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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왕은 카노사에서 굴욕이 아닌 영광을 얻었다 | W [중세사]

은바리라이프 2008. 6. 23. 11:31
하인리히 왕은 카노사에서 굴욕이 아닌 영광을 얻었다 | W [중세사]
전체공개 2008.04.10 16:03

(가운데 : 하인리히 4세, 왼쪽 : 클리뉘 수도원장, 오른쪽 :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

 

11세기에 왕과 교황이 공개적으로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르바 주교의 임명권을 두고 투쟁을 한 것이다. 주교 임명권을 가진 사람이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을 한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승리한다면 교황은 정치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게 되어 세력이 종교 영역으로 국한될 터였다.

 

하인리히 4세(1050~1106)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반대파들가 손을 잡았다. 그는 교황을 '돌팔이 수도승'이라고 비난하면서 1076년에는 심지어 그의 파면을 선언했다. 그러자 보복을 작정한 교황은 하인리히 왕의 파문을 발표하였고, 사태가 이렇게 되자 왕의 동맹자들은 교회의 지원을 잃을까 두려워 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왕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만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로 길을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아페닌 산맥의 북쪽 기슭에 있는 마틸데 폰 투스치엔 성이었는데 '속죄의 길'이라고 전해지는 이 길을 걸어간 그는 그 성에 머무르는 교황을 만나 파문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할 작정이었다. 그의 요청은 실제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왕은 사흘 밤낮을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맨발로 서서 성안으로 교황이 불러 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카노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도 고통스러운 패배의 길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고 왕의 권위는 하락하여 교황은 '태양', 왕은 '달' 이라고 불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끝이 아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왕에게 성공의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통해 왕위를 보존했으며, 동맹자들과 관계도 유지한 덕분에 그레고리오 교황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고, 1084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반교황(교황을 반대하여 세운 거짓 교황)인 클레멘스 3세에게 자신을 황제로 임명하도록 종용했다. 그에 반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망명 중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세계사의 비밀 220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