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정점을 위한 보충: 삼국유사 욱이 설화와 영화 가을로
고대는 금이요 중세는 은 근대는 동이고 현대는 흙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고고학적 발견을 거듭해가면, 소나기의 먼 산처럼 가도가도 끝없는 높이에 아무런 의도 없이 그리 주장할 만 하다. 그러나 고대는, 초상화와 초상집이 인접하는 것처럼, 성경의 단독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문화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네 흙냄새 나는 초상집과는 또한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작품적 생애적 시도가 성경을 향해서 거듭 있었다는 뜻이다. 종의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아이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흐름에 대한 지독한 기록이다. 어린 학생들인데도 우리는 먼산 불구경처럼 그것의 생각 없는 아우라에 동참했던 적이 있다. 따라서 고대가 금이다는 말은 매우 특수한 상상을 필요로 하는데, 공자와 플라톤의 책은 우리 서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도 건축과 보물들은, 특히 고대의 것은, 관리들의 관리 대상이 되는 것에서 요소 상호간의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는 거의 모든 것의 똥인 상태에서, 개별 영혼 잠깐 동안의 빛과, 진시황과 바로왕의 억지 여드름 격인 정신 현상이 그 시대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등대와 나란히 있는데, 등대의 빛이 그렇게 어려운 높이이며 결국엔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왕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육체의 영어 상태를 기록한 것이다.
영화는 김지수의 영혼을 탐방하면, 뜻하지 않는, 매우 새로운 풍경을 얻어낼 수 있다. 김지수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자동차가 부드럽게 시골 집 바로 앞에서 파킹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평화와 평등에 대한 소망의 극치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말할 수 없고, 피해 없이 그리 주차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두꺼운 사회 이념책을 한번 시도하다가 예쁜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렇게 중화-형상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그래서 형상의 도움이 없으면 진행할 수 없으며, 사고가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 이유도 그와 꼭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다. 초자아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것은 집단의 흐름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화는 일반의 계단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 된다. 택시 같지만, 의외로 많이 타는 차가 있지 않는가? 재미난 실험처럼 체육복 입히고 구겨넣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생각의 자리도 한 사람씩 놓는데도 버스 타는 수의 사람들이 가득하는 것이다. 책은 종이에 손이 벨 수 있으나, 전통 목각 예술은, 특히 나침반의 소재는, 김지수의 고뇌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도 매우 높은 개별 영혼의 빛이다. 때문에 책으로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남자를 만나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정말이지 스트럭쳐럴한 균열을 직면하는 것이다. 남자와 운이 좋았지만, 집안과 과거는 철저히 지워져 있고 도시에서 홀로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
김지수는 그러나 정치적으로 다른 집행을 많이 갖고 있다. 만일 높이에 있다면, 드보라처럼 강력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목이 가느다란 꽃은 돌봄의 대상이지 않는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농촌 출신 청년 사병들이 총출동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그래서 발생하게 된다. 반드시 남자의 통치와 병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서양과 많이 가깝고, 정신적 균열은 가장 먼저 거기서 시작했다. 성경의 뜻은 우리네 민주 선거처럼 쉬우나, 죽음을 앞둔 제비 뽑기라는 식으로 개별 영혼의 사회적 논리와의 만남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두고 원죄요 한계라고 말하면 누구도 할 말이 없겠으나, 그래서 글이 대개 좋은 것으로만 가득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영혼은 매우 높았다. 개별도 집단도, 어떠한 좋은 글도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처럼, 성경의 영향은 문화적으로도 막대한 민주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것을 두고 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은 흙냄새 땀냄새 가득한 단단한 농기구만 있을 뿐, 그것의 변화는 예수 불꽃의 끝없는 반복의 수단으로만 자리했다. 칼과 창을 부수고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겠다던 예언자의 말은 이상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그만 힘을 잃고 만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밑에 두고 싶어도, 형상은 언제나 사람 높이 위에 있고, 집행은 사람 간의 관계와 기억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관계라는 말을 관계라고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통로는 관계처럼, 관계라는 말과 형상이 관계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성은 출입이 있어야만 하고, 성을 거절하고 싶어도 성을 거절 할 수 없는 이상한 성경의 시대에 그들이 살았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성의 어쩔 수 없는 출입을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성경 안에 감추어진 태아의 절대 타자, 하나님의 자연을 마침내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낙담이 좁은 방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갖게하는지 경험해본 사람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와 같은 자세가 이렇게 심각한 고고학적 사태와 만나는지, 나도 많이 의심스럽다. 어제 나는 길거리에서 몸을 다쳐서, 다행히 누군가 선물해준 침대 위에서 그렇게 누워 잠을 청했다. 다빈치의 해부학 그림이면, 뚜렷한 징검다리는 될 것이다. 사람들은 관념의 사치로 이미 희미한 금의 상태에 있었고, 누군가 발제를 하면서 인간 사회의 최종 결론은 자연의 빛을 입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 두려움은 性聖이에겐 떠나버린 기차 같았던 것이다. 동쪽에 대한 강렬한 관심, 호기심, 모든 것은 해부학적으로 일치점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해부학은 아니다. 감각을 잔뜩 모아놓은 것을 가죽 부대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은 마치 육체를 아나토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혜성이다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동쪽이 그럴 것이다 했는데, 민주가 없던 그 시절에 동쪽도 그와 같은 심판의 도래가 유행했던 것이다. 눌러도 눌러도 눌리지 않고,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는 계급 영혼이 동쪽에 있을 것이다 신화 같은 소문이 돌았는데, 삼국유사 욱이의 설화는 사실과 신화를 손에 맨 매듭처럼 신비롭게 결합시키고 있었다. 꺾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욱이 설화가 말하길, 성경에 이를 정도로의 심판의 씨앗은, 단단함을 통치의 에테르로 삼는 사람들의 소산이었다는 것이다. 단단한 것을 내보내면 어딘가 꺾여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것만큼 폼나는 것은 통치자에게 없는 것이다. 먼 훗날 이집트의 바로왕은 세계에서, 馬와 글로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가장 먼저 본 진시황의 글을 읽으면서, 동쪽 하늘로부터 언젠가 날아올 심판의 씨앗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식이지만, 서양의 바로왕에게 진시황의 그 모든 글들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는 금이요 중세는 은 근대는 동이고 현대는 흙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고고학적 발견을 거듭해가면, 소나기의 먼 산처럼 가도가도 끝없는 높이에 아무런 의도 없이 그리 주장할 만 하다. 그러나 고대는, 초상화와 초상집이 인접하는 것처럼, 성경의 단독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문화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네 흙냄새 나는 초상집과는 또한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작품적 생애적 시도가 성경을 향해서 거듭 있었다는 뜻이다. 종의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아이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흐름에 대한 지독한 기록이다. 어린 학생들인데도 우리는 먼산 불구경처럼 그것의 생각 없는 아우라에 동참했던 적이 있다. 따라서 고대가 금이다는 말은 매우 특수한 상상을 필요로 하는데, 공자와 플라톤의 책은 우리 서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도 건축과 보물들은, 특히 고대의 것은, 관리들의 관리 대상이 되는 것에서 요소 상호간의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는 거의 모든 것의 똥인 상태에서, 개별 영혼 잠깐 동안의 빛과, 진시황과 바로왕의 억지 여드름 격인 정신 현상이 그 시대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등대와 나란히 있는데, 등대의 빛이 그렇게 어려운 높이이며 결국엔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왕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육체의 영어 상태를 기록한 것이다.
영화는 김지수의 영혼을 탐방하면, 뜻하지 않는, 매우 새로운 풍경을 얻어낼 수 있다. 김지수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자동차가 부드럽게 시골 집 바로 앞에서 파킹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평화와 평등에 대한 소망의 극치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말할 수 없고, 피해 없이 그리 주차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두꺼운 사회 이념책을 한번 시도하다가 예쁜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렇게 중화-형상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그래서 형상의 도움이 없으면 진행할 수 없으며, 사고가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 이유도 그와 꼭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다. 초자아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것은 집단의 흐름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화는 일반의 계단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 된다. 택시 같지만, 의외로 많이 타는 차가 있지 않는가? 재미난 실험처럼 체육복 입히고 구겨넣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생각의 자리도 한 사람씩 놓는데도 버스 타는 수의 사람들이 가득하는 것이다. 책은 종이에 손이 벨 수 있으나, 전통 목각 예술은, 특히 나침반의 소재는, 김지수의 고뇌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도 매우 높은 개별 영혼의 빛이다. 때문에 책으로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남자를 만나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정말이지 스트럭쳐럴한 균열을 직면하는 것이다. 남자와 운이 좋았지만, 집안과 과거는 철저히 지워져 있고 도시에서 홀로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
김지수는 그러나 정치적으로 다른 집행을 많이 갖고 있다. 만일 높이에 있다면, 드보라처럼 강력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목이 가느다란 꽃은 돌봄의 대상이지 않는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농촌 출신 청년 사병들이 총출동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그래서 발생하게 된다. 반드시 남자의 통치와 병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서양과 많이 가깝고, 정신적 균열은 가장 먼저 거기서 시작했다. 성경의 뜻은 우리네 민주 선거처럼 쉬우나, 죽음을 앞둔 제비 뽑기라는 식으로 개별 영혼의 사회적 논리와의 만남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두고 원죄요 한계라고 말하면 누구도 할 말이 없겠으나, 그래서 글이 대개 좋은 것으로만 가득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영혼은 매우 높았다. 개별도 집단도, 어떠한 좋은 글도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처럼, 성경의 영향은 문화적으로도 막대한 민주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것을 두고 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은 흙냄새 땀냄새 가득한 단단한 농기구만 있을 뿐, 그것의 변화는 예수 불꽃의 끝없는 반복의 수단으로만 자리했다. 칼과 창을 부수고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겠다던 예언자의 말은 이상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그만 힘을 잃고 만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밑에 두고 싶어도, 형상은 언제나 사람 높이 위에 있고, 집행은 사람 간의 관계와 기억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관계라는 말을 관계라고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통로는 관계처럼, 관계라는 말과 형상이 관계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성은 출입이 있어야만 하고, 성을 거절하고 싶어도 성을 거절 할 수 없는 이상한 성경의 시대에 그들이 살았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성의 어쩔 수 없는 출입을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성경 안에 감추어진 태아의 절대 타자, 하나님의 자연을 마침내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낙담이 좁은 방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갖게하는지 경험해본 사람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그와 같은 자세가 이렇게 심각한 고고학적 사태와 만나는지, 나도 많이 의심스럽다. 어제 나는 길거리에서 몸을 다쳐서, 다행히 누군가 선물해준 침대 위에서 그렇게 누워 잠을 청했다. 다빈치의 해부학 그림이면, 뚜렷한 징검다리는 될 것이다. 사람들은 관념의 사치로 이미 희미한 금의 상태에 있었고, 누군가 발제를 하면서 인간 사회의 최종 결론은 자연의 빛을 입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 두려움은 性聖이에겐 떠나버린 기차 같았던 것이다. 동쪽에 대한 강렬한 관심, 호기심, 모든 것은 해부학적으로 일치점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해부학은 아니다. 감각을 잔뜩 모아놓은 것을 가죽 부대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은 마치 육체를 아나토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혜성이다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동쪽이 그럴 것이다 했는데, 민주가 없던 그 시절에 동쪽도 그와 같은 심판의 도래가 유행했던 것이다. 눌러도 눌러도 눌리지 않고,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는 계급 영혼이 동쪽에 있을 것이다 신화 같은 소문이 돌았는데, 삼국유사 욱이의 설화는 사실과 신화를 손에 맨 매듭처럼 신비롭게 결합시키고 있었다. 꺾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욱이 설화가 말하길, 성경에 이를 정도로의 심판의 씨앗은, 단단함을 통치의 에테르로 삼는 사람들의 소산이었다는 것이다. 단단한 것을 내보내면 어딘가 꺾여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것만큼 폼나는 것은 통치자에게 없는 것이다. 먼 훗날 이집트의 바로왕은 세계에서, 馬와 글로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가장 먼저 본 진시황의 글을 읽으면서, 동쪽 하늘로부터 언젠가 날아올 심판의 씨앗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식이지만, 서양의 바로왕에게 진시황의 그 모든 글들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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