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운동과 오순절 신학의 이해
오순절파는 성령의 내주 하심보다 능력을 더 강조
성령강림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
성령론은 정교회 신학자인 니콜라이 베다에프의 말을 빌리자면 “마지막 탐구되지 않은 신학의 영역”이다. 칼 바르트는 성령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미래라고 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인침과 은사들을 중심으로 성령론을 살펴본다면 개혁교회의 성령세례는 오순절운동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서철원교수는 오순절주의와 비교해 개혁교회 성령론을 제시하고 있다. 서철원교수는 성령론이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리스도 신학으로 개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운동에 대해 공교회는 초기부터 우려와 불안, 회의와 경계로 대했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의 성령부흥운동과 종교개혁시에 나타난 광신적 성령운동 모두 성경의 가르침보다 내적인 체험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조명을 강조하므로 교회의 질타를 받고 이단으로 정죄됐다. 이러한 교회사의 역사는 오순절 운동이 초기에 크게 배척을 당하게 된 이유다. 오순절 운동이 불러일으킨 신학적 논의는 바로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를 중생 후에 받는 별도의 과정이고 중생이나 교회 가입과 일치시킬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오순절주의의 성령이해는 성령 자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시작함으로 교정할 수 있다.
1. 오순절 운동의 역사 서철원교수는 오순절 운동과 오순절 신학의 역사를 구분해 설명한다. 오순절 운동은 오순절시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세례를 받고 그 표로 방언해야 한다는 신학으로 시작했다. 즉 오순절 운동은 방언받는 것을 추구했다. 방언을 받아야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은 1900년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찰스 파함에게서 시작해 1906년 그의 제자인 흑인 감리교 목사 윌리엄 씨모어를 통해 전파됐다. 이에 1914년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형성했고, 1960년대까지 로마 가톨릭을 비롯해 전 세계로 확장됐다.
2. 오순절 신학의 역사 오순절 신학은 처음부터 성령을 추구했다.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교리의 융합이다. 이 둘 다 체험과 인간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인해 교리보다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이러한 오순절의 신학은 웨슬리의 완전성화의 가르침에서 시작했다. 웨슬리는 칭의가 성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특별히 완전성화는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완전성화는 믿음과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자연히 경험이 강조되고 경험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웨슬리는 완전성화에 있어서 성령세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 주도적 경험 위주 신학은 19세기 초엽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찰스 피니에게 이어진다. 찰스 피니는 장로교도였지만 웨슬리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감정보다도 자유의지와 지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간 주도적 경험은 더욱 분명했다. 이러한 웨슬리와 찰스 피니의 신학을 요한 플릿처가 수정 보완했다. 그는 완전성화가 이루어지려면 성령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오순절 운동이 바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파의 기본교리는 성령세례를 반드시 경험해야 하며 그 경험은 방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주의 근본신학은 성령세례는 중생, 곧 구원 다음의 제2의 경험이고 방언을 말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세례의 경험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3.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해 서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있다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게 작정되었고 약속되었다(요 7:37~39).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는 다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어 있으며(갈 3:14),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믿음 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뤄야 하는데, 그 의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의 완전한 제사가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해결했으므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됐고, 백성 됨의 표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교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을 첫 아담(창 6:3)에게서 보여졌고,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함으로 이를 확실하게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성소를 짓고 거주하셨다. 이렇게 거주하심이 바로 성령의 임재이다. 이것이 성령의 임재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이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광야 중에서 성령을 거스렸다고 했다(행 7:5). 그런데 이러한 구약의 임재는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은 신약교회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교수는 바로 요한복음의 관점을 더 우선시해 성령은 보혜사로 백성들과 함께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즉 성령강림의 근본목적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심이며, 성령의 내주가 그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파는 성령의 보혜사로서의 직임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능력 주시는 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서교수는 성령강림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두고 있음이 오순절파와는 분명히 다른 관점이며, 성령강림을 구속의 완성과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또한 여타의 학자들과 다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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