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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므롯-아이작 아시모프

은바리라이프 2008. 7. 17. 19:45

니므롯

아이작 아시모프
이민수 옮김

구스에 대한 이러한 혼동은 분명히 셈족인 민족들을 함 아래에 포함시키는 일을 낳는다.


창세기 10:8. [셈의] 구스에게서는 니므롯(Nimrod)이 났는데 그는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창세기 10:9. 그는 . . . 힘센 사냥꾼이었다. . .

창세기 10:10. 그의 나라는 시날(Shinar) 땅인 바벨(Babel)과 에렉(Erech)과 아깟(Accad)과 갈네(Calneh)에서 시작되었다.

창세기 10: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수르(Asshur)로 나와서 니느웨(Nineveh)와 르호봇(Rehoboth)과 갈라(Calah)를 세우고,

창세기 10:12.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Resen) . . .

니므롯(Nimrod)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이름들 중에서 시조가 아닌 것이 분명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므롯은 누구인가? 누구인지 알아내서 어떤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은 고대의 안개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인가?

그가 누구였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이는 이름이 거명된 모든 도시들이 그 곳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어딘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 게다가 “시날 땅(land of Shinar)”은 우리가 “수메리아”라고 부르는 곳에 대해 사용된 성서의 용어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창세기 10:10은 니므롯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중요한 왕이며, 그의 권력은 바벨(Babel), 에렉(Erech), 아깟(Accad), 갈네(Galneh)의 네 도시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갈네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지금은, 그것을 포함한 것이 오류로써, 그 단어는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 모두(all of them)”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라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현대어역판에서는 그 구절이 다음과 같다. “그의 나라는 바벨과 에렉과 아깟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모든 곳은 시날 땅에 있었다.”

남은 세 도시는 전혀 신비스럽지 않다. 에렉은 그 지역의 고대 비문에서 “우룩(Uruk)”이라 알려진 도시에 해당한다. 그 도시는 1850년대에 처음으로 발굴되었으며, 거대한 사원과 도서관을 비롯하여, 한때 광범위한 도시였음을 알려주는 모든 표시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최소한 기원전 3600년까지 거슬러갈 수 있다. 유프라테스 강의 고대 입구로부터 약 40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후 유프라테스 강이 다소 경로를 바꿨고, 그래서 이제 에렉의 잔해는 강의 현재 경로에서 몇 마일 동쪽에 위치해 있다.

신화 상의 길가메쉬(40쪽 참조)는 이 도시의 왕이었고, 이 도시도 또한 역사적인 정복자의 지배를 받았다. 그것은 에렉의 왕인 루갈자게씨(Lugal Zaggisi)로, 기원전 2300년 바로 후에 지배했다. 그는 다른 수메르 도시국가들도 정복했으며 티그리스-유프라테스에서 상당한 크기의 제국을 다스린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지중해에까지 달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창세기 10:10에 언급된 도시들 중 두 번째인 아깟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복자 덕택에 일시적이었다.

아깟, 혹은 아카드(Akkad)는 고대 비문에서의, 아가드(Agade)이다. 그것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역시 유프라테스 위, 에렉으로부터 약 140 마일 상류였을 것이다. 그 도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상류 지역에 그 이름을 주었고, 그래서 그곳이 아카드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 상류 지역에 거주했던 아카드인들은, 비록 수메르의 문화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수메르인들과는 같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카드인들은 셈어족 언어를 사용했고, 반면에 수메르 언어는 셈어족이 아니었다(그리고, 사실은, 언어학적 관계가 알려져 있지 않다).

아카드인들은 처음에는 수메르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기원전 2280년 무렵, 사르루킨(Sharrukin, 아카드말로 "정당한 왕(righteous king)")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잡았고 도시 아가드에 수도를 건설하였다.1) 그 왕이 우리에게 아가드의 사르곤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2264년 무렵, 그는 루갈자게씨를 격파하고 아카드 제국을 세웠다. 사르곤의 손자, 나람씬(Naram-Sin)은 그 제국을 보다 확장시켰고 기원전 2180년 무렵에는 정점에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2150년 무렵, 나람씬의 죽음 바로 직후, 동부 산들로부터 야만인들이 침략해왔고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역을 정복해서 아카드 제국에 종말을 가져왔다. 야만인의 지배를 받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수메르인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했고, 기원전 약 2000년 무렵, 마지막 기간의 권력을 경험했다. 그 후, 창세기 10:10에 언급된 나머지 도시들이 나온다.

바벨의 도시는 아가드로부터 약 40 마일 하류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수메리아 도시국가가 여전히 보다 하류에서 번영하고 아카드 제국이 흥했다가 몰락하는 동안 천 년에 걸쳐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위치로써 존재했다.

하지만, 수메르인들이 최후의 영광의 시기에 있던 동안, 중부 유프라테스에서 온 다른 민족들의 집단인 아모리족(Amorites)이 기원전 1900년 무렵에 바벨의 지배권을 획득했고, 그곳을 확장하는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약 1700년에 통치했던 아모리 왕조의 여섯 번째 왕, 함무라비(Hammurabi)의 치하에서 바벨은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고, 빈번하게 정복당하고 수탈당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이천 년 동안 계속해서 그러하였다. 사실, 그곳은 구약의 시대 전반에 걸쳐 동방의 매혹적인 도시였으며, 그 이름은 그리스식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바빌론(Babylon)이 그것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전 지역은 그 도시의 이름을 따서 흔히, 바빌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모리인의 지배 하에서, 수메르인들은 마침내 꺾였고, 비록 그 문화는 계속되는 정복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정교화 되었지만, 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빠르게 몰락했다. 의사소통을 위한 현용 매체로써의 그 언어는 사라졌지만, 종교적 예식의 부분으로써 (현대 가톨릭교회에서의 라틴어처럼) 약 1500년 동안 살아남았으며, 기원전 300년이 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모리인들은 함무라비의 영광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1670년 무렵, 카시트인 즉 코스인이 동쪽으로부터 바빌로니아를 침략했고 거의 500년 동안이나 지속된 “암흑기(dark age)”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남부 바빌로니아가 그늘지게 되었고, 그래서 강 계곡의 훨씬 북쪽 지역들에 위치한 도시들은 두드러질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창세기 10:10이 남부 바빌로니아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10:11의 구절은 북쪽을 향한다.

흠정역판은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수르로 나와서”라는 말로 그 구절을 시작한다. 지금은 이것이 히브리어를 잘못 번역한 것임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어역판은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니므롯]는 그 땅에서 앗수르로 밀고 나가서”

앗수르는 티그리스 강의 상류 경로를 따라 위치한 지역으로, 지금은 북부 이라크이다. 앗수르(혹은 아수르) 마을이 그 지역에 이름을 제공했으며, 바빌론의 북쪽으로 약 230 마일 떨어진 티그리스강가에 위치해 있고, 기원전 2700년만큼이나 일찍 (아마도 수메르인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앗수르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앗시리아가 그것이다.

앗시리아는 아카드 제국의 일부였고 나중에는 아모리 제국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 지역의 앗시리아 거주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엄청난 번영의 시기를 구가하였다. 그 지역의 수도는 아수르에서 티그리스강가의 훨씬 상류에 위치한 도시들로 옮겨졌는데, 처음에는 갈라, 마지막에는 니느웨였다. (10:12에서 두 도시들 사이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레센(Resen) 마을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갈네”와 같은 단어는 전혀 마을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앗시리아 역사의 전환점은 기원전 1250년 무렵, 샬만에쎄르 1세(Shalmaneser I)가 통치할 때 왔을 것이다. 그는 갈라를 세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금속 제련이 이미 발달되었던 소아시아로부터 그 기술이 앗시리아로 도입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면, 그 군대는 청동 무기만으로 무장한 군대에 대해 엄청나게 유리해진다. 철은 청동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어질 수 있으며 철의 날은 더 날카롭고 잘 무뎌지지 않았다. 샬만에쎄르의 아들, 투쿨티니누르타(Tukulti-Ninurta) 1세는 그의 철로 무장한 전사들을 사용하여 스스로 최초의 앗시리아의 정복 군주가 되었다.

이따금 후퇴를 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는 점점 더 강해져서, 카시트인들을 대체하고, 바빌로니아 전역에 걸쳐 그 지배권을 확립시켰으며, 그 이상으로 뻗어져 나갔다. 창세 전설이 글로 쓰여질 시대쯤에는, 앗시리아가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따라서 10:8에서 12의 구절은, 수메르 도시국가 기간으로부터, 아카드 제국을 거쳐, 아모리 제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앗시리아 제국에 이르는, 2500년 동안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지역 역사의 짧은 개요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기나긴 역사 속 어디에서 니므롯을 찾을 수 있을까?

그와 관련 있는 성서 구절은 루갈자게씨, 아가드의 사르곤, 함무라비, 샬만에쎄르 1세(그리고 심지어는 길가메쉬)의 업적을 끼워 넣은 것이며, 그를 단일한 사람으로 한 것은 수메르인들, 아카드인들, 아모리인들, 앗시리아인들의 위대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성서의 작가들에게는 앗시리아가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제국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이었고 가장 위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영광은 과거에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앗시리아 최초의 정복 왕은 앗시리아를 강건하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전 왕국들의 모든 업적들에 대해서도 역시 공로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이는 다소 와전된 미국 초기 역사를 전해 들었지만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어린아이가 다음과 같이 쓰는 격이다. “죠지 워싱턴은 메이 플라워(May 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을 발견하고, 멕시코를 정복했으며, 워싱턴 D.C.를 세우고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주목할만한 첫 번째 앗시리아 정복자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투쿨티니누르타 1세였다.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니누스(Ninus)가 원래 그를 바탕으로 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니누르타”에서 몇 글자가 빠지고,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에 거의 변함없이 사용하는 마지막 -s를 넣으면, “니누스”가 된다.) 그리스 전설에서, 니누스는 혼자 힘으로 니느웨를 세우고, 바빌로니아와 아르메니아(우라르트) 전체는 물론 동쪽의 유목민 지역을 정복하여 앗시리아 제국을 세운다.

유사한 방식으로, 창세기 편집자들에게 “니누르타”가 “니므롯”이 되었다는 것도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사실, 성서 구절에 있는 몇 안 되는, 니므롯에 관한 짧은 서술은 특히 앗시리아의 군주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앗시리아 예술은 강력하고 잔인하며, 즐겨 그리는 대상 중 하나가 큰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 앗시리아의 왕들의 모습이었다. 사냥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아하는 일이었으며 그들 군주들의 잘 선전된 오락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니므롯을 “힘센 사냥꾼(mighty hunter)”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앗시리아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지배적인 세력으로서 카시트인(구스)을 계승했고, 따라서 니므롯을 구스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1) 아카드어로는 '샤르케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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