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읽기의 즐거움(18)
-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신약학)
베드로의 탈옥(12:5-11)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탈옥하는 장면의 첫 구절인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는 구절은 사도 베드로의 운명을 놓고 씨름하는 두 그룹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보여준다. 한편에서 헤롯 왕은 자신의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베드로를 투옥시키고, 다른 한편에서 여전히 가정집에 근거지를 틀고 있는 교회(12:12)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권위를 행사해주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이처럼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박해에 대응하는 전형적인 형식이다(cf. 4:23-31). 현재의 이야기에서 교회의 간구는 효력을 나타내고 있음이 증명된다. 베드로는 실제로 헤롯의 감옥에서 석방되었고(12:6-11),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하는 동료 신자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12:12-17).
우리는 이미 4명의 군사들이 투옥된 베드로를 지키는 모습을 알고 있다(12:4). 이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확인한다. 네 명의 군사들이 나뉘어, 두 명이 쇠사슬에 묶인 채 잠자고 있는 죄수를 측면에서 지키고, 다른 두 군사들은 옥문에서 지키고 있다(12:6). 베드로는 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탈출의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헤롯왕의 권력이 저지르는 악행으로 탄압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왕의 매우 치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자들을 돌보는 주의 천사를 당해낼 순 없는 법이다. 장애물들과 옥문, 군인들, 쇠사슬을 통과시켜서,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그를 깨우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한다(12:7).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어떠한 책략도 붕괴시켜버리고 만다.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특별히 베드로를 반대하는 고집 센 헤롯왕의 악한 계획에 대한 특별한 전략은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에 그의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놀랍게도 평행을 이룬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밤에 유월절 음식을 먹도록 지침을 내렸다(출 12:11). 사도행전 12장의 사건들이 식사 시간에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천사가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에게 띠를 띠게 하고 신을 들게 하며 겉옷을 입고 따라오게 한 명령은 유월절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졌던 지침들과 동일하다(12:4). 9절에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베드로는 분명히 그가 구원받은 것이 주님의 행동임을 인지하게 된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2:11). 이것은 모세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출애굽기 15장과 동일한 요소를 제공한다.
우리는 베드로의 탈옥 사건과 구약성서와의 이런 유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구약에서 유월절 사건과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계약 백성으로 규합하는 사건이었다면, 본문의 베드로 구출 사건은 하나님이 계약을 맺었던 이스라엘과의 연속선상에 있는 백성이 다름 아닌 박해당하는 기독교 공동체임을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마리아의 집에서의 재회(12:12-17)
이 내러티브는 여러 번의 이동을 통해서 자유롭게 되는 베드로의 여정을 특별하게 묘사해주는데, 베드로는 헤롯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나와, 도시의 거리를 통과, 검문소에서 여러 통로를 거쳐서 마리아의 집에 모인 신자들의 모임에 당도한다. 이러한 노정은 일반 사회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죄수로부터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인 사도로, 베드로의 사회적 위치가 바뀌는 과정을 반영해준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누가가 베드로의 여정을 꽤나 복잡하고, 극적인 긴장을 고조시키는 묘사로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죄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부분에서, 베드로를 안전하게 감금했던 쇠로 만들어진 첫 번째 문은 의외로 저절로 열린다(12:10). 거꾸로, 존경받는 사도로 복귀되는 장면에서, 베드로는 그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으로 나타난 것인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두 번째 문인 마리아의 집 앞에서 얼마 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12:13-16).
내레이터는 이미 가정집에서 모이는 예루살렘교회의 정규 모임(2:46; 5:42)을 지적했지만, 그런 모임이 이루어진 곳이 누구의 집이었는지는 상세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내레이터는 베드로가 석방된 이후 곧바로 향한 이 장소는 요한 마가의 모친인 마리아라는 여성의 저택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마리아와 그의 아들에 대한 소개가 8:1의 대규모 분산(디아스포라)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최근 이주했거나 아니면 새롭게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가 이전에 욥바에서 살려낸 다비다의 경우처럼, 마리아는 남편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신이며, 여자 하녀를 둘 만큼 부유하고, 지역의 가정 교회의 여성 지도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성이 이 공동체의 지도자와 교사로서의 역할을 하는지는 이 내러티브에서는 알 수 없다. 마리아가 베드로와 만나는 장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 더욱이 사도행전에서 그녀의 명성은 바나바와 사울의 중요한 동역자(12:25)이자 이 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한 마가의 어머니로 확인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서 마리아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마리아의 집에 속한 여자 하녀 로데의 역할이 더 크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녀는 문 앞에 있는 한 방문자에게 인사하고, 그 사람의 소리를 베드로의 것으로 인식했고, 곧바로 신자들에게 돌아가 그 사실을 전했다(12:13-14). 그래서 그녀는 통찰력이 있고 예언자적이랄 수 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오순절의 예언의 성취를 여기서 목도하는데, 그는 성령으로 수립된 새로운 질서 안에서는 여성들이 예언할 것이라(2:18)고 선포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삽비라가 죽은 이후, 어떠한 여성의 소리도 사도행전에서 들을 수 없었는데, 이제 드디어 여자 하녀가 “베드로가 여기 건강하게 살아 있다”고 선포한다. 그렇지만 이 그룹에 속한 신자들은 로데의 소식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로데가 미쳤다”는 말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천사가 출현했다고 반박하기에 이른다(12:15). 그들은 베드로를 직접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로데의 말을 수용한다. 여기서 분명히 확인된 것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아직도 오순절의 예언에서 선포된 의제를 완벽하게 승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특히 여자들과 하류 계층의 노예들의 소리에 유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형식 안에서 그들은 유대교와 그레꼬-로마 사회의 사회적 가치인 명예와 수치라든지 후원자 제도가 가진 상호성의 구조에 도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적용하고 반영할 뿐이다. 이 사람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빈 무덤에 대한 여자들의 보고를 무시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으로부터 조금도 진전이 없다(눅 24:10-12).
기도하는 이 그룹은 베드로를 인식하고, 그를 안으로 환영하고, 그가 최근에 겪은 탈출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말하면서 다른 곳으로 떠난다(12:17). 결국 마리아의 가정 교회의 중요성은 야고보가 대표하는 더 명성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며, 사도 베드로에게 일종의 환대를 제공하고, 그가 중도에 통과하는 거점정도로 축소된다.
단지 이름으로만 야고보에 대해서 언급된 것은 예루살렘교회에서의 그의 중요한 위치를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가정하고, 또한 사도행전의 이야기에서 그가 감당할 중요한 역할을 암시한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로 사도단에는 하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예수의 출현과 승천 이후, 베드로는 죽은 가룟 유다를 대치하기 위해서 신속하게 12명의 사도단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12장에서는 사도단의 상실된 수를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있는 예루살렘의 다른 부류에게 기독교 공동체의 권위와 책임을 위임하는 것처럼 보인다. 환언하면, 베드로는 예수에게 받은 자신의 사역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예루살렘 공동체와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 대 사도로서의 베드로의 위상이 이제 최종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는 야고보와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다른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헤롯의 죽음과 흥왕하는 교회(12:18-25)
베드로의 탈출 장면에서 떠난 이후, 이야기는 극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헤롯에게 되돌아간다. 그는 우선적으로 운이 나쁜 파수꾼들을 처형함으로 베드로를 놓쳐버린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12:18-19). 그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요구하는 식량 공급을 보류하도록 부추기면서,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두로와 시돈에서 온 그들에게 대단한 화를 내고 만다(12:20). 아마도 아가보가 예언한 기근이 그 지방을 강타했을 것이다. 아무튼 헤롯은 안디옥교회나 창세기의 요셉처럼 자선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헤롯의 전제 통치는 이제 종말을 향하고 있다. 그는 왕복을 입고 자포자기하는 페니키아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 헤롯이 예수를 조롱할 때(눅 23:11)라든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눅 16:9-21), 누가의 관점에서 그런 복장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잔인하고 착취적인 관행들에 관한 전형이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그 부자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형벌을 받았다. 그처럼 헤롯은 이제 고통스러운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군중들이 헤롯을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을 때, 그는 베드로가 그랬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천사의 형벌을 받아 충에 먹어 죽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고대 세계에서 충에 먹어 죽는 것은 천벌을 받아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헤롯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청중들은 그의 죽음이 하늘로부터 오는 형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12장의 초반부에서 헤롯의 악행에 대해서 들었다. 그는 야고보를 칼로 쳐서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탈출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을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헤롯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역사적으로 정확히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내러티브상에서 그의 죽음이 곧 그의 악행의 결과로 일어난 일임을 짐작하게 된다. 헤롯의 행동, 즉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헤롯의 악행과 그의 죽음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경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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