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공동서신

연구 2 믿음과 행함(약1:19-2:26)

은바리라이프 2008. 4. 26. 21:48
연구 2 믿음과 행함(약1:19-2:26)
연구 2 믿음과 행함(약1:19-2:26)

믿음과 율법(행함)의 관계는 오랫동안 교회의 논쟁거리였다.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쟁이 치열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된 책인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신학은 오히려 바울과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1. 도를 행하는 자(약1:19-27)

 

야고보는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이는 루터의 이신득의 사상과 대치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키고 행해야 하는가? 특히 말하고 듣는 행동을 어떻게 하며, 행함이 있는 경건이란 무엇인가?

 

1) 온전한 경건

이 부분은 루터가 거부한 부분 중의 한 부분이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교 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자유를 발견케 한다. 종교개혁을 한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라고 해서 모두 옳지만은 않다. 야고보서를 평가절하한 루터의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후의 종교개혁자들 모두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고 명한다. 이는 잠13:31에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삶의 교훈이다. 그리고 외적 경건과 더불어 내적 경건에 힘써야 한다(약1:27)

 

2) 경건의 삶

현대를 PR 시대라고 부른다. 자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손해보는 시대며, 법정에서도 말 잘하는 변호사가 이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를 장식물로 생각하는 자들과 이신득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죄짓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 때 야고보는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켜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2.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13)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이런 일은 어떻게 율법에 어긋나는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동등한 인격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대부분은 비천한 자들과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부자나 고위층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는 귀한 전리품을 다루듯이 하여 자연적으로 교회 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흠을 잡을 수 없었던 부분은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을 하지 않은데 있다.

또 예수님도 온전한 율법을 이웃 사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게 된다(약2:13).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인은 좇아가야 한다. 즉 온전한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2) 교회 안에서의 평등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교회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라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게 되면 이는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흥의 원인이 된다. 즉 교회가 사회의 계층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이때에 일부 교회에서 건축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어려울 때일수록 어느 부자든 교회에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내기를 목회자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26)

 

바울이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한 구약의 인용(아브라함)을 야고보도 인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행함의 중요성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2) 온전한 그리스도인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