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고린도전서의 저자가 바울이란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첫째, 서신 자체가 바울이 이 서신의 저자라는 사실을 증거한다(고전1:1 ; 고전3:4-6 ; 고전16:21). 둘째, 서신의 문체와 사상이 바울 서신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초대교회의 여러 교부들이 이 서신의 저자가 바울 사도임을 증거했다. 주후 95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가 고린도 교회에 글을 보내어 그들의 계속되는 분과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때 이 서신을 인용한 것으로 입증된다. 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 폴리갑(Polycap) 등 많은 교부들이 이 사실에 동의하였다.
2. 저작 장소와 시기
본 서신을 쓰기 전에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냈다(고전4:17 ; 고전16:10 ; 행19:22). 디모데가 마게도나를 거쳐 고린도로 가고 있는 동안에 고린도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 소식과 문의 편지를 받고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고린도전서를 써준 것으로 생각된다. 고전16:8로 보아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썼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 머무른 것은 두 번 알려져 있는데, 한 번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후 잠깐 방문했던 적이 있으며(행18:18-21), 또 한번은 3년간 장기적으로 머문 적이 있다(행20:31), 고전16:19에 아시아의 여러 교회의 문안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이미 그곳에 상당 기간 머무르고 있었다고 여겨지며,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겨울을 날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여름철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바울이 두 번째 에베소에 체류하던 시기에 본 서신을 기록했다고 보면, 그가 에베소를 떠나기 전인 주전 54년 속은 55년으로 그 저작 시기를 생각할 수 있다.
3. 고린도
고대의 화려하고 부유했던 고린도 시는 주전 146년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오랜 후에 시저(Caesar)에 의하여 그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어 주전 29년 이래로 아가야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새로이 건설된 고린도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동서 교역로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고린도는 동서 사방으로부터 문물이 모이는 무역 항구로 부유한 도시가 된 동시에 수많은 민족들과 종교, 사상들이 혼합을 이루는 장소였다. 그 도시의 도덕적 분위기는 매우 타락되어 있었으며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에는 수많은 종교적 창녀들이 있어 간음과 같은 성적인 타락 행위를 공공연히 유포시켰다. 이 도시에 있던 12개 이상의 신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사랑의 여신 아데미에 바쳐진 신전이었다. 아데미 여신의 숭배자들은 이 신전에서 봉사하던 여사제들과 어울려 종교 의식의 한 절차로 음행을 저질렀는데, 한때 이 신전에는 1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는 거대한 상업 도시로서 음란과 방탕이 만연해 있었으며, 아데미 여신 숭배를 종교라는 미명하에 음란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4. 고린도 교회
제2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은 주후 49년경에 마게도냐로부터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손수 장막을 지음으로 그의 일행의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 때 로마로부터 황제의 추방령에 의하여 고린도에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그를 도왔다(행18:1-3). 바울의 헌신적인 전도 활동의 결과 고린도에는 상당히 큰 그리스도인 회중이 형성되었다. 그 교회는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얼마간 포함되어 있었으며(행18:4 ; 고전7:18), 사회적으로는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상류 계급과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고전11:21). 고린도 교회의 주요 인물들로는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행18:8), 디도 유스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글로에, 스데바나, 가이오, 에라스도 등을 들 수 있다.
5. 저작 동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그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안정되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고전1:11)을 통하여 들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은 바울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분파가 생겨서로 다툰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바울을 분노케 한 것은 이방인들까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여전히 용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자가 자기의 계모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묵인하며, 어떤 자들은 교인으로서 여전히 창녀들과 간음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교회에서 성찬을 하기 전에 온 교우가 함께하는 예찬에서 부유한 자들은 실컷 먹고 마시는데,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빈약한 음식으로 인하여 모멸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성찬 전에 실컷 먹고 마신자들은 이미 취하여서 성찬에 경건하게 참석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편 영적인 감성주의에 빠진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절제치 못하여 예배의 질서가 파괴되곤 하였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령의 역사를 오해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하나 바울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전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며 장래의 부활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하거나 영적인 부활만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소식들 외에 고린도 교인들이 써 보낸 편지(고전7:1)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기 되었다. ①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하는 것이 좋은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이방인과 결혼한 자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것, ② 그리스도인이 된 종과 주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되는지, 또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종노릇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하는 것(고전7:21-24), ③ 시장에서 파는 우상의 제물을 사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 ④ 예배 참석시의 복장 문제로 특별히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 가장 큰 위험을 미친 것은 영지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육을 벗은 영적 인간에게는 완전한 구원과 무조건적 도덕적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영향이 고린도 교회에 부도덕한 생활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와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만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이단적 영향들을 배격하고자 하였다(고전1: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