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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바리라이프 2008. 9. 2. 21:58

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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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기본 정보
본명 정현철(鄭鉉哲)
출생 1972년 2월 21일
대한민국
장르 댄스, 갱스터 랩
얼터너티브 록, 록 발라드
뉴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네이쳐 파운드
활동 시기 1989년[1] ~ 1996년
1998년 ~ 현재
관련 활동 시나위
서태지와 아이들
웹사이트 http://www.seotaiji.com/

서태지(1972년 2월 21일~ )는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가이다. 본명은 정현철(鄭鉉哲)이다.[2]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면서 현재의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시나위 시절과 달리 댄스 음악을 들고나온 서태지는 데뷔 초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17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 발매한 4장의 앨범 각각이 엄청난 인기와 화제를 몰고 왔다. 1996년 돌연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와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는 1998년에 미국 체류중인 상태로 첫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으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서태지 본연의 음악적 토대인 록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서태지는 일명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에 가져온 문화적 충격은 물론, 그것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대한민국에 힙합, 뉴 메탈 등의 장르를 소개한 대표적 아티스트 중 하나이며,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 폐지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8집(네 번째 솔로 앨범) 앨범 《Atomos》의 첫 번째 싱글인 〈Atomos Part Moai〉를 발표하고 활동을 진행중이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어린 시절

1972년 2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대동중학교 2학년 때인 1986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에 심취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가출을 자주 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교 537명 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된다.

이듬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한다.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 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채 하기전에 해체가 되고, 이후 그는 신중현이 운영하는 카페인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을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당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웃된다.[3]

[편집] 시나위 (1989 ~ 1990)

시나위 (밴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세 때인 1989년 시나위에 합류한 서태지는 베이시스트로 활약한다. 당시 시나위의 보컬김종서였다.

당시 시나위는 최고의 밴드로 이름이 널리 퍼졌지만, 방송 출연은 1년에 한두번이 고작일 정도로 음악의 길은 험난했다. 또한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대립 등으로 인해 네 번째 앨범 《Four》의 활동을 끝으로 시나위는 잠정 해체되고, 서태지도 스스로의 길을 모색한다.

[편집]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몰이 (1991 ~ 1996)

서태지와 아이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나위의 해체 이후 서태지는 당시 대한민국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미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때의 미디 작업으로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 등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 수록될 곡들의 일부가 만들어진다.[4]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1년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다. 1992년 4월에는 1집인 《Yo! Taiji》를 발표한다. MBC의 특종 TV연예에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를 모두 석권하였다. 가요 역사상 유일하게 음반 수록곡 전곡이 가요차트 50위안에 들었다.

또한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다. 이와 더불어 데뷔 음반 《Yo! Taiji》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음악, 대중 음악의 역사를 바꾼 음반, 한국에 진정한 댄스음악을 등장시킨 음반 등 엄청난 많은 평을 들었다.[3]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첫 활동곡으로 〈하여가〉를 발표해서 국내 최초로 200만장 이상 판매 기록했으며 다시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각종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하여가〉의 힙합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비트 빠른 멜로디는 2000년대테크노 열풍에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5] [3]

2집 발표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3집 앨범 제작을 위해 몇 달간의 공백기를 가진다. 그러던 1994년 8월 3집 앨범을 발표하며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한다. 3집에서는 기존의 댄스 음악의 비중이 아예 사라지고 의 비중이 늘어났다. 댄스 음악에 열광했던 일부 팬들은 실망하기도 하였으나, 〈교실 이데아〉 등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3집 때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둘러싼 각종 괴소문들이 횡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탄설'이다. 이는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괴소문 PC 통신을 통해 전국에 퍼졌고, 언론에까지 보도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외에도 동성애자설, 임신설 등이 퍼졌다. 이러한 괴소문들은 MBC 뉴스데스크, KBS 추적 60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교실 이데아〉를 직접 돌려틀어 사실무근임을 밝혀내면서 잠잠해졌다.[6] 공중파의 메인 뉴스 방송에서 특정 연예인에 대한 괴소문을 직접 파고든 일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교실 이데아 소동)

또한 3집에는 기존 앨범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기존의 앨범은 상업적 색채가 강한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데 반해, 3집 앨범에는 통일, 교육 현실, 마약 문제 등 그동안 민중가요 등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이 대거 등장하였다. 특히 뉴 메탈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교실 이데아〉는 교육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으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당시 기성세대로부터는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런 사회적인 색채의 음악과 그에 대한 당시 10대 팬 들의 반응 이후 '서태지 담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는 등[7]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시도한 음악적 변화 자체는 큰 대중적 주목을 끌지 못했다.[6] 하지만 훗날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가 재평가 되면서 3집 수록곡인 〈발해를 꿈꾸며〉가 고등학교 7차교육과정의 '음악과생활'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3집은 13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대한민국 100대 명반[8]에 선정되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 때마다 수십 회 이상의 TV 출연을 하면서도 꾸준히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1992년, 1994년, 1995년에 각각 1, 2, 3집 활동에 해당하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였다. 또한 1993년, 1994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앨범을 발매하였다.

[편집] 갑작스러운 은퇴 (1995 ~ 1996)

훗날 서태지는 4집 발표 전에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1~3집 활동 기간동안 큰 인기를 누린 그들이지만, 너무나 바쁜 일정, 시간에 쫓겨 앨범을 만드는 데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다.[4]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에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갱스터 랩은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장르로, 기존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4집 음반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0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세 번째 더블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앨범 발매 때마다 그러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휩쓸었고, 〈컴백홈〉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또한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그들은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6] 2월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였다.

3달 여의 활동 끝에 그룹은 해체했지만 4집의 여파는 해체 이후에도 남았다.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서 가사를 지적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곡을 가사가 삭제된 상태에서 그대로 4집에 수록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으며, 정태춘 씨의 심의 철폐 운동과 시너지를 일으켜 현재 공윤의 사전심의 철폐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된다.[9] 실제로 공연윤리위원회는 1996년 6월 7일에 폐지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7월 10일에 〈시대유감〉 싱글 앨범이 발표되어 가사가 삭제되지 않은 원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4]

[편집] 미국 체류와 첫 솔로 앨범 (1997 ~ 1999)

2년 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998년 7월 7일 첫 번째 솔로 앨범을 갑자기 발표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1년의 휴식 끝에 음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할 당시 연예인으로는 은퇴한 서태지가 음악가로서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4]

이 앨범은 아무런 제목도 없이 서태지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으며, 수록된 6곡의 노래 모두 특정한 제목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앨범으로, 보라색 케이스에 담겨 발매되었다.

팬들은 이 앨범을 솔로 1집으로 부르지 않고 '5집'으로 부른다. 5집 앨범은 은퇴 번복과 짧은 러닝타임 문제로 인한 논란에 휩싸여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태지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된다. 서태지의 팬들은 해외의 평론가들에게 5집에 대한 평가를 의뢰하여, 서태지의 5집 음반은 '록 익스트림'등 음악 평론 사이트에서 호평을 얻는다. 반면 서태지의 반대자들은 28분짜리 EP 수준의 음반을 정규 음반의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서태지는 자신의 메시지를 담긴 몇 줄의 이메일과 컴퓨터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발표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앨범은 100만 이상의 판매를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둔다.

[편집] 본격적 복귀와 ETPfest (2000 ~ 2003)

ETPFEST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은퇴 선언 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11일에 서태지가 인터넷을 통해 컴백을 알렸고 2000년 8월 29일, 김포공항을 통하여 미국에서 귀국하여 통산 6집을 발매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김포공항은 수천여 명의 팬들과 수백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되었으며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 메탈을 시도한 음악들은 많은 화제가 되었다. 서태지가 컴백 직후 가진 콘서트인 20000909 서태지 컴백콘서트는 추석특집으로 문화방송에 방송되었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요일에 재방송까지 하였다. [6]2001년 서머 소닉에 참여한 후, 한국에서도 대규모 록페스티벌인 ETPFEST (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 이티피페스트)라는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가 111만장을 기록하면서 통산 앨범판매량은 1천만장을 넘겼다.

[편집] 7th Issue (2004 ~ 2007)

2004년 1월 사회적인 메세지 등을 담은 7집 음반 《Seotaiji 7th Issue》를 발표하였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최다음반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2004년 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을 개최하였다. 〈Watchout〉 과 《Seotaiji Live Tour Zero》를 발매한 후 다시 다음 음반을 작업하기 위해 인도로 출국하였다.

2007년 말에는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을 한정 발매하였다.

[편집] Atomos (2008년 현재)

2008년 7월 초 코엑스 상공에서의 UFO 동영상, 충청남도 보령에서의 미스터리 서클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서태지가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8집에 대한 윤곽이 잡혀지기 시작했으며 서태지는 서태지닷컴을 통해 글을 남겨 8집 발매를 앞뒀음을 암시했으며 코엑스에서의 UFO 구조물을 설치하여 더욱 더 기대감을 모았다. 또한 서태지닷컴을 비롯한 문화방송의 〈쇼 음악중심〉에선 매주마다 서태지의 티저영상을 방송하였다.

2008년 7월 29일, 서태지는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인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하였다. 발매와 거의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워 추가로 5만장을 추가 제작하였다고 밝혔다.[10]

7월 29일에는 MBC 일산 드림센터에서 MBC에서 방영될 컴백스페셜을 위한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8월 1일에는 코엑스에서 '게릴라 콘서트'[11]를 열었다. 이후 8월 6일,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스페셜 -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첫 번째 싱글 곡인 〈Moai〉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본격적인 8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태지는 이번 앨범를 네이처 파운드(Nature Pound)라는 신조어를 이용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이 같은 장르를 만들었다 자연을 심장처럼 두드린다는 표현이라며 ‘쪼개다’‘부수다’라는 어감도 좋고 그래서 ‘네이처 파운드’라는 이름을 지어 봤다고 했다.

8월 14, 15일에는 마릴린 맨슨, 디 유즈드, 드래곤 애쉬 등이 참여한 2008년 ETPFEST를 개최하였다.[12] 9월 27일에는 톨가 가쉬프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13]

이후 서태지는 조만간 8집의 두 번째 싱글을 발표하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정규 앨범을 출시할 예정이다.

[편집] 영향

[편집]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의 등장

1990년대의 대중가요계는 현철, 주현미, 태진아를 중심으로한 트로트신승훈, 박정운등을 중심으로 한 발라드가 그 중심에 있었고, 댄스음악은 이미 하락세를 거듭했다. 그리고 여전히 10대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원했고 1992년 2월 뉴키즈 온더 블록 방한 소동에서 일부나마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이 공연을 보기위해 2만여 명의 여학생이 공연장을 찾았는데, 열광을 넘어선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초유의 광란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공연 시작 20여 분 만에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이 와중에 200여 명이 넘어지고 그로인해 100여 명이 부상, 그리고 1명의 여고생이 사망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그동안 풀곳이 없어서 쌓여왔던 사회의 소외계층이었던 10대들의 욕구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단 한 번의 공연이라는 너무나 작은 기회 속에서 폭발된 결과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편집]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1980년대 초반 미국의 MTV가 개국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에 비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가라오케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서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더이상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14]

[편집]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가요계에서 기획사 시스템은 가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서태지 역시 데뷔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입을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당시 유대영이라는 기획자를 만나 앨범을 만들고, 방송에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기획사는 당연히 서태지를 재능있는 음악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팔릴 것 같은 상품으로 봤고, 이에따라 최 단시간 많은 이윤을 내기위해 하루에도 3~4차례씩 방송무대에 오르길 강요했으며, 이로인해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등 기본적인 건강관리 및, 가장 중요한 음악적 연구에 대한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어찌보면 가요계의 시스템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서태지는 이 악습을 끊어냈다. 데뷔 후 3개월이 지나서 서태지는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쥴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 후 요요기획을 설립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한 가요계의 변동으로 인해, 상품성이 보장된 서태지와 같은 그룹들을 만들어 파는 기획사가 난립하게 되었고 덕분에 서태지처럼 뜰 수 있다는 그들의 조건 때문에 오히려, 기획사의 노예같은 그룹들이 지금까지도 생겨나게 된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출처 필요]

[편집] 저작권,초상권 개념의 확립

1990년대 초 까지 저작권, 초상권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첫 저작권 분쟁[출처 필요]으로 기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한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상태였다. 이로인해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이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이들을 고소하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서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나갔다.

[편집] 발표 음반

이 부분의 본문은 서태지의 음반들입니다.

지금까지 서태지는 시나위로 1장, 서태지와 아이들로 4장, 솔로 활동으로 3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였다[15]. 발표하는 앨범마다 한국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해외의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들이었던 랩(Rap), 갱스터 랩(Gangster Rap), 뉴 메탈(Nu Metal), 랩 메탈(Rap Metal) 등을 선보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헤비 메탈 음악에 대한 꾸준한 사랑으로 커다란 대중적, 음악적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통일 문제, 교육제도, 청소년 가출, 사전심의제도, 음악산업, 낙태 문제 등을 다룬 사회적인 가사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정규 앨범 외에도 다수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서태지는 2008년 8월 중순, 4번째 솔로앨범이자 통산 8번째 정규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며, 이에 앞서 싱글 앨범을 발매하였다.

[편집] 기타

[편집] 예명

  • 서태지 인터뷰 중에 예명 내용을 발췌한 전문이다.
이동연 : 말 나온 김에 예명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 당신의 예명인 '서태지' 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추측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일본 그룹인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었고요. 성은 여러개를 붙여 봤는데, 그 중에서'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아무 뜻도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 유토피아를 꿈꾸며 內 대담 인터뷰 중
  • 원래 서태지의 한자 이름은 없으나, 중국어권에서는 徐太志(쉬타이즈)로 통용되고 있다.

[편집] 일명 "서태지 자퇴서"

일명 서태지의 자퇴서가 인터넷에 떠도는 것에 대해서 서태지는 실제 자신이 쓴 것이 아니고 자신이 쓴 것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것은 오보라고 밝혔다.[16]

[편집]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서태지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내가 본래 소심한 성격이기 때문에 TV 출연 등을 잘 하지 않는다. 다만 가수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음반 제작, 공연은 꾸준히 하는데 평소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 같다"[4]고 말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공식 웹사이트에 있는 역사에 따르면 서태지는 18세 때인 1989년에 시나위에 합류하였다.
  2. http://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28433
  3. 3.0 3.1 3.2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上, 《주간한국》, 2005년 1월 12일.
  4. 4.0 4.1 4.2 4.3 4.4 2008년 8월 6일 MBC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 스페셜 북공고 1학년 1반 25번’에서 밝힌 내용
  5. 대중음악 100대 명반 30위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Ⅱ’ 《경향신문》, 2007년 12월 6일
  6. 6.0 6.1 6.2 6.3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下, 《주간한국》, 2005년 1월 19일
  7.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별책부록, 1995.
  8. 공식 홈페이지의 3집 설명
  9. '동백아가씨'가 금지곡 된 진짜 이유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30일
  10. 서태지 8집 10만장 소진, 5만장 추가 제작 《뉴스엔》 2008년 7월 31일 보도
  11. 실제로는 일정이 미리 알려져 '필승' 때와 같은 게릴라 콘서트가 되지 못했다
  12. 돌아온 서태지,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OSEN 2008-08-04
  13. http://www.stjsymphony.com/symphony01.html
  14. [영상문화의 이해]영상문화의 이해 - 서태지와 뮤직비디오 2005년 4월
  15. 서태지 자신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부터 정규앨범을 계산하여 자신의 솔로 앨범은 5집, 6집 하는 식으로 부른다
  16. 서태지, 진실 혹은 거짓…5년여만에 루머에 대한 심경 고백 아시아 경제 200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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