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공동서신

연구 3 재림에 대한 소망(벧후3장)

은바리라이프 2008. 4. 26. 21:52
연구 3 재림에 대한 소망(벧후3장)
연구 3 재림에 대한 소망(벧후3장)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종말론적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고 있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사랑은 구약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지 않을 때 이 세상의 삶이 방탕해짐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있다.

 

1. 가르침의 일치(벧후3:1-5)

 

베드로는 둘째 편지를 쓴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첫 번째 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반복적으로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일치된 가르침을 부정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1) 재림에 대한 가르침

첫째 편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문자적으로 베드로전서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여기에는 종말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지금은 잃어버린 또 다른 베드로의 편지인지 또는 벧후1,2장이 3장과 구별된 편지였는지 지금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반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설교, 새로운 성경 공부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 밥을 먹듯이 계속해서 듣고 배워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은 사로 일치한다. 선지자, 주님, 사도들의 일치되고 반복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가 중의 임박한 재림과 심판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노아 시대, 롯의 시대 그리고 지금도 임박한 심판을 애써 외면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정욕에 사로잡힌 자요, 현실에 안주하는 자요,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이다(벧후3:5)

 

2) 재림에 대한 인식

귀를 간지럽게 해주는 설교를 따라 움직이는 성도들이 많다. 새로운 성경 공부법과 설교법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해야 할 새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고 행하는 길이 최선이다. 특히 풍요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성경 여러 곳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가르치고 있는 재림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주의 날(벧후3:6-13)

 

심판에 대하여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다. 심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과거와 미래의 심판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그 근거는 무엇인가? 심판이 늦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베드로는 기록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으로 하고 있다.

 

1) 심판의 날

하나님은 결코 이 땅의 죄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증거는 노아의 시대 때 있었던 물의 심판이며, 또 미래에는 불의 심판이 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이다. 심판이 더디게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고(시90:4 ; 벧후3:8), 또 하나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벧후3:9).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대가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2) 재림에 대한 올바른 사상

잘못된 재림 운동의 후유증으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재림이니 심판이니 하는 용어를 기피하고 이런 용어를 언급하면 이단 보듯이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재림 사상으로 어리석은 양무리를 꾀는 사악한 사이비 집단들이 아직도 있다. 사회가 풍요로와지면서 한쪽에서는 현세의 향락을 즐기고, 경쟁 사회에서 실패한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종말을 바라거나 사회가 전쟁 등으로 뒤집어지는 걸 바라고 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올바르게 주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3. 저를 아는 지식(벧후3:14-18)

 

임박한 재림의 때에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익이 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를 언급한 것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1) 재림의 때에 바른 신앙

베드로는 재림의 때에 우리가 행해야 할 바를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성실한 삶이다(벧후3:14). 불신자는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인내가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인내로써 구원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벧후3:15).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미리 갖추어 악에 대항하여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벧후3:17).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였다(호4:6). 넷째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나야 한다(벧후3:18). 음식은 육체를 강건하게 하지만 영의 양식은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 가지 주의를 잊지 않고 있다. 당시 바울의 편지는 이미 널리 읽혀지고 있었고 베드로조차도 바울의 편지를 정경의 권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과 욕심대로 바울의 편지를 해석하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2)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

당시에 영지주의는 바울의 편지를 자신들의 정욕대로 해석하여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쾌락에 빠진 집단들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성서를 멋대로 해석하는 사이비 집단들이 있다. 정규 신학 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신학 대학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해석을 막아 주고 신학의 틀을 잡아 준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계시만을 외치며 양무리를 미혹하는 무리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억지로 풀 것이 아니라 올바로 배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러할 때 양무리들이 올바로 배워 성장하는 성결한 삶을 살아 재림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우리가 결코 피해야 할 주제도 아니며 반대로 너무 편집적으로 집착해야 할 주제도 아니다. 바른 신학적 관점으로 올바른 종말론 신앙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번영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들 하지만 불과 40여 년 전 순교의 피를 흘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세대가 물질 만능주의로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베드로가 일깨워 주었듯이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이 땅에 성결된 삶을 살아 주의 날을 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