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기
-SBS 다큐 <신의 길, 인간의 길>
SBS가 기독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문제적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6월29일부터 4주 연속으로 매주 일요일 밤 11시20분에 방송되는 'SBS 대기획 - 신의 길, 인간의 길'이다. 2년이 넘는 기획과 1년여의 취재를 통해 ‘예수는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라는 명제를 시작으로 하나님을 믿는 세 종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6월 29일 방송된 1부에서는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를 다뤘고, 7월 6일 2부에는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7월 13일 3부는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 7월 20일 4부는 `길 위의 인간` 편이 전파를 탈 예정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제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가 방영된 직후이므로 제1부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기로 한다.)
모순적인 제작의도
SBS는 영국의 신비주의 연구가 티모시 프리크와 고대 이교신앙 연구가인 피터 갠디가 공동으로 쓴 저서『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를 중심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예수는 신화다』는 일관성 없는 저술로 인해 수준 낮은 책으로 낙인찍힌 저작물이다. 따라서 SBS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출발 자체가 이상하다.
제작진의 말이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단순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 과연 예수가 신의 아들인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론 정답은 누구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수동적으로 종교를 따를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종교를 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 짧은 한마디 말에 그들의 수준과 사상, 프로그램의 제작 목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모르는 무신론자이되 이 시대의 부조리한 현상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지식인으로 그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한국 기독교’라고 말함으로써 성직자들의 재산문제를 다룬 MBC의 ‘뉴스후’에 자극받았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는데 (더불어 아프가니스탄의 샘물교회 순교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는 비겁한 후퇴다. 예수는 카톨릭과 기독교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할 문제다. 전장(戰場)을 축소했으니 훗날 시비가 있을 때 ‘티끌 많은’ 한국 교회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노라고 발뺌하면 한국 이외의 교회들은 상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비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답은 누구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는 말은 매우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모르면 남도 모를 거라는 ‘최악의 교만’이다. 내가 새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 숲에는 새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은가, 새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고 귀 기울이는 것이 옳은가. 차라리 그들에게 그 새가 어찌 생겼으며 어찌 울던가 묻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왜 ‘새는 없다, 너희가 본 것이 새가 아니다’라고만 하는가.
그들은 초기 기독교에 관한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이집트, 로마, 터키, 시리아를 현지 답사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2천 년 전 예수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지 살피는 한편 티모시 프리크의 영국 현지 인터뷰를 통해 예수가 후대에 의해 신격화했을 가능성, 예수가 여러 사람을 하나로 합쳐진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 기독교의 교리가 고대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 등을 제기한다.
그들에 따르면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고대 이집트ㆍ그리스ㆍ로마 등의 민간종교와 신화를 차용한 종교라고 한다. 즉 예수는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인(神人)인 오시리스, 디오니소스, 미트라스의 유대화된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신화(神話), 곧 가공인물이라는 것으로서,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통치의 수단으로 ‘신화인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둔갑시켰고, 그 결과 다른 나라의 민간 종교와 그 신화적 배경이 같았던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은 뱀에게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하셨다. 또 여자는 물론 여자의 후손과도 원수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뱀에게 속은 하와는 이처럼 대대로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뱀, 곧 사탄은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 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교란하기 위해 ‘미혹’과 ‘거짓’을 세상에 뿌려 두었다. 인간이 혼란에 빠진 것은 바로 이 사탄의 교란작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거짓말의 목적은 바로 이 '메시아의 강림'을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걸려서 거짓말의 목적과 진의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끝없는 미궁 속을 헤매어 왔다.
사탄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짜 '여자의 후손'을 만들어 두었다. 최초의 영걸로 인본주의의 제국을 건설했던 니므롯이 죽자 그의 처 세미라미스는 자신의 아들 담무스를 니므롯의 환생이라고 내세웠다. 애굽의 신화에서 이시스 여신의 아들 호루스가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신 키벨레의 아들 데오이우스도 그런 모조품이었고, 힌두교에서 데바키의 아들 크리쉬나로 나타났으며, 중국의 서왕모(西王母), 고대 독일의 헤르타, 인도의 인드라니, 스칸디나비아의 디사 등도 모두 이 모조품의 어머니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환생설(還生設)도 사탄의 주요 전략 중 하나다. 이 환생설은 오늘날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꿈꾸는 세력이 내세우고 있는 중요한 마법적 이론의 핵심이 되고 있으며 뉴에이지 운동이 근원으로 삼는 힌두이즘의 뿌리이고 불교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탄은 그 최초의 모조품인 담무스의 상징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는 네 생물(겔 1:10 ; 계 4:7)중의 하나인 '소'를 모방하였다. 이 소는 본래 '일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사탄은 모든 농사짓는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소를 '농경의 신'으로 만들었고 신성한 노동의 현장을 음란과 미혹의 축제로 몰아갔다.
또한 담무스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부활하는 신으로 만들어져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희석해 버렸으며 예루살렘의 여인들까지 이에 미혹되어 담무스의 죽음을 애곡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겔 8:14).
이렇게 해서 정작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에는 그 수많은 모조품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헐값으로 매도되었으며, 아무도 그를 주목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으로본세계사)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는 이러한 사탄의 방해공작까지도 모두 계산되어서 들어 있었다. 사탄의 방해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를 못 박았으며 그로 인하여 마침내 하나님 자신의 아픔과 눈물로써 이루어지는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를 가리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분이며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로마서 1장 3∼4절)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오시리스 신화처럼 가현적인 인간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처럼 해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단 한번 부활하신 분임을 분명히 하였다.
어쨌거나 이 다큐의 제작진들은 매우 진지하고 인간적인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놓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바라볼 수도 없다는 것’.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장 8,9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직접 구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으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외치는 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찌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 찌니라”(욥38:2-4)
(별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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