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영 분별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이단의 정체

은바리라이프 2008. 8. 23. 23:49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이단의 정체

 

 

 

정병진(신약학/1학기)

 

 

 

 

 

1. 머리말

 

 

‘이단’(αἱρέσινς/heresy)이란, 본디 어떤 것을 선택하는 행위나 자기의견을 고집하는 분파, 또는 정통교회의 진리를 오류라고 거부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 정통신앙과 정통교리는 의로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바람직하고 선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단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정통이 되고자 했으나 교리나 신앙관습 등의 문제로 인해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예컨대 1세기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이단이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단자들인 기독교인을 심히 박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그 사이 기독교 내부에도 무수한 이단이 생겨났고, 정통교회 또한 과거 유대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단자들에 대한 과격한 대응을 자주 해왔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거짓교사/이단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경고에서도 그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두 서신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교회에 위협이 되었으며, 그 거짓 교사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침투한 이단자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하나의 전거로 삼을 것이다.

 

 

 

2.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들

 

 

서기 2세기 초반까지 교회는 일사불란한 에큐메니칼 조직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공통된 경전과 교리도 합의된 바 없었고, 심지어 개별 교회의 직분과 예전조차도 아직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물론 사도시대(Apostolic Age)에 처음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려 할례와 이방인 선교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적 있다. 당시만 해도 사도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직제자였으므로 교회 내부의 복음에 대한 악의적 왜곡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사도교부 시대에 들어서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교회는 로마제국 전역의 속주에서 크게 팽창하고 있었지만 연합과 일치의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낙인이 찍혀 사회적으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이단들이 틈입하여 교회에 혼란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초창기 성령운동의 열기가 차츰 사그라지고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무엇보다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다. 그나마 사도적 전승이 권위를 갖게 되었으나, 과연 어떠한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하는 ‘사도적 전승’임을 보증해 주는지는 식별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단들도 사도적 전승을 앞세우며 많은 저술을 남겼고 각급 교회에 침투하여 흡사 암세포마냥 해악을 끼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 이와 같이 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경고를 담고 있는 일종의 ‘투쟁서신’이다. 두 서신 모두 거짓 교사들의 암약과 공공연한 도전을 내외에 폭로하여 교회로 하여금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교훈하고 있다. 베드로후서는 유다서 내용을 표절하다시피 했으므로 이단에 대한 공격에서 두 서신은 거의 일치를 보인다. 베드로후서가 화급히 기록된 유다서의 거친 부분에 윤색을 가한 점 말고는 대체로 대동소이한 편이다.

 

두 서신의 저자는 일부 특정한 교회들만을 위하여 편지를 작성한 것 같진 않다. 그것은 수신자나 특정 지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거짓 교사들에 대한 공격도 다소 장황하면서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추측컨대 두 저자는 당시 광범위하게 번져가던 이단들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교인들에게 신앙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사도적 권위를 빌어 이런 서신을 유포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서신에 적힌 거짓 교사들에 관한 묘사를 굳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자들은 소아시아 여러 교회가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알고서 급박한 대응책을 제시할 정도로 교회의 중요한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표절관념이 없었다. 그래서 ‘기만의도 없는 공개 위명문서(僞名文書)’ 저술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예컨대 헬레니즘 유대교에서는 에녹, 아브라함, 솔로몬, 열두 족장의 이름으로 회람되는 후기 문서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서들의 저작권 논란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신약외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사도들의 이름을 붙인 복음서와 행전, 편지가 다수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조차 자신의 명의로 쓰인 위명 서신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살후 2:2). 하지만 그는 그 서신에 적힌 내용을 반대하면서도 명의도용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이것은 위명문서가 그 시대에 크게 문제되지 않은 저술방식이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언급된 거짓 교사/이단들의 행태와 그에 대한 비판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A. 유다서

① 불경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거리로 만들었음(4b).

②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부인(4c).

③ 육체를 더럽힘/음행(8a).

④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존재(천사?)를 모독(8b).

⑤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함,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음(10, 16).

⑥ 욕심대로 살면서 이익을 챙기고자 남에게 아첨함(11b, 16b).

⑦ 교회의 애찬 때에 마구 탐식하여 애찬을 망쳐 놓음(12a).

⑧ 분열을 일으키며 성령을 받지 않고 본능대로 살아감(19).

 

B. 베드로후서에서 수정/추가된 내용.

① 대낮에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2:13a).

② 연회를 즐길 때에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꾀하고 있음(2:13b).

③ 그들 눈에는 간음할 상대자들밖에 보이지 않으며 들뜬 영혼을 유혹(2:14).

④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신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있음(2:19)

⑤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3:3-4).

⑥ 바울이 보낸 편지를 잘못 해석하여 파멸 자초(3:16b).

 

C. 두 서신에서 거의 일치하는 내용

① 마지막 때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자기 욕정대로 산다.(유 18 / 벧후 3:3)

② 주님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출현(유 4 / 벧후 2:1)

③ 권위를 업신여기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임(유 7․8 / 벧후 2:10)

④ 이성 없는 짐승과 같아서 알지 못하는 일을 비방함(유 10 / 벧후 2:12)

⑤ 그들에게 캄캄한 어두움이 마련되어 있음(유 13 / 벧후 2:17)

⑥ 입으로 허풍을 떠는 자들임(유 16 / 벧후 2:18)

 

유다서는 ‘몇몇 사람(거짓 교사들)이 몰래 숨어들었다’(유 4)고 말한다. 베드로후서도 거짓 교사들이 ‘파멸로 몰고 갈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벧후 2:1b)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거짓 교사들은 지역출신 사람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들어온 ‘떠돌이 선교사’일 가능성이 많다. 신약외경인 디다케(기원후 80-110년)는 초기 교회에 존재했던 떠돌이 선교사들을 교회가 어떻게 접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디 11:3-12). 이 책은 자신이 영으로 말한다면서 교회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거나 주님의 생활 태도를 지니지 않는 자는 거짓 예언자이므로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이는 떠돌이 선교사들이 각급 교회에 끼치는 폐해가 그만큼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초기 교회의 떠돌이 선교사들이 특정 교회나 기관에 소속되어 행동에 제약을 받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여기저기 자유로이 옮겨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일찍이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선교모델이기도 했다. 하지만 떠돌이 선교사들 중에 어떤 자들은 소아시아의 다수 교회들에 우려할만한 악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두루 관장하는 대표기구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적절히 통제할 방법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거짓 교사들의 주된 문제점은 음행과 방종, 그리고 전통적 계명 및 규범에 대한 도전(케리그마에 대한 오해) 등으로 집약된다. 그들의 이러한 악행은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교인들을 타락시켜 급기야 파멸로 이끌어 갈 위험성이 농후했다. 바울이 편지한 고린도 교회에도 앞서 열거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행태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과 공격의 강도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가 훨씬 센 편이다. 이유인즉 사도 바울의 시대와는 교회가 처한 환경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카리스마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이단자들에게 관용을 베풀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거짓 교사들은 교인으로 자처하면서 교회 내부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는 거짓 교사들의 교묘한 꾐에 넘어가 경제적 후원자가 되거나 파당을 짓는 일마저 발생하였다.

 

두 서신의 기자는, 이 같은 상황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이단의 위협에서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자구책으로 각처의 교회를 향해 비상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3. 거짓 교사들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거짓교사’를 원시 영지주의 분파에 영향을 입은 자들로 파악해 왔다. 이를테면 로제는, 한분이신 통치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4절), 꿈과 계시에 심취되어(8절), 불만에 쌓여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4:11-12, 16, 18-19)등을 근거로 ‘분명히 영지주의자들이 문제시’되고 있다고 말한다. 페린도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전문용어(유 19 / psychikoi)나 이 세상과 육체에 대한 멸시, 재림 부정을 들어 거짓교사들이 영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런가하면 베드로후서가 바울의 편지를 잘못 해석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3:15-16)을 두고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종말론적 회의주의와 도덕적 방탕이야말로 영지주의와 공통점을 갖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마르시온(2세기)과 발렌티누스(서기 140년경)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한때 신실한 교회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주었다. 특히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도덕적 교훈과 신조를 받아들이고 감독의 권위에도 복종하라고 했다. 초심자에게는 도덕과 교회 조직 및 성경에 대한 합의된 의견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비밀 입문에 통과한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어 영지(gnosis)를 얻게 되면 교회의 모든 요구에서 예외적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발렌티누스는 전통 교인처럼 생활하면서 30년 동안 교회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허락지 않은 비밀회합을 계속 열면서 터툴리안이나 이레니우스 같은 교부들의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터툴리안은, 발렌티누스파와 같이 교회를 잠식하는 이단들의 가공할 위협에 대처하고자 『반이단론』이란 책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이단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는 견해를 펼치면서 ‘아덴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진다. 발렌티누스의 사례처럼 서기 2세기 중반 영지주의 운동은 이미 교회 내부에 깊숙이 스며들어 교회를 뿌리째 점차 잠식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를 이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면 두 서신에 나오는 거짓교사를 영지주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로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보캠(Bauckham)은, 그의 주석에서 최근 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를 영지주의자로 보지 않는다고 소개한다. 폰베그(Fornberg)와 네이레이(Neyrey)가 유다서의 베드로후서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 그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베드로후서의 거짓 교사들은 진정한 영지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표지인 우주적 이원론에 대한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윤리적 방종과 종말론적 회의주의가 영지주의에 기초한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다. 셋째, 물질세계와 육체에 대한 경멸도, 구약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하는 내용도 찾아보기 어렵다(벧후 1:20-21). 유다서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거짓 교사들이 보인 행태가 바울의 전통 하에 쓰인 골로새서 저자의 견해와 가깝다는 시각이 있다(Heiligent-hal). 골로새서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골 2:16)라고 하였다. “아무도 겸손과 천사 숭배를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비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2:18)라는 주장도 한다. 따라서 거짓 교사들은, 골로새서 저자처럼 바울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전통 교회에서 당연시되던 천사 숭배나 권위, 음식법, 절기법 같은 것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다서 적대자들은 골로새서 저자와 근접하고, 유다서 저자는 골로새서 적대자와 견해가 근접해 있었다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유다서와 베드로후서가 유대교의 율법적인 의식을 따르라고 극구 요구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두 서신에 유대적 색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은 모두 디아스포라 및 헬라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헬라어 구사력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베드로후서에는 ‘덕(aretê)’에 대한 강조나 ‘신의 성품(Physis)에 참여’, ‘샛별(phosphorus)’의 언급에서 잘 나타나듯 그리스철학과 종교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마저 감지될 정도다.

 

그러면 거짓교사들은 누구였을까?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모호하게 뭉뚱그려진 ‘가상의 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분명히 교회가 여러 이단들의 도전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했으므로 두 서신과 완벽히 일치하는 이단의 실체를 찾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서신의 기자들 스스로가 불특정 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여기저기서 번져가고 있는 이단의 위협을 조심하라고 경고한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이리라.

 

실제로 베드로후서는 거짓교사에 대해 과거형(2:15, 22), 현재형(2:10,12이하, 20-21), 미래형(2:1 이하; 3:3) 등으로 포괄적인 경고를 하고 있다. 교회는 내부적인 느슨한 결속을 다지고자 어쩌면 일부로라도 희생양을 만들어내야 할 형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회에 이미 침투했거나 앞으로 언제든 침투하게 될지 모를 거짓교사들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이러한 서신을 적어 보냈을 수도 있다. 사실 다수의 기독교 문헌들은 정통과 이단의 적대 관계를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실제 상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새로운 종교운동은 그 형성기에 대개 지나칠 정도의 경직성을 보이곤 한다. 아직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고 사회적인 소수자라서 대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무엇이 아닌 지부터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말하자면 안팎의 경계를 나누는 울타리를 치는 작업이다. 이처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기자도 거짓 교사라는 가상의 적을 설정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교회가 이단자를 대하는 방식

 

지상의 어떤 교회도 처음 상태 그대로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조응하여 끊임없이 자기쇄신을 거듭해야 존립이 가능하다. ‘정통주의’라는 관념 자체도 역사적으로 계속 수정의 과정을 거쳐 왔다는데 대다수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 존재하는 순수성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모든 이단의 원천’이라고 보는 시각마저 있다. 유대교의 틀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그 사슬에서 풀려나자, 나중에는 유대교적 기독교를 이단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역설적 사례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법 자체가 얼마나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단자들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지키고자하는 노력이 하나같이 부질없고 허황되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들만이 절대 진리를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는 식의 외눈박이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야함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통과 이단으로 나뉜 불행한 종교적 갈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재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세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종교재판, 신구교간 벌인 30년 전쟁 등 몇몇 사례만 보더라도 그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독일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가장 순수한 진리라 해도 폭력으로 그것을 남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정신에 반(反)하는 죄악이 된다.”고 적었다. 칼뱅의 종교적 광기가 낳은 비극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칼뱅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죄목으로 세르베토 같은 ‘이단’ 신학자를 화형 시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래선지 그의 베드로후서 주석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이 사뭇 살벌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뒤엎으려 시도하기 때문에 모든 난폭한 훼방을 확고히 진압해야할 것이다.”

“사도는 “멸망케 할 이단”을 언급함으로써 무릇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가장 독성이 강한 역병과도 같은 이단을 피하게 한다.”

“그러므로 자진해서 자기 영혼의 구원을 거짓 선생들에게 싼 값으로 팔아넘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그 거짓 선생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일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오늘날에도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비슷한 종류의 미친 사람들이 있다.”

 

복음의 근본을 지키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곧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복음을 ‘보수’하는 일이고 ‘정통’이다.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망각하고 믿음을 강화할 때 기독교 신앙은 손쉽게 폭력과 광기로 돌변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한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 교회를 지키고자하는 나름의 선의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이단자들에 대해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라지만 이웃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은 것은 예수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싸우면서 닮는 법’이 아닌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떠올리더라도 상대방과 동일한 폭력적인 대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서를 정확무오하게 해석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모두가 부분적으로 이해하면서 부지런히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입장 차이에 대해 최대한 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실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이단자들이 나와야 교회는 비판을 통해 더욱 발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스며든 이단자들을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근래 ‘신천지’에 속한 이단들의 교회 침투로 한국교회가 여러모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신천지가 기존의 이단종파에 비해 더 큰 위협을 주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추수꾼’이라 부르는 자들을 교회에 은밀히 침투시켜 교인들을 시나브로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이들 추수꾼들 중에는 심지어 목사나 전도사, 혹은 교사 같은 교육 책임자들도 있다. 그래서 일정한 시기가 되면 본색을 드러내어 추종하는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거나 아예 출석하던 교회 자체를 신천지 교회로 탈바꿈시키는 대담한 수법마저 쓰고 있다. 기성교회는 이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최근에야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에 부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신천지에 속한 대부분의 교인들이 기성교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교인들에게 신앙의 바른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채 성장에만 골몰해온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과 교리적 논쟁을 아무리 해봐야 그것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나온 것처럼, 이단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한다고 해도 내부 단속용 이상의 큰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미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신중히 고려해야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으면서, 왜 이단에 빠지게 되었는지 원인을 살피고,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일 것이다. 파스칼은 “이단을 방지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그것을 논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 모두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리한 주장이지만, 여기에는 이단자들에 대한 교회의 관용과 사랑의 관심이 빠져있어 아쉽다. 본고는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든 교회가 변화하는 불완전한 과정에 놓여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를 강조하려다 보니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의 거짓교사에 대한 차이점을 미처 세심하게 살펴보진 못했다. 초기 교회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했으므로 내부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필요 때문에 이단에 대처할 때도 경직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서기 2세기경 교회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 규모가 커졌고 국가적인 박해도 사라져 자유로운 신앙을 보장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옛날처럼 이단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교회는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시각을 가진 자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구원의 심오한 진리를 재발견하도록 힘써 도와야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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