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체됨을 고백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자유는 무책임한 방종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자유이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15)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절제 없는 행동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 수고하던 율법 준수의 굴레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의 노예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면 율법의 노예로부터의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그리고 이 율법을 어떻게 정죄하는가? 그리고 율법을 대신하는 진정한 구원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 사랑의 믿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은 율법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즉 율법을 준행하므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투쟁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갈3:13). 그리고 할례나 어떤 율법적 행위를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며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롬2:26-29 ; 골2:11).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누리게 될 삶 역시 어떤 일을 추구하고 완성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갈5:6). 다만 믿음을 좇아 그것을 기다릴 뿐이다. 마지막 하늘에서의 영화도 맨처음 칭의와 같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이다.
2) 종으로서의 자유
바울의 '자유'의 선포는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법적이고 감정적인 행위가 득세하는 현실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두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용서와 화해하는 자녀 됨의 변화에서 느끼게 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육체의 탐닉을 위한 자유가 아니며, 이웃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며 율법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이웃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자유이다.
2. 성령을 좇는 삶(갈5:16-26)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도 자유를 남용하는 것을 절제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에 갈등을 유발시키게 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실제로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그리스도인의 승리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성령을 따라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갈2:20 ; 갈5:24 ; 롬6:6). 이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겨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고집과 자의적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즉 회개를 통해 옛 삶을 전적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좇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는 삶이다. 이런 삶의 결실을 바울은 9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즉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고, 충성, 온유, 절제는 개인의 신실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개별적이지 않고 연합적이다.
2) 영성 훈련
우리는 매일 아침 성령을 좇아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하루를 마치는 저녁에 실패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성령은 "영적인 일에 전념하라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롬8:6 ; 빌4:8 ; 골3:1,2). 이것은 우리의 전영역-가족, 직장, 친구,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하루의 순간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 성경의 묵상, 사랑의 실천, 교제와 예배라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성령께 복종시키는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3. 그리스도인의 윤리(갈6:1-18)
갈라디아서 6장은 믿는 자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삶 가운데 하나가 믿는 자들 상호간의 관계이다. 특히 성령의 열매를 종합하는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요13:34 ; 요15:12). 그러면 이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가? 특히 믿는 자들의 관계 소에서 목회자와 교인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1) 상호 관계의 중요성
갈6:2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홀로 지고 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은 그짐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자신이 성숙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라 금욕적인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짐진 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시55:22 ; 마11:28). 이처럼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시는 방법가운데 하나는 인간적 유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후7:56).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갈6:10). 특히 이런 관계성은 목회자와 교인들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목회자와 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세워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여 성도를 양육하고 성도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여야 한다.
2) 심는 자의 삶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심는 것과 거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회중들의 마음에 심어야 하며, 성도들은 선한 생각과 행동을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 속에 심어야 한다. 이들이 심은 씨앗은 비록 토양은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분쟁과 시기로 공동체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종의 자세로 사랑을 비롯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나의 변화된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랑하는 자세가 아닌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