으로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이제 그 때는 끝나고 구원의 때가 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천함과 복역의 시대는 끝나고 주와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지배하는 구원의 때가 임한 것입니다.
그 구원의 서광은 성소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출생의 예고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출생의 예고는 사가랴의 기도와 백성의 기도의 응답과 관계됩니다. 그것은 구약 때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말한 내용과 같다 하겠습니다. 자기 백성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하나님은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자기 백성의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말한 말씀의 응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예고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출생은 비천한 자의 부끄러움을 없게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긍휼의 은혜의 완성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입니다. 제사장 가문인 아론 자손은 24반차로 나누어서 성소를 봉사하였습니다. 그 중에 아비야 자손은 여덟째에 속하며 그들은 돌아가면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봉사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에 대하여 ‘아론의 자손’이라 표현합니다. ‘누구누구의 자손’이다는 것은 특별히 남자에게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여자에게 아론의 자손이란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천한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누가복음에서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여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산되지 못하였으며 남자의 소유와 같았고 남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복에 참여하였습니다. 즉 여자들은 비천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하게 언급되며 어떤 기사에서는 여자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탄생에서 엘리사벳이 중요하게 언급되며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도 요셉과 달리 마리아가 중심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탄생을 봄으로 구원을 본 여선지 안나,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등장하는 사렙다 과부, 나인 성의 과부, 안식일에 고침 받은 아브라함의 딸로 언급되는 여자(누구누구의 자손처럼 여자들이 아브라함의 딸로 언급되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유일함), 불의한 재판관에 호소하는 과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사역에 동참한 갈릴리 여인들, 예수의 제자의 모습으로 언급되는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한 여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본래 비천한 여인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위로를 받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부는 6절에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의 개념은 여기 본문 자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도덕적으로 무흠한 사람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자들입니다. 곧 주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언약에 신실히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의 한가지 특징 중의 하나는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 세례요한의 부모도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 의인이며, 예수의 부모도 주의 율법을 좇아 행하는 의인처럼 묘사되며 예루살렘에서 아기 예수를 봄으로 주의 구원을 본 시므온도 의롭고 경건한 자로 설명되며 안나 선지자도 성전에서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의인으로 묘사되며 예수를 매장한 요셉도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하여도 의인으로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율법의 규례를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빌라도는 예수의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이룸에 참여하는 것은 구약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미 남은 자의 구원을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구약 여기 저기서는 의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의롭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방의 지배 아래 있었고 악한 자들의 핍박과 탈취로 인하여 가난하였으며 궁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을 보게 하시며 참다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성취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7절에서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함으로 그들은 무자하였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자녀가 없으면 허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허물이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왜 자식이 없으며 또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도 잠간 언급한 것처럼 이방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의인들의 보편적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의의 백성으로 살았어도 가난하였으며 이방의 지배 아래 있으며 비천하였습니다. 마치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의인들의 고난처럼 말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의인임에도 자식이 없음을 말함으로 이전에 가난하고 비천한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기쁨의 소식이 임하는 것을 말하면서 의인들의 소망과 위로가 완성되는 것을 이 두 부부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의 아내 라헬과 사무엘에서의 엘가나의 아내 한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녀가 없는 것은 수치이며 부끄러움입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통하여 조상들의 복과 약속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단순히 자식 없는 그들을 위로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리우는 가리움은 온 이스라엘을 위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로부터 출생하는 자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백성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그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자한 그들에게서 출생한 아들을 통하여 구약의 의인들의 수치를 가리우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예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출생되었을 때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말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ㅆ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이 조상들의 약속을 기억하사 원수의 손 곧 이방의 손에서 구원하사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긍휼와 위로의 구원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기 아들의 출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비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의 출생을 통하여 예고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의인들의 수치를 돌아 보시고 자기 백성의 부끄러움을 돌아보시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출생의 예언에서 마리아가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라로다”하는 말씀처럼 예수는 비천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친히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든 자를 살렸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의 해가 성취되었고 임하였음을 선언하고 가르치시며 전하였습니다.
이방의 권세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의 비천함을 돌아보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이 다윗의 위에 앉아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질 예수 그리스도로의 선언과 가르침과 사역과 전파 안에서 성취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 온전한 성취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으며 구약의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것처럼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은 것은 영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성소의 제사에서 제물의 죽음을 통하여 성소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은 곧 승천입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으로 성소에 드려지는 것처럼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받으신 것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영원 무궁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 왕은 죽음으로 끝난 왕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썩음을 당치 아니하시고 하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는 그 권세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보내어 능력을 입히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에 의인들에게 약속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가 이루신 긍휼과 자비와 위로의 구원은 이것인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하늘의 권능을 입히는 성령을 선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최종적인 위로의 선물이며 구원입니다. 이 성령의 권능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권능이어서 세상 권세의 나라가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기며 흥왕하는 권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방 백성들이어서 하나님의 긍휼의 약속도 소망도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의인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비천한 자들 보다 더 비천한 백성이었고 가난한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도 입힘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와 자비의 은혜에 참여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위로와 구원 안에 담대히 서야 겠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가난하고 비천합니다. 우리에게 자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소위 세상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처럼 훌륭하게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이제 우리가 부요하게 되고 자녀가 번성하고 우리의 질병이 치료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위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구원을 이미 받은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권능, 하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인 성령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늘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가난하고 자녀가 번성하지 못한다고 낙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끄러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구약 때는 가난하면 자녀가 없으면 질병이 있으면 그건 수치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능력을 우리에게 덧 입힘으로 우리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담대히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백성으로 제사장과 선지자의 백성으로 굳게 서야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광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에 부요함을 증거 해야 겠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의 백성이 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구약의 의인들은 위로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의인은 위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루어진 위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아직도 먹고마심으로 죄 가운데서 비천함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시켜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의인들의 사명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동참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가랴 당시처럼 예수님 당시처럼 제자들 당시처럼 지금도 세상 왕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다윗의 위에 앉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는 무궁하고 영원하며 어떤 세상의 권세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제자들의 복음 사역에서 그 증거를 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주의 복음을 증거 해야 겠습니다. 담대히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지키고 전파해야 합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을 힘입어 우리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의 권세로 이 일을 감당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우리 주 예수처럼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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