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혼란(창세기 11:1-4)
앞 장의 결말에는, 노아의 자손들로 말미암아 또는 노아의 자손들 사이에서, "홍수 후에 열국 백성이 땅에서 나뉘었다" 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는 곧 여러 부족이나 무리로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네들이 거주하여 왔던 곳이 그들에게는 이제 너무도 협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족이나 무리들을 자기들의 진로를 찾아야 했고, 바로 인접된 땅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다 멀리까지 나아갈 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수효의 증가로 인하여 거기에 필요한 만큼 서로 멀리 분산되어 이동하기에 이르렀다. 이 분산은 노아가 지시했거나 자기들끼리 합의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같이 하여 홍수 후 백년에, 즉 벨렉이 출생할 무렵에 그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손들은 먼 곳으로 분산하는 것이 싫은 듯이 보였다. 보다 더 즐겁고 안전한 것만을 생각하였다. 결국 서로간에 어울려 살기를 궁리해 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노아보다도 훨씬 더 현명한 듯이 생각하고 저희들 "열조의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자기를 지체하게" 되었다(수 18:3). 다음을 살펴보자.
Ⅰ. 서로 어울려 살려는 저들의 계획을 유리하게 만든 이 점이 있었다.
1. 그들 모두가 "구임이 하나였다" (1절)는 이 점이다. 홍수 이전에 어떤 다른 언어가 있었을지라도 이제는 아담의 언어와 똑같은 노아의 언어만이 홍수 중에와 후에 계속 보존되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서로간에 알아들을 수 있었을 동안에는, 서로 사랑하고 도와 줄 수도 있었고, 서로 헤어지기를 싫어하였을 것이다.
2. 그들이 정착하기에 편리하고 넓직한 곳을 발견한 점이다(2절) 즉 "시날 평지" 를 만났다. 그들의 수효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그들은 자기들이 능히 풍족히 거할 만한 곳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모든 인원을 수용할 만큼 광대한 평지, 그들 모두를 부지할 만큼 충분히 비옥한 평지를 발견한 것이다. 미래를 소중히 여겨야 할 시기에 현실 때문에 오는 유혹이 때로는 너무 강하여 미래에 대한 의무와 관심을 무시하게 되는 수가 있음을 명심하자.
Ⅱ. 그들을 서로 결속시켜, 한 지체로서 거주케 한 방법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평화로운 출발을 하여 저들의 경계선을 확장해 나가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요새화하려고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하늘과 싸움을 걸 결심을 한 자처럼 스스로 저들은 방어자세를 취하였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결정한 바는 "도성과 대를 쌓자" 는 것이었다. 옛 세상(4:17)과 이제 여기 새 세상에서 최초로 도성을 세운 자는 가장 훌륭한 인격과 평판을 소유한 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장막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살기 족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반역한 자들이 최초로 도성을 세웠다. 다음을 배우자.
1. 그들은 어떻게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서로를 조장하고 격려 하였는가? 그들이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자" (3절)라고 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자" (4절)라고 했다. 그들은 서로 열을 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담해졌다. 큰 일이란 그것을 맡은 자의 수효가 많고 의견이 서로 일치하며, 서로를 격려해 줄 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죄인들이 악한 일에 서로 조장하며 격려하듯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선한 일을 하도록 자극하는 일을 배워야겠다(시 22:1; 사 2:3, 5; 렘 50:5 참조).
2. 그들은 어떤 재료로 건축했는가? 그 지방은 평지였기 때문에 돌이나 진흙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로 인하여 저들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벽돌을 만들어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구하여 진흙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자기의 목적에 단호한 자들은 어떤 방편을 쓰는가? 만일 우리들도 이같이 감동을 받아 선한 일에 열중한다면, 우리들의 일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구실하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자기의 할 일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2) 인간의 건축과 하나님의 건축 사이에 그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울 때에는, 벽돌과 역청이 최선의 재료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에는 "청옥으로 그 기초까지도 쌓으시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미셨다(사 54:11, 12; 계 21:19).
3. 그네들의 건축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혹자는 생각하기를, 또 다른 홍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자위(自衛)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실로 이르시기를,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가 지시하시는 방주를 믿기보다는 자기들 자신이 세운 탑을 믿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그들의 안중에 두었다면, 그들은 평지보다는 산 위에 탑을 세우기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의 건축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1)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려 했으니, 이는 하나님께 또한 도전을 나타내는 것이며 적어도 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높은 신과 같다" 되고자 했든가, 그 신성함의 정도에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높이에 있어서라도 가능하면 그에게 가깝게 되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했고, 땅 위에서 기는 것을 경멸했고, 문이나 사다리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늘에 기어올라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2) 이로써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입에 오르내리거니와,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자기들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이 일을 꾸몄을 것이다. 후대에 아무런 기록도 못 남긴 채 죽기보다는 오히려 이 같은 교만과 야심과 우둔의 유적이라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명예와 명성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일반적으로 위대하고 이루기 어려운 일에 대한 이상한 열정을 불어넣으나, 때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악하고 반역적인 일을 경주하는 수도 있다는 점이다.
[2]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이루어진 명성을 흙 속에 파묻어 버린 것은 공의로우신 행위이다. 바벨탑을 세운 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리석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이루어 놓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역사 속에서도 바벨 탑 건축자들의 이름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필로 쥬데우스(Philo Judaeus)는 말하기를,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이름을 영원한 기념으로 벽돌 위에 새겼다" 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뜻에 조금도 도움이 못되었다.
(3) 그들의 분산을 막기 위하여 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막자" 했다. 요세푸스(Josephus)의 말과 같이, "그것은 '땅에 충만하라'(9:1)는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오,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으리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이 상호간에 이 거대한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단일 제국으로 뭉치기 위하여 이같은 도성과 탑을 짓고 그것으로써 그들 왕국의 수도와 자기들의 통일성을 중심이 되게 하려 했다. 야심에 가득찬 니므롯의 무리들이 이 가운데 함께 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는 어느 특정 부락을 지배하는 데 만족할 수가 없어서, 세계적인 군주국을 목표로 삼고,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의 공통 안전을 추구하여 뭉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을 한 집단으로 결속할 것을 책략하고, 그 모든 자들을 자기의 감시하에 두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의 뻔뻔한 오만불손을 보라. 이에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하나님께 대한 대담한 거역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희를 흩으리로다" 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흩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대답한다. 이같이 창조주께 대항하는 자는 화있으리라!
[2] 하나님과의 거만한 경쟁이다. 세계적 군주국이 되게 하시는 일은 만유의 주님이시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이것을 목표로 의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를 침범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른 자에게 양도하시지 아니할 것이다.
●여호와의 강림(창세기 11:5-9)
여기에는 바벨탑 건립자들의 계획을 취소케 만든 일과, 고집 센 인간들의 의지가 역전되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Ⅰ.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도성과 탑을 보시려고 강림하셨다" (5절). 진행 중에 있는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위의 말은 인간적 표현 방식을 따른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떤 장소에 가보고 나서 아는 것만큼 그것을 이미 분명하고 완전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다음을 고찰해 보자.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송 사건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그 사건을 조사해 보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에 대하여 취하시는 온갖 절차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당하고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히 듣지 아니하신 것은 아무것도 벌하시지 아니한다.
2. 이 건축을 맡고 있는 자들이 그처럼 자랑하고 있던 그 건축 사업까지도 감안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을 낮추는 행위라고 일컬어진다. 하니님께서는 이 낮고 천한 세상의 일들을 지극히 중요한 일로 보시려 만큼, 스스로를 낮추시기 때문이다(시 113:6).
3. 이는 "인간의 자손이 세운 탑" 이라 했으니, 다음 사실을 암시해 준다.
(1) 인간으로서의 위약함. 세상의 벌레와도 같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무시하여 여호와의 질투를 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인생들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2) 죄 많음과 위해 받기 쉬움 그들은 "아담" 의 자손들이었다(히브리어로는 그렇게 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저 아담 곧 죄 많고 불순종한 아담의 자손이었으니, 그들은 본질적으로 불순종의 자녀들이요 타락자의 자녀들인 것이다.
(3) 신앙 고백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들에게서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저 뻔뻔스러운 건축자들의 차이점을 말해준다. 그들은 분열을 지속시키고 영속화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웠던 것이다. 경건한 에벨은 이들 불경스러운 무리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우고, 따라서 이들의 영혼은 인간의 자녀들과의 은밀한 곳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도 가담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Ⅱ.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결의를 알아보자. 그는 단순한 구경군으로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위하여" (욥 40:11-14). 심판관으로서와 왕으로서 강림하시는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중단시키시기 전에, 그들의 하는 일이 선한 길을 걷도록 기다리신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여지를 얻게 하려 하심이다. 그들이 만일 스스로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염오했을 것이다. 그리했다면 그들의 좌절이 보다 큰 수치거리가 되어, 지나가는 자마다 저들을 보고 "세우기는 시작하였으나 끝맺니 못하였도다" 고 하는 조소는 듣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불후의 영예라고 스스로 약속하며 자기들의 손으로 이루려 했던 그 영광이 이제 영원한 치욕으로 변화되고 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대적자들이 저들의 불경한 계획을 대규모로 경영하고 저들의 기업이 오래도록 번창하게 되는 것을 묵인하시는 중에도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2. 그들이 많은 염려와 수고로써 그들의 건축을 어느 정도 진척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방법을 꺾고 그들을 분산시키기로 작정하셨다. 다음을 주목하자.
(1) 그러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깃들이 있다(6절). 하나님은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셨다.
[1] 저들은 하나이나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나. 저들이 만일 하나로 계속된다면, 많은 땅이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저들의 왕의 권력은 즉시 과대해지고, 사악하고 불경한 자들은 엄청나게 만연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세상에서 서로의 세력을 강하게 할 것이며, 또한 교회에 세력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손들이 합동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수의 남은 자들을 삼켜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포된다.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정책일 수는 있으나, 참된 교회의 절대무오한 징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그러나 바벨 탑 건축자들은 그 가정, 성품, 의견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처럼 이의 없이 단합하여 있지만, 오히려 시온을 세우는 자들은 공통적인 하나의 미리와 성령 가운데 뭉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오늘날과 같이 나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금도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2] 그들의 완골함을 생각하셨다. 즉 "이후로는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은 방해와 좌절에 부딪쳐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명령과 훈계로서 이들의 계획을 중단시키려 하였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른 방도를 취하신 것이다. 첫째로, 유의할 것은 죄악의 깊음과 죄인들의 고집성이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삼가지 아니한 이래로 성별되지 못한 그의 후손들은 역시 삼가지 못하고 반항하여 왔다. 둘째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은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율법으로 막을 수 없는 자들의 손을 묶는 데에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자" (7절). 이러한 기업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취하신 하나님의 방식에는 지혜와 긍휼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여 그들에게 이르신 말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이거나 성부 성자 성령에게 이른 말씀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서로 격려하며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자. ……자도성과 탑을 쌓자" 하였으며, 이제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자" 고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스스로 죄악을 선동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활동하셔서 보수(報讐)하실 것이다(사 59:17, 18). 다음을 살펴보자.
[1] 인간의 범죄함에 비례하여 벌하시지 아니하고, 그 형벌을 조절하심은 하나님께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의 죄값에 번개로 내려가서 순식간에 저들의 반역을 소멸하자" 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며, "땅이 열리게 하여 그 건축물을 삼켜 버리게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하늘에 올라오려는 자들을 속히 지옥으로 내려보내자" 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그저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을 흩어버리자" 고만 하신다. 그들은 죽어 마땅했다. 그러나 단지 멀리 추방될 뿐이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가 지극히 크시기 때문이었다. 형벌은 주로 장래의 상태를 위하여 보류해 두고 계신다. 이생에서 당하는 심판과 죄인에 대한 심판은 보류해 두고 있는 그 심판과 비교해 본다면 그들의 현재 일을 삼가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의 진행을 방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을 선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써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말이 달라짐으로써 서로 협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그들의 건축을 단념케 하는 일과(왜냐하면 그들이 상호간에 이해가 없으면 서로 도울 수도 없게 되겠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흩어지게 하는 두 가지 일에 지극히 합당한 방도가 되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때는 상호간에 만족을 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지극히 효과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한 자들의 계획을 깨드리고 좌절시키는데 효과적이며, 특히 저들의 정신을 나누거나(사 9:32) 또는 다윗이 기도하듯이 저들의 말을 나누이게 함으로써(시 55:9) 저들은 분열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Ⅲ. 인간의 뜻을 허사로 돌리고 좌절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8,9절).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이 실현되었는지 저들의 말이 실현되었는지 알게 하셨다(렘 44:9). 그들의 단일성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견고하셨다. 그 점에서 저들은 자기들 위에 계신 이에게 교만하게 행동하였으니, 그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음을 굳게 한 자가 번창하였던가? 세 가지 일이 성취되었다.
1. 그들의 언어가 혼잡케 되었다. 인간을 지으시고 말을 가르쳐 주시고 또한 그것으로써 그 마음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말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들 건축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금껏 쓰던 언어를 잊게 하시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이해하게 하시었으니, 그 언어는 저들 동일한 부족이나 가족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이 기는 했어도, 그 이외의 사람들과는 서로 통할 수 없었다.
(1) 이것은 위대한 기적이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과 혀에 행하신 능력에 대한 놀라운 증거요, 그가 강물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의 증거이다.
(2) 이것은 이들 건축자들에게 내리신 놀라운 심판이었다. 참교회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바 그 거룩하고 오랜 언어의 지식을 이처럼 빼앗김으로써 그들은 참된 교회와 서로 교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때문에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대부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3) 우리 모두가 오늘날까지도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언어의 다양성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그 모든 불편과 필요상 언어를 배워야 할 때 겪는 그 모든 수고와 괴로움은 바벨에서 우리 조상들이 반역한 까닭으로 받은 벌이다. 아니 오히려 말싸움과 상호간의 몰이해로 인한 저 불행한 논쟁이란 아마 이러한 언어의 혼란으로 인한 것이리라.
(4) 세계 통용어를 위해서 문자를 고안하고자 하는 모든 계획을 매우 바람직한 일처럼 생각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러한 시도는 허사로 돌아간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의도에 항거하여 싸우는 일인 것이며, 그 같은 의도로 인해서 오히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모든 나라의 언어는 나누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우리는 처음에 만국 공용어였던 히브리어를 상실한 것을 한탄할지도 모른다. 이 언어는 이 때로부터 히브리인들만의 범속한 언어가 되어, 바벨론 포로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며, 그 곳에서는 수리아 말을 대신 사용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6) 언어의 혼잡이 인간의 자손들을 나누이게 하고, 멀리 흩어버린 반면에, 사도들에게 주신 언어(방언)의 은사는(행 2:). 널리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고,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하게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롬 15:6).
2. 그들의 건축 사업을 중지되었다. 곧 "그들은 성 쌓기를 그쳤다." 언어의 혼잡으로 인한 결과였다. 언어의 혼란은 상호 협력을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이 떠나신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아마 저들이 의기 저상되어 더 이상 그 일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명심해 둘 것이 있다.
(1)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는 일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은 그 만두는 것이 지혜롭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바벨 건축자들의 방안과 계획을 헛되게 하고 실패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앉아 계시사, 그와 그의 기름 부은 자들을 대적하는 이 땅의 왕들의 계획을 조정하시며, 여호와를 대적할 지혜나 계획은 존재하지 않음을 저들이 고백하도록 만드신다(잠 21:30; 사 8:9, 10).
3. 건축자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다(8,9절). 그들은 자기들의 종족과 방언을 따라(10:5, 20, 31) 그들에게 배당된 여러 지방과 장소로 떼를 지어 떠났던 것이다. 이전에도 저들은 이 땅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 강권되기까지는 이 땅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바로 그 일이 그들에게 닥쳤다. 즉 반항의 행동을 통하여 애써 피하고자 했던 그 분열이다. 이로써 결국 저들은 분열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는 우리들이 간접적이면서도 죄악적인 방법을 써서 피하려고 애쓰는 바로 그 고난에 흔히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2)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었다. 모든 흩으시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가정이나 친지들이나 교회가 흩어진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3) 비록 그들은 가능한 한 서로의 유대를 공고히 하려 했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산시키고자 하시는 바를 인간이 한데 모을 수는 없는 법이다.
(4)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탑을 세우고자 하는 자들이 외람된 기획에 합작한 사건에 대하여 의롭게 보수하시었다. 치욕적인 분산은 죄악적인 단합에 대한 형벌에 불과한 것이다. 부정한 가운데서 한 형제였던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에게서 나뉘게 되었다(49:5, 9; 시 133:3-13).
(5) 그 곳에 주어진 이름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들을 치욕에 관한 영원한 비망록을 후세에 남겨놓았다. 곧 그 곳은 "바벨 곧 혼잡" 이라고 불리웠다. 위대한 이름을 목표로 삼는 자들이 흔히 "악명" 으로 끝나는 수가 있다.
(6) 이제 결국은 인간의 자녀들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 이후는 결코 두 번 다시 그들이 모두 한데 모이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인자(人子)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이게 하시는 바로 그 최후의 날까지는 결코 한데 모이지 아니할 것이다(마 25:31, 32).
●데라의 자손들(1)(창세기 11:10-26)
우리는 여기서 한 족보를 보게 된다. 그것은 끝이 없는 족보가 아니고 아브람에서 끝나는 족보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친구요, 더 내려가면 약속의 씨인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되며,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브람으로부터 헤아리게 된다(마 1:1 이하). 따라서 창세기 5장과 11장,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을 한데 묶어 놓으면,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세상 누구의 족보에서도 불가능한,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얻게 된다. 이 족보는 아브람에게서 시작되어 12근원에서부터 매우 멀리까지 이어지는 족보이다. 또 이 세 족보를 함께 묶으면, 첫 아담과 제 2 아담 사이를 지나는 10을 두 곱, 14를 세 곱한 가계와 자손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관련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는 아브람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인자(人子)이며, 여인의 씨라는 사실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본문의 계보에 들어 있는 자들은 그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아마도 성령께서는 아브람의 이야기에 이를 때까지는 그들을 간략히 언급케 하신 것 같다. 우리들은 우리들과 함께 현대에 살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모른 것처럼, 우리들보다 앞서 이 세상을 간 자들에 대하여는 그 아는 바가 얼마나 적으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동일한 장소에서도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자들에 대하여 역시 아는 바가 그 얼마나 적은가!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며, 하나님 홀로 이미 "지나간 것을 다시 찾으시게" 하자(전 3:15).
2. 저들의 수명의 점진적으로 감소됨을 눈여겨볼 수 있다. 셈이 600세까지 이르렀다고는 해도, 이는 홍수 전의 여러 족장들의 수명보다는 단명하였고, 그 다음 세 사람도 단명하여 500세에 다다르지도 못하였으며, 그 다음 세 사람은 300세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데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고 200년을 살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후로는 나이를 그리 많지 않게 되었고 모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하면 그 수명이 70이나 80이라고 헤아렸다. 사람이 이 땅 위에 충만하게 되기 시작했을 때, 인간의 수명도 짧아지기 시작했으니, 수명의 감소는 오히려 어떤 자연적인 쇠퇴보다는 현명한 섭리의 탓으로 돌려야 하겠다. 즉 선택받은 백성을 위하여 인간의 생애가 단축되는 것이다. 또 세월이 험악해졌기 때문에 나이가 얼마 되지 못하게 되고 "우리들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47:9). 히브리인이라고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에벨로부터인데, 홍수 이후에 출생한 자들 가운데서는 누구보다도 에벨이 가장 오래 장수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그만이 하나님의 길을 경건하고 엄격히 지킨 일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데라의 자손들(2)(창세기 11:27-32)
아브람의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이후부터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해서 유명해진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그가 살던 곳은 갈대아 우르였다. 이것은 그의 본향으로서, 우상 숭배를 하던 나라이며, 에벨의 자녀들도 거기에서 타락하였다. 은혜를 통하여 약속의 땅을 상속받는 자들은 무엇이 그들의 본향이었고, 그들의 죄와 타락상이 무엇이었으며, 자기들의 기초가 되었던 반석이 어떠한 것인가를 기억해야 마땅하다.
Ⅱ. 아브람의 친척들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아브람과 그들의 관계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1. 그이 아버지는 데라였다. 데라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다고 하는데(수 24:2). 홍수 사건의 이면에는 그처럼 일찍이 우상 숭배가 이 세상을 뿌리박고 있었으니, 선한 윤리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그 같은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나가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데라가 70세 때에 아브람과 나홀, 그리고 하란을 낳았다고는 하나(26절), (이는 아브람이 데라의 장자로 그가 나이 70세에 낳은 것같이 들리는데) 32절을 보면 데라가 205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도 행전 7장 4절(여기에는 아브람이 그의 부친이 죽었을 때 하란을 떠났다고 한다)과 창세기 12장 4절(여기에는, 그가 하란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불과 75세였다고 한다)과를 비교해 보면, 그가 출생한 것은 데라의 나이 130대 때였을 것이며, 아마도 그가 가장 연소한 자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바는 나중 난 자가 흔히 먼저되고, 먼저 난 자가 나중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2. 그의 형제들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있다.
(1) 나홀이 나오는데, 이삭과 야곱은 둘 다 자기들의 아내를 그의 가정에서 취하였다.
(2) 하란이 나온다. 그는 롯의 아버지였으며, 하란은 "그 아비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28절)고 한다. 자녀들이 그 부모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보증이 없음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죽음이란 연장자 순위로 나이든 자에게 먼저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그늘에는 아무 구별이 없는리라" (욥 10:22). 또한 그의 가정이 저 우상 숭배의 땅에서 다행스럽게 이동을 하기 전에,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자연상태(불신앙의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시에 죽음이 엄습하지 아니하도록, 그 자연 상태를 서둘러 떠나라는 충고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음을 기억하자.
3. 그의 아내는 사래였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그녀가 하란의 딸 이스가와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아브람 자신도 그녀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녀는 자기 아버지 딸이지 자기 어머니의 딸이 아니었다고 했다(20:12). 그녀는 아브람보다 10살이나 젊었다.
Ⅲ. 그가 하나님의 부름심에 순종하여, 그의 아버지 데라와 그의 조카 롯과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12장 1절 이하에서 더 살필 수 있다. 본 장에서는 그들이 하란 또는 카란(Charran) 지방에 머물게 된다. 이 곳은 우르와 가나안의 중간쯤에 있는 곳이다. 그 곳에서 데라가 묻힐 때까지 거하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그 노인이 나아가 많이 허약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단한 사람들이 하란에까지 이르기는 해도 가나안까지는 채 미치지 못하며,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로되 결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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