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좇은 소경 바디메오
(막 10:46-52)
이 기사는 소경의 치유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기적사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기적사화는 아니다. 이 기사에는 믿음이 특별히 강조되기 때문에 그것은 기적사화가 변형된 양식으로서 신앙사화(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기사는 (세 번째 수난예고와) 인자의 대속 죽음에 관한 말씀과 예루살렘 입성 기사 사이에 있기 때문에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에 속한다. 이 기사의 협의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앞서 가심을 보고 놀라며, 좇는 자들도 두려워한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 당할 일을 세 번째로 가르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영광의 주님 좌우에 앉을 것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서로 다툰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기고 종이 되어야 으뜸이 된다는 말씀을 가르치고, 인자가 온 목적이 섬기고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는 것임을 밝힌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본문에 의하면, 소경거지 바디메오는 예수님에 의하여 눈이 열려 길에서 예수를 따른다. 이러한 태도는 앞에서 언급한 주를 좇는 제자들의 태도와 현저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디메오는 예수를 두려워하며 따르는 제자들의 모범이 된다. 또한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놓여 있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을 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는 주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전제가 된다.
본문을 문장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이 기사는 간결체로 작성되었다. 거의 모든 구절들은 병렬적인 로 결합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48b절, 50절, 51b절만 로 연결되었는데 모두 바디메오의 말과 행동을 묘사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용을 통하여 이 기사에서는 바디메오의 언행이 부각된다. 이 기사에는 직접화법이 많이 사용되었고(47,48,49a, 49b,51a,51b,52), 동사는 몇 개의 분사(46,47,49×2,50 2)를 제외하고 모두 한정 동사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 2번(46b절의 여리고에서 나감과 49절의 무리의 부름의 묘사에) 역사적 현재가 나와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해주고, 미완료가 4번(46:앉아 있다; 48:꾸짖다; 48:외치다; 52:따르다) 사용되어서 지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본문을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움직임의 단어들과 말함의 단어들과 구원의 단어들이 다음처럼 본문에 많이 등장한다. 움직임의 단어들:"이르다", "나가다", "앉아있다", "내어버리다", "뛰어 일어나다", "좇다"; 구원의 단어들:"보다", ("구원하다"는 직접화법에 나옴); 말함의 단어들:"부르짖다", "꾸짖다", "말하다", "부르다." 이상에서 대조가 가능한 표현그룹은 다음처럼 3개가 확정될 수 있다.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대조는 본문의 처음과 끝에 나온다:
설화비평(narrative criticism)의 연속적 행동 분석에서 다루는 이야기 전개의 매듭점들을 살펴보면, 소경거지 바디메오의 치유기사는 다음처럼 매우 많은 매듭점을 갖고 있다.
이 이야기 매듭점의 화상(畵像)에 의하면 시각장애자의 치유 이야기는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매듭점 화상의 위쪽의 가능성만을 추적하여 전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시각 장애자가 방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외침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 주된 이야기의 흐름이다. 여기서 시각장애자의 외침은 믿음의 표출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믿음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행동하는 인물들은 예수(제자)시각 장애자무리들이다. 행동하는 인물들 사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바디메오는 신뢰 가득한 믿음으로 부르짖는다. 예수님은 (왕적인) 권위로 불러 치유한다. 무리들은 방해자도 되지만 그 후에는 돕는 자가 된다. 이 중에서 예수님과 시각 장애자와의 관계를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동기분석
이 기사에서 길, 봄 등의 중요한 동기가 나온다. 이 동기들을 마가복음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우선 마가복음에 나타난 길이란 용어를 찾아보면 이 길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 주의 길을 묘사한다. 이 예수님의 길은 마가복음 전체에서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천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다(참조, 막 1:2). 그 후 천상에서 내려오셔서 (어떻게 내려오셨는지 그 방법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갈릴리에서부터 복음선포 사역을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거기서 사로잡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성령세례를 주시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셨다. 이상을 개괄적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주의 길은 부활절 케리그마에서야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완전한 이해에의 길을, 말하자면 제자들이 부활신앙을 받아들임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을 마가는 "이야기 세계"인 복음서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갈릴리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자의 현현을 전제하고 그것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부활현현의 묘사는 그의 복음서의 끝 이후에 두었다. 주의 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마가복음의 끝인 마가복음 16장 8절의 저편(부활현현=성령세례)에 놓여있다.
봄은 들음과 관련하여 신인식(神認識)에 대한 인간의 무력이 치유됨을 시사하는데 사용된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기사가 많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관한 보도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불구도 치유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헬라세계에서도 인간은 영의 귀와 눈이 닫혀있어서 신적인 세계에 관하여 전혀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간이 먼저 영의 귀가 열리어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다음으로 영의 눈이 치유를 받아 열려야 참 신인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마가복음에도 반영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 사람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인용의 말씀이 비유의 해설과 관련하여 나온다. 그리고는 듣고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귀가 있어도 듣고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귀의 치유가 먼저 보도된다. 예수님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다. 또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책망하신다. 그리고는 소경을 치유하신다. 이렇게 귀먹은 자를 치유하시고 눈먼 자를 치유하신다는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온다. 이러한 치유 이야기는 인간은 영적인 세계에 관하여 눈멀고 귀먹었는데 이것을 치유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시사한다. 바디메오의 치유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영의 귀가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한다는 관련성의 맨 마지막에 나와서 바디메오가 영안이 열려 참 신인식에 도달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적인 불구를 치유하시는가? 영적인 귀가 먼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가 된다. 영적인 눈이 먼 것에 대한 치유(비교, 누가복음에 기록된 엠마오 도상으로 가는 두 제자)는 마가복음에는 보도되지 않고 암시된다. 영안이 열리는 것은 영적인 불구의 결정적인 치유인데 그것은 부활하신 분의 현현에 의하여 치유된다.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제자들이 그 분을 보게 된다. 이것이 영적인 소경의 근본적인 치유로서 영안이 열린 것이며 동시에 예수께서 성령세례를 베풀고 신자들이 그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이렇게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는) 성령을 받아야 영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게 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본문 해설
예수님은 제자들과 또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에 도착했다. 이 도시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행렬은 여리고를 떠난다. 떠날 때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가 소경 거지인데 그 길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나사렛 예수께서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계보적이 아니라 메시야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부터 백성의 해방과 전체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 사역이 기대되기 때문에 이 부름은 이미 기도 형태 안에 옷 입혀진 기독론적인 어투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이 부름으로 바디메오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바디메오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크게 부르짖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께서 멈춰 서서 "그를 부르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이 소경을 불러 말했다. "안심하라.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안심하라"는 말은 치유기적을 준비한다. 이 말을 전해듣고 바디메오는 외투를 벗어 던지고 일어나 예수에게 나아왔다. 외투는 동냥을 모으기 위해서 주로 자기 앞에 펼쳐놓는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이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 나아오기 (따르기) 위하여 그것을 던져버렸다. 외투를 던져 버림은 극도의 흥분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하여줄까?" 바디메오의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의 묻는 반응은 오히려 예수의 대답으로 묘사된다. 그것으로 소경거지의 믿음에 대한 그의 관심을 표시한다. 소경의 소원에 대한 질문은 언어 문장론적으로 마가복음 10장 36절을 상기시킨다. 거기서는 나라가 임할 때 왕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의 문맥에서 그 질문이 나온다. 그러므로 소경을 불러 그의 소원을 묻는 것은 요청을 받은 예수의 왕적인 전권을 시사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소경거지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소원을 말한다. 이 소원은 아직 아무도 피력하지 못한 것이다. "라보니"(선생님이여)라는 부름은 "랍비"의 점층법으로서 '나의 주인'이란 뜻이다. 이 소원의 피력에 대하여 치유 몸짓 대신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예수의 확정이 따른다. 여기 소경에게서는 모든 것이 믿음의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선포된 구원은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보다 더한 것이다. 바디메오는 눈을 뜨자 길에서 예수를 따른다. 이 마지막 묘사를 통하여 마가는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결합을 더 확대한다. 한 때 눈먼 자가 눈을 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다. 그 완전한 의미가 제자도를 의미하는 전문용어인 '아콜루테인'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드러난다. 따르는 자로서 그는 모범적인 제자가 된다. 그가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은 수난에의 길이다.
설교 포인트
1.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영적인 소경이다. 심지어 제자들도 영적으로 눈 먼 상태에 있다. 그래서 주의 길을 따르지 못하고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2. 주의 길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지상에 난 그의 길은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지상에 나타난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천상으로 가는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제자들은 영안(靈眼)이 열려 주님을 바로 알고 주의 길을 따라 가야한다.
3. 영적인 개안(開眼)은 예수님의 전권에 속한다. 그것은 부활신앙에만 열려있고, 부활하신 주의 현현(=부활하신 주와의 만남=성령세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령의 임함, 주의 현존을 통한 영안의 열림을 위해서는 방해가 있더라도 주께 믿음으로 부르짖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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